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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쟁이의 헤테로크로니(10)

by Outis

“... 너 뭐 하냐?”


아랑은 대답은커녕 얼굴도 들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설마, 무서워서 그래?”


아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간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리자 아랑의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놀이 기구는 꺄륵꺄륵 잘만 타더니. 이런 거엔 약한 건가.


“그럼 가능한 한 빨리 여기서 나가야지, 별 수 없잖아. 일어나.”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아랑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서,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갑고 축축했다.

땀에 젖은 손.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 손 꽉 잡아. 내가 앞에서 끌어줄 테니까. 넌 다른 데 말고 발 밑에만 보고 걸어.”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비명소리와 기괴한 웃음소리가 날 때마다 손가락이 움찔거리긴 했지만, 아랑은 나름 애쓰면서 잘 따라왔다.

이렇게만 가면 되겠다 싶었던 그때.


“크와악!”


“꺄아아아악!”


쓸데없이 직업정신이 투철한 미라의 등장으로 아랑은 그만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손님의 만족스러운 반응에 한층 더 고무된 미라는 눈치도 없이 계속 우리 주위를 맴돌며 겁을 주었다.


“우워어어어~”


“으아악! 아하아아아앙~”


결국 아랑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렇게 가서는 끝이 없겠다 싶어, 나는 직원인 미라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저기요.”


“으어어어어~”


평범히 말을 걸어서는 통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이기에, 나는 미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죄송한데요, 얘가 너무 무서워해서요.”


이렇게까지 했거늘, 미라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진짜 미라처럼 신음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는 어깨를 거칠게 튕기며 내 손을 떨쳐냈다. 아마 날 여자애한테 잘 보이려고 오버하는 남자애쯤으로 여기고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다고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는 상황. 나는 끈질기게 또 그를 붙잡고서 간절히 부탁했다.


“저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이러다가 얘 기절할지도 몰라요. 좀 도와주세요, 네?”


“어... 어떻게,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미라가 아랑의 상태를 조심스레 살피며 대답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구나, 다행이다 싶어 나는 자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코스를 다 돌지 않고 중간에 나갈 수는 없나요?”


“직원용 비상구가 있기는 해요. 근데 여기서 조금 더 가셔야 하는데.”


“그래요?... 많이 먼가요?”


“아니요. 그렇게 멀지는 않아요. 한 5분 남짓?”


5분이라. 그 정도면 해볼 만하다.


“그럼, 죄송하지만 저희 거기까지 안내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요. 물론이죠.”


“정말 감사합니다. 잠시만요...”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쪼그려 앉아 있는 아랑에게 몸을 숙였다. 그리고 덜덜 떠는 그 어깨를 살며시 다독였다.


“들었지? 비상구로 빨리 나갈 수 있대. 거기까지만 힘내자, 응?”


잠깐의 고민 끝에 아랑은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아랑의 한쪽 귀에 끼워주며 말했다.


“다른 소리 안 들리게 음악 들려줄게. 노래 두 곡만 들으면 여기서 나가는 거야. 알겠지?”


아랑은 눈을 질끈 감은채 고개를 끄덕였다. 고무 재질의 바닥은 밑에 전선을 숨겨두었는지 간혹 위로 살짝 솟은 부분이 있어서, 저렇게 눈을 감고 걷다간 넘어질 수도 있었다. 최소한 바닥은 보고 걸었으면 좋겠건만. 주변 시야를 가릴 뭔가가 필요했다.

나는 입고 온 반소매 셔츠를 벗었다. 실내에서 추울까 봐 한 겹 더 입고 오길 잘했다.


“자, 내 셔츠 받아. 눈 감고 걸으면 넘어질 수 있으니까, 이거 머리에 뒤집어쓰고 바닥 보면서 걸어.”


아랑은 더듬더듬 내 셔츠를 받아 머리 위에 썼다. 나는 그녀의 나머지 한쪽 귀에도 이어폰을 끼운 다음, 내가 가진 곡 중 제일 밝고 신나는 노래들만 재생되도록 플레이 리스트를 세팅했다. 마지막으로 아랑의 양 어깨를 꽉 붙잡고, 미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죄송해요. 일하시는 중인데 저희 때문에.”


“아니에요.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우리는 조심조심 미라를 뒤따라 걸었다. 걸음이 느려서 그런가, 아니면 5분이 원래 이렇게 길었나. 한참 뒤, 미라가 벽과 잘 구분이 되지 않는 시커먼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요. 이 문으로 나가셔서 계단을 끝까지 올라가시면 돼요. 밖은 환하니까 걱정 마시고요.”


“감사합니다.”


나는 미라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계단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다행히 무서운 소품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됐다.


“나왔어. 눈 떠도 돼.”


나는 아랑의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아랑이 찔끔 눈을 떴다.


“이 계단으로 올라가면 된대. 저 위에 나가는 문이 있나 봐.”


우리는 나란히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이 끝나자 문이 보였고, 문을 열자 놀이공원이 나왔다.

우리가 나온 곳은 유령의 집의 출구도 입구도 아닌, 그 중간 어디인 듯했다. 나머지 애들과 합류하기 위해 출구 쪽을 찾아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아랑이 내 셔츠를 돌려주며 말했다.


“고마워. 덕분에 무사히 나왔어.”


나는 별거 아니란 뜻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 너 목에 반창고 엄청 큰 거 붙였네? 다쳤어?”


내 목을 가리키며 아랑이 물었다. 아차. 상처가 다 아물기 전에 딱지가 떨어져서 진물이 나기에 반창고를 붙인 것이, 가려줄 셔츠 칼라가 없어서 그만 보인 모양이다. 나는 얼른 셔츠를 입고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는 대충 둘러댔다.


“그냥 뭐가 나서 긁었어.”


“조심해야지. 손톱에 독이 있대. 담부턴 긁지 말고 약 발라.”


꼭 무슨 어린애 취급하듯이 말하기는. 아까 유령의 집에서 벌벌 떤 주제에.


“그건 그렇고, 넌 그렇게 무서우면서 왜 잠자코 따라와? 싫다고 말을 했어야지.”


“아니... 그러는 너는? 놀이기구 무서워하면서도 탔잖아.”


“그야... 자꾸 빼면 분위기 안 좋아지니까 그렇지.”


“나도 그랬다, 뭐.”


“... 풉.”


“헤헷.”


서로 자기가 맞다고 우기는 모습이 유치하기 짝이 없어서, 우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지? 다들 출구에서 기다릴 거니까 거기로 가야 하는데.”


“그러게. 이쪽으로 한번 가볼까?”


나는 망설임 없이 곧장 아랑이 가리킨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아랑이 소리쳤다.


“야! 어디 가?”


“너 길치라며. 그럼 너랑 반대 방향으로 가야 맞지.”


“뭐? 어우, 재수 없어.”


아랑은 투덜대면서도 날 따라왔다. 둥그런 유령의 집 벽을 따라 걷다 보니, 저 앞에 익숙한 뒤통수 두 개가 보였다. 다윗과 정우였다.


“여어, 우리 여기 있어.”


“어, 뭐야? 너희 왜 그쪽에서 와?”


“일이 좀 있어서... 근데 뭐야, 왜 너희 둘 뿐이야?”


“시유는? 같이 안 나왔어?”


다윗과 정우가 서로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우린 너희랑 함께 있는 줄 알았는데?”


“중간에 아랑이 너 찾으러 가는 것 같았거든. 못 만난 거야?”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아랑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랑은 재빨리 가방에서 전화기를 꺼내 부재중 전화나 문자가 있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러나 시유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전화를 해봐도 연결이 되지 않고 바로 끊겼다.


“왜 안 되지? 저 안에서는 안 터지나?”


“전화가 안돼? 그럼 찾으러 들어가 볼까?”


정우의 제안에 다윗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반대 의견을 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 그랬다가 오히려 엇갈리면? 출구도 여기 하나뿐이니까, 기다리다 보면 나오겠지 뭐.”


아랑은 울상을 지으며 유령의 집을 바라보았다. 맘 같아서는 혼자서라도 당장 찾으러 가고 싶지만, 도저히 또 들어갈 엄두가 안 나는 눈치였다. 나는 그런 아랑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래. 다 같이 움직이면 엇갈릴 수 있으니까 둘로 나뉘자. 정우랑 너는 여기서 기다려. 야, 김다윗. 넌 나랑 같이 들어가자.”


“내가 왜? 그것도 하필 너랑?”


“시끄러워. 잔말 말고 따라와.”


“야, 목, 목. 이거 놔아...”


지난날의 복수도 할 겸, 나는 다윗에게 헤드락을 걸어 억지로 잡아끌었다. 버둥버둥 끌려오는 손맛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한창 기분 좋게 가고 있는데, 갑자기 아랑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잠깐만 얘들아! 방금 시유한테서 문자 왔어.”


“진짜? 뭐래?”


“그게... 이게 무슨 소리야?”


환한 미소가 스친 것도 잠시, 문자를 읽어 내려가는 아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먼저 집에 갈 거고, 앞으로 자기가 연락할 때까지 찾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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