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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쟁이의 헤테로크로니(11)

by Outis

“먼저 집에 갈 거고, 앞으로 자기가 연락할 때까지 찾지 말라고? 아..!”


시유가 보낸 메시지를 소리 내어 읽고서 아차 싶었는지, 아랑은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동그란 눈이 데구루루 구르며 우리 세 사람의 반응을 살폈다. 정우는 애써 모르는 척해주고 있었고, 나도 멀리 있어서 못 들은 것처럼 굴었으나, 다윗 이 녀석이 기어이 초를 치고 말았다.


“야~ 걔는 진짜! 어떻게 가도 가도 정도를 모르냐. 아야! 왜 그래?”


맞았으면 ‘내가 뭐 맞을 짓을 했나?‘ 하고 자신의 언행을 되돌아볼 법도 하련만. ‘바보는 약도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가 보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입술을 가능한 움직이지 않으며 말했다.


“능치 증 챙기라.”


다윗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맞은 게 불만인지 입술을 연신 삐죽거리긴 했지만.


더 이상 무시하기엔 너무 커져버린 방안의 코끼리. 아랑을 위로도 할 겸 정우가 넌지시 물었다.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닐까?”


“글쎄... 아, 왜 계속 안 받아.”


두 번 더 전화를 걸어도 시유가 받지 않자, 아랑은 침울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문자도 장문으로 보내는지, 두 엄지 손가락이 계속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정우가 말했다.


“우리 잠깐 어디 앉을까?”


“아니야. 너희까지 그럴 필요 없어. 나 신경 쓰지 말고 너흰 계속 놀아... 어? 이게, 이거 왜 이래?”


아랑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전화기를 이리저리 만져댔다. 뭔가 일이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아서, 나와 다윗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가서 보니 아랑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속이 상할 대로 상한 아랑은 전화기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 왜지? 어제 분명히 충전기에 꽂고 잤는데!”


나와 정우, 다윗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우린 눈빛과 고갯짓만으로 몰래 의사소통을 했다.


휙휙, 쓱쓱. (‘야, 이거 어쩌냐?’)

절레절레. 절레절레. (‘어쩌긴 뭘 어째. 이걸로 끝인 거지.’)

끄덕, 끄덕. (‘역시, 그게 낫겠지?’)

눈 가늘게 뜨고 미간 찌푸리기. (‘우리까지? 꼭 그래야 돼?’)


다윗이 죽는소리를 내기 전에 정우가 재빨리 치고 들어갔다.


“아무래도 날이 아닌가 보다.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고, 다음에 또 오는 거 어때?”


“그러자. 사실 나도, 더는 못 타겠거든.”


“... 그래. 오늘만 날인가, 뭐.”


나도 지원사격에 나섰고, 썩 내키지 않는 말투였지만 웬일로 다윗도 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데 막상 아랑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녀는 무용지물이 된 전화기를 가방에 넣고는, 미련 없다는 듯이 지퍼를 닫았다. 그리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하고서 말했다.


“아니야. 우리 오늘 끝! 까지 놀자.”


“어? 하지만, 시유랑 오해를 푸는 게 급선무...”


“됐어. 멋대로 혼자 가버린 걸. 필요하면 알아서 연락하겠지.”


지금껏 아무리 시유가 제멋대로 굴어도 다 받아주었는데. 처음 보는 아랑의 모습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혹시 저러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 정우가 확인차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응. 미안 얘들아, 기분 나빴지..”


“아냐. 네 잘못이 아니잖아.”


“우리 진짜 신나게 놀자! 어디로 갈까?”


일부러 저런다는 걸 알지만, 알기에 우리는 더더욱 모른 척 넘어갔다.


“그러네. 이제 뭐 할까?”


“너희 배 안 고프냐?”


다윗이 배를 문지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 바람에 우리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가 하나 끼어 있어서 다행이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두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먹을 시간 지났다.”


“어쩐지! 내 그럴 줄 알았어. 배고프면 더 기분이 꿀꿀하다니까.”


“그건 너 같은 단세포나 그렇고.”


“아니거등? 원래 그렇거등? 너가 그러니까 재수가 없는 거거등?”


“자자, 둘이 그만하고. 여기 푸드코트 있다는데, 갈래?”


언제 챙겼는지 정우가 주머니에서 놀이공원 지도를 꺼내 들었다. 아랑과 다윗이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역시 정우라니까.”


“갈래! 갈래!”


“하하, 그럼 거기로 간다? 어디 보자, 여기가 유령의 집이니까... 이쪽.”


안내역인 정우가 먼저 가고, 밥 먹을 생각에 들뜬 다윗이 그 옆에 꼭 붙어서 갔다. 나와 아랑은 조금 거리를 두고 둘을 뒤따라갔다.

딱히 이렇게 두 그룹으로 나뉠 생각은 없었지만, 어쩐지 아랑의 기분이 한풀 꺾인 듯해서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아까는 억지로라도 활기차게 굴더니, 지금 아랑은 어깨가 축 처져서 땅만 보고 걷고 있었다.


‘배고프면 기분이 더 꿀꿀하다’는 다윗의 지론대로라면 음식이 기분전환에 도움이 될 터. 먹는 거 좋아하는 건 아랑도 못지않던데. 어쩌면 기대해 볼만하다.

다만 ‘맛있으면 땡큐, 먹을 수만 있어도 오케이’인 다윗과 달리, 아랑 이 녀석은 입이 까다로워서 맛이 있느냐 없느냐를 꽤 따지는 거 같다.


‘음식이 맛이 있어야 할 텐데..’


그때, 아랑이 쭈뼛거리며 말을 걸었다.


“저기, 미안한데.”


“응?”


“잠깐만 네 전화기 좀 빌려주면 안 돼?”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아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시유한테 연락하려고?”


“응.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내가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고. 혹시 만의 하나 그새 연락 왔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못 받으면 더 오해할까 봐.”


그렇게까지 구구절절 설명 안 해도 되는데. 나는 자그맣게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내밀었다.


“자.”


“네 전화기로 문자 보내도, 돼?”


“어.”


토도독. 톡톡톡. 망설임 없이 쭉 쓰는 걸 보니 내용을 미리 생각해 둔 게 틀림없다.

조금 뒤 아랑이 전화기를 돌려주었다. 나는 받아서 바로 주머니에 넣었다.


우리는 말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푸드코트까진 아직 멀었나 싶을 때쯤, 아랑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 회전목마다.”


아랑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회전목마가 있었다. 목마를 타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돌아왔다.


“나도 어렸을 때 진짜 좋아했는데. 저렇게 손 흔들면서 찍은 사진도 있고...”


“... 거기 앞에 둘! 잠깐만 서 봐.”


“왜 그래?”


내가 손가락으로 회전목마를 가리키자 눈치 빠른 정우가 금방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회전목마? 오랜만에 재밌겠는걸? 마침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회전목마아?! 애들 타는 걸 창피하게 어떻게... 읍, 읍!”


“괜찮아. 싫어하는 척 안 해도 돼.”


정우가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다윗을 끌고 가 주었다. 나는 아랑의 등을 떠밀었다.


“뭐 해? 너도 얼른 가서 타.”


“어? 너는?”


“사진. 네 흑역사 남겨야지.”


금칠한 말과 가짜 보석 장식.

회전목마가 음악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 “길들여진다는 게 무슨 뜻이야?”


민망해하며 찍지 말라고 손을 젓는 모습.

찰칵.

빨개진 얼굴을 봉 뒤로 숨기는 모습.

찰칵.

화난 얼굴로 웃는 모습.

찰칵.


- “네가 날 길들이면 정말 놀라운 일이 생길 거야.”


작전을 바꾸었는지, 할 테면 해보라는 듯 아랑이 당당히 손을 흔들었다.


“풉. 그렇게 나오면 내가 안 찍을 줄 알고? 더 찍을 건데.”


- “금빛 밀밭을 보면 네 생각이 날 테니까. 그리고,”


찬란한 황금빛이 만화경처럼 빙글빙글 돈다.


- “나는 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도 좋아하게 될 거야.”


찰칵.





푸드코트에 도착한 우리는 햄버거와 떡볶이로 배를 채웠다.

음식은 그다지 맛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아랑은 완전히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그 이후 놀이기구는 적당한 것들로만 골라 탔고, 덕분에 나도 조금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우린 한참을 더 놀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잉 하고 주머니 속 전화기가 울었다.


[‘아랑’님이 ‘1-6 포에버’ 채팅방에 초대하셨습니다.]


“벌써 집에 도착했나 보네? 그나저나 센스 하고는. ‘1-6 포에버’가 뭐냐?”


채팅방에는 어제 노래방 멤버들이 초대되어 있었다.

잠시 후, 아랑이 노래방에서 찍은 사진들과 오늘 놀이공원에서 찍은 사진들을 올렸다.


“이거 봐라? 남의 허락도 없이 막 올리네? 그럼 나도 네 흑역사 사진 올린다?”


나는 사진첩을 열었다. 거진 비어 있는 공간에 금빛이 펼쳐졌다.



한참 동안 손가락이 그 위에서 망설였다.


흑역사.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였더라.

기억에게 사라져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를 저주하는 일이,

이제 뜨지 않았으면 하고 눈을 감는 일이, 뜸해진 건.


균질적인 시간의 흐름을 이탈하여 삐져나온 조각.

‘있어도 없었던’, 기억의 지층에 남지 않을, 이 헤테로크로니의 끝은...



나는 금빛 사진 중 하나를 꾹 눌렀다.

그리고 오늘 찍은 사진들을 전부 선택했다.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


전화기 액정의 매끄러운 감촉이 손가락에 길게 남았다.



까맣게 잠든 전화기 화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언제 봐도 싫은 얼굴.


전화기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어둠에 잠긴 거리를 걸었다.

별보다 사람이 더 많은 서울의 밤거리. 각자가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인 이곳.

이토록 농밀한 무의미 속에 잠겨드는 편안함이란...





그날 밤.


타닥. 탁.


[영상 업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누군가 반쯤 장난으로 올린 동영상 하나.


“후훗. 흐흐흣.”


그 클릭 한 번으로, 운명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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