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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1)

by Outis

어린 왕자가 말했습니다.


“길들여진다는 게 무슨 뜻이야?”


여우가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걸 잊지. 그건 관계가 생긴다는 뜻이야.”


“지금 내게 넌 세상에 흔한 여러 아이들과 전혀 다를 게 없어. 그래서 난 네가 필요 없어.

너 역시 내가 필요 없지. 나도 세상에 흔해빠진 여우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여우일 뿐이니까. 그러나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 필요해져. 내게 너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될 거고, 네게도 나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될 거야.”


“네가 나를 길들이면 내 생활은 달라질 거야. 네 발소리는 다른 발소리와 다를 거고, 난 그걸 알 수 있을 거야. 다른 발소리는 날 굴속에 숨게 하지만, 네 발소리는 날 굴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안 먹으니까 밀은 나한테 아무 소용도 없고, 밀밭을 보아도 떠오르는 게 없어. 안타까운 노릇이지. 그런데 넌 금발이잖아? 그러니까 네가 날 길들이면 정말 놀라운 일이 생길 거야.

금빛 밀밭을 보면 네 생각이 날 테니까. 그리고 나는 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도 좋아하게 될 거야.”


여우는 말을 그치고 어린 왕자를 한참 바라보더니,

“제발, 나를 길들여줘.”라고 말했습니다.





“피곤해...”


아직 잘 시간은 아닌데, 한번 누우니 일어나기가 싫다. 자석처럼 침대에 몸이 딱 달라붙은 느낌이다.

노는 것도 참 고되구나. 집에 오면 바로 샤워하는 버릇이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 이 상태에서 씻으러 일어나야 한다면 너무 싫을 것 같다.


위잉.


“귀찮은데, 또 누구야.”


나는 방금 내려놓은 전화기를 밍기적밍기적 또 집어 들었다.


아랑이 만든 단체 채팅방은 지칠 줄 모르고 갈수록 활기를 띠었다. 이번엔 오늘 못 온 아랑의 친구들이 사진을 보고 부러워 죽겠다며 난리였다.


사진은 아랑과 정우 두 사람이 올리고 있었다. 초반 사진은 주로 아랑이 올렸는데, 그렇게 사진을 찍어대니 배터리가 나갔지 싶을 정도로 자잘한 게 많았다. 중후반 사진은 정우 것 일색이었다. 보아하니 아랑의 전화기가 꺼지고 난 후로는 그가 계속 사진을 찍었던 모양이었다. 그걸 전혀 눈치 못 채게 했다는 게 거의 파파라치 수준이랄까. 좀 무섭다는 생각마저 든다.

다들 부지불식간에 찍힌 바람에 표정이 내추럴하기 그지없었다. 찍힌 그대로, 필터 없이 올려진 사진들은 마치 한 편의 자연 다큐멘터리 같았다. 특히 아랑과 다윗은 표정의 변화가 크고 많아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건 암만 봐도 퓰리쳐감이다.”


그중에서도 먹다가 재채기하는 다윗의 표정은 압권이었다. 하필 재채기가 나와도 사진 찍는 순간에 나오냐. 일상이 개그인 녀석 같으니.

그 옆에서 화들짝 놀라며 피하는 아랑의 표정도 엽기적이긴 마찬가지다.


위잉.


[아랑: 아 뭐야! 괜히 나까지 휘말렸어 ㅋㅋ]

[다윗: ㅂㅈㅇ딱기달ㄹ셈]


뭐 하다 이제 왔는지, 뒤늦게 채팅방 상황을 알게 된 다윗이 정우에게 선전포고를 날렸다. 철자도 엉망인 게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던가 보다.

큰소리만 쳤지 다윗의 공격은 별 임팩트를 갖지 못했다. 하루 종일 먹고 노는데만 정신이 팔려 사진을 많이 못 찍은 탓에 그는 금세 물량부족에 시달렸다. 뻔한 이 전쟁의 결말은 회전목마 마차에 앉아 아양을 떠는 다윗 공주님의 사진을 끝으로, 정우의 압승이었다.


“푸흡! 뭐야, 타기 싫다고 징징대더니. 재밌게 잘만 놀았구만?”


한차례의 ‘ㅋㅋㅋ’ 릴레이가 이어지고, 드디어 채팅방이 잠잠해졌다. 다들 정신적 충격에서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하는 듯했다.

덕분에 비로소 전화기를 내려놓고 쉴 수 있게 되었다. 줄곧 벌을 서고 있던 팔이 피로를 호소했다.


드디어, 끝났다.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가운데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자니, 스멀스멀 기억이 올라왔다.

정우와 나눴던 대화. 유령의 집에서 있었던 해프닝. 시유의 돌발행동. 오늘 탔던 놀이기구들.

그리고, 황금빛 회전목마.


나는 책상 쪽으로 돌아누웠다. 이 각도에선 보이지 않지만, 책꽂이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세 권이 꽂혀 있다.

그중에는 “어린 왕자”도 있다.


- 네가 나를 길들이면 네 발소리는 다른 발소리와 다를 거고, 난 그걸 알 수 있을 거야.


발걸음. 그 발걸음 소리.


[이대로 가면 넌 길들여지고 말겠지.]


‘... 그렇구나. 난 길들여지고 있는 거구나.’


[설마, 앞으로도 쭉 지금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회전목마는 결국 멈추게 되어 있다.

불이 꺼지면 스산한 현실이 돌아올 테다.


그렇게 멀지 않은 이야기.


- 2학년부터 이과랑 문과 반이 나뉘거든. 다른 반이어도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만나면 되지만, 그렇게 안 되는 경우도 있더라.


올해가 지나면 끝날 인연이다.


‘그럼, 그때까지만... 은 안 될까.’


[걔들이 원하는 게 정말 ‘너’일까?]


시선이 저절로 책꽂이에서 서랍 높이로 내려갔다. 보이지 않아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훤히 안다.


[너 같은 건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


-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 필요해져.


“진짜 나 같은 건,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아.”


오른쪽 또 눈이 따끔거린다. 나는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다.

어둠과 아픔, 적막.

역시 나와 어울리는 건 이런 것들이다.


위잉.


“..?!”


어째서,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눈이 떠졌다. 손이 제멋대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아랑이었다.


[자?]


단체 채팅이 아니라 나한테만 개인적으로 보낸 문자다.


나는 ‘자’라는 한 글자에 눈을 고정시킨 채, 몸을 돌려 바로 누웠다. 그러는 동안 내 머리는 끊임없는 “IF”와 “THEN”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이미 내가 읽은 걸 알 텐데, 답장을 안 하면 또 무슨 잔소리를 들을지 모르는데, 답장을 하든 안 하든 나 안 자는 거 알 텐데, 그럼 굳이 답장을 할 필요가 있나?


톡톡톡톡.


[아니]


위이잉- 위이잉-

내 대답이 가자마자 아랑이 이번엔 전화를 걸어왔다.


“?!!!”


순간 깜짝 놀라서 나는 그만 전화기를 얼굴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악! 으으...”


얼얼한 코와 눈두덩이를 미처 어루만질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합, 하고 입을 다문 상태에서 윗니와 아랫니 사이로 입술을 밀어 넣고는, 전화기 화면에 뜬 아랑의 이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슬슬 입술이 아프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가 돼서야, 나는 초록색 버튼을 슬그머니 옆으로 밀었다.


“... 뭐야.”


“어? 혹시 내가 깨웠어?”


“... 아니.”


“근데 왜 이렇게 늦게 받아? 그리고 첫 말이 ‘뭐야’가 뭐야?”


이거 봐라? 지금 나더러 늦게 받았다고 따지는 거야? 이 야심한 시각에 갑자기 전화를 건 주제에 어디서 예의 타령이야? 나는 그쪽 때문에 전화기에 얼굴까지 맞았다고?

물론 이런 소릴 대놓고 할 수는 없다.


“사람은 자기 됨됨이에 어울리는 대우를 받는다는 말, 몰라?”


“뭐래? 너 진짜 사람 기분 나쁘게 만드는데 뭐 있어.”


“그래서, 용건이 뭐야?”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고는 침을 꼴깍 삼켰다. 왜지? 가슴이 벌렁거린다. 숨이 차는데 자꾸 숨을 죽이게 된다.

문자나 메일은 주고받은 적 있어도 전화는 처음이다. 그래서인가..


“아니, 별 건 아니고. 부탁이 있달까? 헤헤.”


떽떽거리던 아랑의 말투가 묘하게 수그러들었다. 부탁이라?

어째 불안하다.


“... 뭔데?”


“어제 말했던 그 게임 있잖아. 그거 디스크 아직 가지고 있어?”


“게임? 아 그거. 어, 그럴걸?”


“그럼 나 좀 빌려주라!”


“너 게임기 없다며.”


“아빠한테 부탁했더니 중고로 사주신댔어.”


맙소사. 그 게임에 대해 알게 된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실행력 한번 끝내준다.

그러나 뭣보다 놀라운 건, 게임하겠다는 고등학생 딸에게 흔쾌히 게임기를 사주신다는 그 아버지시다.


“그걸 막 사주신다고?”


“어때서~ 어차피 생일선물 받을 거 미리 받는 건데.”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생일선물? 고등학생이나 돼서 부모님께 생일선물을 받는단 말이야?”


“어? 그럼 넌 안 받아?”


가히 여우와 두루미 수준. 나와 아랑은 서로에 대한 문화충격에 빠졌다.


‘생일이라고 마지막으로 선물 받은 게 언제였더라... 잠깐만, 생일?’


“너 곧 생일이야?”


“아니. 내 생일은 1월에 있어.”


“... 지금 5월인데요.”


“어. 그러니까 앞당겨 받는다고 했잖아.”


“뭐가 이렇게 당당해?”


“암튼! 디스크 빌려줘.”


... 뭐가 이렇게 당당해.


“그거 우리 형 거야. 물어봐야 해.”


“그럼 형님한테 좀 여쭤봐 주라, 응?”


형한테, 그런 걸 물어보러 연락하라고? 저번에 형이 집에 와서 만나긴 했지만, 원래 서로 연락 잘 안 하는 사이인데.


“... 알았어.”


“야호~ 고마워! 참, 그리고.”


“또 뭐야.”


“너 왜 사진 안 올려줘?”


뜨끔. 가슴이 찔린다.


“너도 오늘 사진 찍었잖아. 올려.”


“... 싫어.”


“어? 내 사진인데 왜~ 궁금하단 말야.”


“궁금할 거 없어. 되게 못 나왔으니까. 갖고 있다가 나중에 너 협박할 때 써야지.”


“아하하! 뭐얏~ 나 그런 거 전혀 신경 안 쓰거든?”


“아무튼, 더 용건 없으면 끊어. 나 졸려.”


“어, 그래. 내일 보자.”


“... 어.”


“잘 자고, 형님한테 물어보는 거 잊ㅈ..”


툭. 아랑의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그러게 끝에 뭔 말이 그렇게 길어. 아마 지금 부들거리고 있겠지? 비죽비죽 웃음이 나온다.



“... 하아.”


방금 전에 다짐했는데. 이렇게 쉽게.


마치 널뛰기를 하는 기분이다. 바이킹 타는 느낌과도 비슷하다.

이러다가 뚝 떨어지면, 산산조각 나서 부서지고 말 거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말했다. 자신을 길들여 달라고.

만약 여우가 거짓말쟁이라면, 그래도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일까?

친구가, 될까?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 되면 더 큰 배신감에 치를 떨겠지. 고향별에 돌아가서는 주황빛 석양을 볼 때마다 여우를 저주할 거다.

분명.


[두려워? 그럼 더 늦기 전에 끝내.]


“......”


나는 책상 앞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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