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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밑작업

by Outis

홍대에 위치한 한 건물 지하. 그곳엔 인디밴드 ‘4 Freaks’의 연습실이 있었다.


주변 상인들의 항의를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최소화하기 위해 벽 사방에 붙인 폼과, 툭하면 물이 끊겨 누렇게 때가 내려앉은 세면대와 변기, 하도 오래 돌려써서 솔이 듬성듬성한 칫솔 하나가 그들의 재정난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밤에 침대 대신 쓰이는, 곳곳이 긁히고 구멍 난 소파는 그나마 럭셔리인 축에 속했다.


이렇듯 생활고에 시달리는 무명 밴드지만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타협할 수 없기에, 그들의 악기는 ‘이런 곳에 이렇게 좋은 악기가?’ 하고 놀랄 만한 것들이었다. 음악도 작곡을 담당하고 있는 리더의 음악세계가 워낙 난해해서 그렇지, 노래 자체와 연주실력은 웬만한 프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팬들은 “이제 4 Freaks 외에 다른 밴드 음악은 못 듣겠다.”라고 아우성칠 만큼, 숫자는 많지 않아도 아주 높은 충성도를 자랑했다.


4 Freaks. 네 마리의 괴물.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리스트, 리더인 ‘윤가람’과 여성 드러머 ‘허니(Honey)’ 두 사람에 의해 결성된 이 밴드는 베이시스트 ‘마이키(Mikey)’를 영입하면서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멤버는 세 명인데 어째서 ‘네 마리’라고 부르는지 의아해하는 팬들의 질문에, 가장 팬서비스가 좋은 마이키가 맨 먼저 “잘은 모르지만 ‘괴물을 위해서(for와 four의 발음이 같은 점에서 착안한 언어유희)’란 뜻도 되니까.”라고 대답했다. 이후 허니가 “태초에 괴물이 셋 있었는데, 거기에 나까지 합쳐서 넷.”이라는 의미 불명의 말을 덧붙였고, 윤가람은 줄곧 침묵을 지켰다.


4 Freaks의 가장 독특한 점은 특유의 음악관도 희귀한 여성 드러머도 아닌, 제일 큰 비중을 맡고 있는 리더 윤가람이 나이로는 셋 중 막내이며 무려 미성년자라는 점이었다.

18세. 계속 학교를 다녔다면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일 나이. 그러나 양 볼에 한두 개 올라온 여드름을 제외하면, 얼굴 생김새나 인상으로는 좀처럼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어떨 때는 세상만사 다 통달한 노인네같이 굴다가, 어떨 때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어린 아기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등, 감정의 격차도 심했다.


3년 전 학교에서 자퇴하고 집에서도 뛰쳐나온 그는 허니가 자비를 탈탈 털어 마련한 이 연습실에서 쭉 지내고 있었다.


“가람가람~ 이거 좀 봐!”


양갈래로 높게 묶은 파란색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허니가 팔짝팔짝 소파 쪽으로 뛰어왔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는 가람의 눈앞에 자신의 전화기를 들이밀었다. 자기보다 여섯 살이나 더 많은 누나가 나잇값 못하고 애같이 구는 꼴이 영 못마땅한지, 가람이 눈살을 찌푸렸다. 바로 코앞에 놓인 전화기를 피해 그가 고개를 뒤로 휙 빼자,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갈색 생머리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조금만 더 기르면 허리까지 올 정도로 긴 머리카락은 기타리스트라서 그렇다는 팬들의 생각과 달리, 그저 돈과 시간이 아까워서 자르지 않고 놔둔 결과였다. 타고난 머릿결이 건강하고 매끄러워서 길어도 엉키지 않는다 것과, 기타를 연주할 때 가끔 흔들어주면 꽤 근사해 보인다는 것도 그가 머리를 자르지 않기로 결심한 데에 한몫했다. 다만 이러한 결심은 머리를 감을 때마다 흔들리곤 했다.


허니의 전화기에선 어떤 노래방에서 찍은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한 남학생이 일본어로 된 노래를 여자키로 부르고 있는 동영상이었다. 가람은 별 관심 없다는 듯 특유의 공허한 표정을 하고서, 갈색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딴청을 피웠다. 원체 자극에 민감해서 쉽게 피로해지다 보니 의도적으로 감각을 차단하는 일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뭐야 뭐야, 누구야?”


옆에 앉아 있던 마이키가 관심을 보이며 끼어들었다. 중소기업 사장님인 아버지와 현모양처인 어머니 밑에서 구김 없이 반듯하게 자란 그는 다른 두 멤버들이 정상의 범주에서 너무 이탈하지 않도록 중심추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성격처럼 외모도 모난 데 없이 무난해서, 밖에서 만나면 이런 특이한 인디밴드의 멤버라는 걸 전혀 모를 만큼 평범했다.

그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영상 밑에 달린 제목을 읽었다.


“어디. ‘오타쿠 고딩의 미친 가창력’? 하하! 무슨 제목이 이래? 근데 목소리는 괜찮은데?”


“그치? 어때?”


허니가 눈을 빛내며 가람을 쳐다보았다. 많은 것이 생략된 짧은 말이었지만, ‘너 늘 네 가창력에 만족 못하고 투덜대잖아. 우리 밴드 보컬로 얘 어때?’라는 그녀의 뜻을 가람은 무리 없이 알아들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가 딱 잘라 말했다.


“오타쿠는 사절이야.”


“왜애~ 오타쿠가 어때서!”


가람의 따가운 시선이 음지 문화의 산물로 둘둘 도배된 허니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화려한 시안 블루 머리카락부터, 노란색과 보라색으로 양쪽 색깔이 다른 컬러렌즈, 까만 립스틱과 네일, 군데군데 생뚱맞은 곳에 레이스가 박힌 검은색 미니스커트, 팔다리를 휘감고 있는 구멍 난 망사, 은빛 스테인리스 해골이 붙은 검정 부츠까지.

‘네 꼴을 좀 봐라’라는 소리 없는 꾸지람이었지만,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당당한 허니의 표정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역시나, 가람은 한숨을 쉬었다.


“너 하나로도 벅차.”


그러는 동안 영상 속 노래는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흘려듣던 가람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그 표정을 본 허니와 마이키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기다렸다. 3년간 함께 활동하면서 서로의 사소한 버릇도 다 파악하고 있는 세 사람이기에, 지금 가람이 무얼 하고 있는지 둘은 너무 잘 알았다.


“... 내가 아니라,”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던 가람이 입을 열었다.


“우리 집 마녀가 더 필요로 할 거 같은데.”


그는 다짜고짜 허니의 전화기를 뺏어 들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순간 허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따로 전화기가 없는 가람이 허니의 전화기를 자기 것인 양 쓰는 걸 늘상 봐왔던 마이키는 허니가 왜 저러는지 어리둥절해서 눈치를 보았다.


톡톡톡. 톡.

방금 세 사람이 본 동영상의 링크가 누군가에게로 전송되었다.





지잉-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새까만 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부스럭부스럭. “어린 왕자”의 보아뱀 그림같이 봉긋하게 솟은 이불이 꿈틀거리더니, 웬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전화기를 낚아채갔다. 전화기를 삼킨 이불 안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뭐야, 윤가람 이 자식. 아직 살아있었어? 미리내가 아니라 왜 나한테 연락을 하고 난리야, 죽을라고.”


이윽고 동영상이 재생되고, 투덜거리던 이불더미가 잠잠해졌다. 노래가 끝나자 이불이 확 젖혀지면서 가람과 같은 또래의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헝클어져서 엉망이던 긴 갈색 머리카락은 알아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갔다.

전화기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소녀의 얼굴을 음산하게 비추었다. 그 얼굴은 가람과 닮은 듯하면서도 어딘가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만성 불면증으로 인해 눈밑에는 다크서클이 짙었고, 양볼에는 여드름이 가득했다. 여드름에 함부로 손을 대면 흉 진다는 말을 들은 이후 가려운 걸 참느라 소녀는 꽤 자주 눈썹을 꿈틀거리곤 했는데, 이 때문에 이유도 없이 자꾸 신경질을 낸다고 주변으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성격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어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를 일이긴 했다.

어릴 땐 나름 인형 눈처럼 예쁘단 소릴 듣던 갈색 눈동자는 복잡한 가정사로 인해 마음고생을 한 탓에 빛을 잃고 냉소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톡톡, 톡. 소녀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세 번의 신호음 뒤, 졸음과 짜증이 섞이긴 했지만 차분함을 잃지 않은 여자의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하... 여보세요. 새결아, 너 지금 몇 시인데 전화를...”


“쌤! 찾아 줘요!”


“... 뭐?”


“우리 학교 교복이야! 얘 우리 학교에 있어! 선생님이니까 쉽게 찾을 수 있죠?!”


“잠깐만, 새결아. 좀 차근차근히...”


“지금 링크 보낼게요! 여기 나오는 애 꼭 찾아주세요, 알았죠? 우리 연극부의 미래가 달렸다고요!”


뚝. 일방적인 통화는 끊어질 때조차도 일방적이었다.





전화기 화면이 잠금 화면으로 바뀌면서 현재 시각이 떴다. 새벽 1시 18분.

혜정은 눈을 감고서, 방금 잠결에 들은 내용을 되짚었다.


“그러니까, 우리 학교에 있는 누군가가 연극부에 필요하다. 그 애를 찾아달라.”


연극부.

혜정이 학생으로 재학하고 있을 때만 해도 동영 고등학교 연극부는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자랑하는, 지역사회에서도 인정하는 학교 대표 동아리 중 하나였다.

그러나 활동이 많다는 건 그만큼 부원들의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뜻. 입시 경쟁이 해를 거듭할수록 치열해지면서, 연극부 같은 동아리는 점점 머릿수 채우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는 겨우겨우 최소 인원수를 유지하며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지만, 이대로 가다간 리스트에 이름만 올리는 유령 동아리가 되거나 조만간 아예 동아리 자체가 없어질지도 몰랐다.


이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한 연극부의 고문, 모두가 기피하는 그 자리를 혜정은 2년 전부터 자처하여 맡고 있었다.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온 윤새결은 올해 연극부 부장이 된 2학년 아이였다. ‘부장으로서 오죽 다급했으면 그랬을까’ 하고 웃으며 넘길 수도 있으나, 새결의 남다른 면모를 알고 있는 혜정은 예사롭지 않은 예감에 휩싸였다.


일반인이 느낄 수 있는 것 이상을 감지해 내는 아이. 비록 추상적인 단어의 나열만을 떠올릴 뿐이지만, 그래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지만, 첫 만남에서부터 그녀는 새결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그날, 그 애는 분명 민희의 일을 읽어냈다. 13년 전 그 일을.


이제 완전히 잠이 깬 혜정은 전화기를 들고 새결이 보낸 링크를 열었다. 동영상이 재생되자마자 그녀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화질도 좋지 않고 얼굴도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으나, 그녀는 영상 속 주인공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얘가, 이런 재능도 있었어?”


벌떡 일어나 앉아 전화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혜정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일석이조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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