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5월의 오후.
그보다 더 뜨거운 온기를 품은 찻잔을 한 손에, 다른 손에는 찻잔 받침을 들고서 나는 창가에 가 섰다. 투명한 유리찻잔 안에서 다홍빛 차가 찰랑거리고, 하얗게 피어오른 김이 햇빛 속에 스러졌다. 가련하게도. 아마 지금쯤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이 보건실 안을 배회하고 있겠지.
창문은 열지 않았다.
밖에선 어느 반 체육시간이 한창이다. 여자애들은 운동장 한쪽 나무그늘 아래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고, 남자애들은 열심히 경기를 뛰고 있다. 축구를 하기엔 인원이 턱없이 모자란 거 같은데. 룰이나 구색 따윈 상관없이 목줄 풀린 강아지 마냥 좋아라 공을 쫓아다니는 게 정말 즐거워 보인다.
“좋을 때다.”
피식 웃으며 무심코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앗, 뜨거워. 붉은 립스틱자국이 찍힌 찻잔이 찰그락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굳이 후후 불어 마실 필요도 느끼지 못할 만큼 한가로운 오후.
중간고사 끝나고 첫 주라서 복통이나 생리통을 호소하며 몇 명 찾아올 줄 알았는데. 어째 그런 것도 없이 조용하다.
밖에선 땀방울과 함께 함성이 부서지고, 들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꽃처럼 활짝 피었다.
참 예쁜 청춘. 사람은 바뀌어도 학교는 그대로다.
저 자리에, 한때 우리도 있었는데.
“... 아, 아닌가? 우린 옥상에 있었지. 후훗.”
듣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떠들면서, 괜히 멋쩍어진 나는 입술에 찻잔을 갖다 대었다. 이젠 약간 뜨겁다 싶게, 여기서 조금만 더 지나면 끝에 아쉬워할 정도로 식었다.
지금 마셔야 딱 적당하다는 지혜를 경험을 통해 얻었다.
차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원망했다. 경험을 해야지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어째서 시간은 다시 돌려주지 않는 거냐고.
차라리 그럴 거면 끝까지 모르게 할 일이지.
<14년 전, 1998년 5월>
저 위에선 하얀 비행기가 청량한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저기 아래에선 촌스러운 파란색 운동복을 입은 애들이 누런 흙먼지를 일으키며 운동장을 돌고 있다.
그 중간, 여기 옥상에는 생리통을 핑계로 체육수업을 땡땡이치고 있는 내가 있다.
불독이라 불리는 체육선생님이나 깐깐하고 고지식한 반장한텐 말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걸 잘 알기에, 나는 부반장한테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얼른 빠져나왔다. 유들유들 순둥이인 부반장은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배는 멀쩡하다. 아프지도 않은데 굳이 답답한 양호실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지. 내 발걸음은 자연스레 옥상으로 향했고,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민희가 나를 맞이했다.
민희는 제집 거실인 양 편안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또 그 책이야?”
나는 헛헛한 입에 조그만 민트 사탕 두 개를 털어 넣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응. 왜?”
“맨날 그것만 읽고 있으니까.”
이젠 너를 보면 저절로 ‘인간실격’이란 말이 떠오른단 말이지.
“그래서, 싫어?”
“아니 뭐... 별로 상관은 없지만.”
응, 싫어.
인간실격이란 제목이 주는 느낌도 그렇고, 저번에 네가 말한 내용도 그다지 좋게 들리지는 않았거든.
너도 그만뒀으면 좋겠어. 내가 지금 담배를 끊으려 노력하고 있듯이.
이런 내 마음을 솔직하게 밝히지 못하고, 나는 괜스레 트집을 잡았다.
“그딴 게 뭐가 그리 좋냐?”
“음... 일단, 주인공이 집안도 부유하고 머리도 좋아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제대로 된 인생을 살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하는 거?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싫어하면서도, 빨리 독립할 생각은 안 하고 아버지 돈에 의지하는 거. 그나마도 그 돈을 건설적인 데에 쓰지 못하고 유흥비로 흥청망청 날리는 거. 이상을 비현실적으로 너무 높게 설정해 놓고는,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을 증오하면서 자기혐오와 자기 파괴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
“... 완전 답 없는 애새끼잖아.”
“후훗, 아하하! 맞아.”
저 미소.
오후의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도자기 같은 민희의 하얀 피부에 금이 갈 거 같다.
저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게 고상하신 문학이란 건지 뭔진 잘 모르겠지만, 현실에서 그런 놈을 만나면 그냥 한 대 쥐어박아 줄 거 같은데.”
내 주제에. 내 주제에도 말이야.
민희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주인공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런데 말이야, 난 주인공의 마음이 이해가 가.”
“왜?”
민희가 휘리릭 책장을 넘겼다. 얼마나 많이 그 부분을 펼쳐 본 걸까. 마치 게임의 세이브포인트처럼 책이 활짝 열렸다.
“여기 이런 말이 나오거든?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라는.”
“......”
“행복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있지, 가졌다가 도로 잃었을 때의 고통을 상상하며 그전에 도망치는 거야. 자기는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걸 아니까.”
상처 입기 전에 얼른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는 거, 그걸 감추기 위해 친다는 연막.
너도, 너의 미소도 그런 걸까.
그때 난데없이 옥상 문이 벌컥 열리면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씩씩거리며 내게 소리쳤다.
“찾았다! 배수경!”
“반장?! 어떻게 여길..? 아직 체육시간 끝나려면 멀었을 텐데?”
“허! 선생님께 너 찾아온다 하고 나왔지. 너야말로 아프다면서 왜 옥상에 있는데?”
“그건...”
쟤가 청춘 드라마에 나올 법한 또라이인 줄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설마 여기까지 쫓아올 줄이야. 나는 마땅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한 채 눈만 굴리고 있었다.
한편, 갑자기 난입해 대뜸 소리부터 질러대는 반장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민희가 멀뚱멀뚱 반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존재를 알아챈 반장이 물었다.
“넌 또 뭐야? 너도 땡땡이치고 있는 거야?”
“굳이 말하자면, 그렇지?”
순간 민희의 눈에 반짝임이 감돌았다. 그녀는 이제 반장을 흥미롭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진 반장은 눈을 부라렸다.
“너, 이름은?”
“어?”
“네 이름! 반이랑 담임선생님 성함도.”
잠시 가만히 생각하던 민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왜? 이르려고?”
“어. 너네 반 선생님이 네가 이러고 있는 거 모르시면 당연히 알려드려야지.”
“안 그래도 될 거야. 이미 알고 계실걸?”
“뭐?”
민희가 태연하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내 이름은 지민희, 1학년 6반. 너는... 수경이랑 같은 반이니 1학년 1반일 거고. 이름은 뭐야?”
자기보다 더한 또라이를 마주한 탓인지, 이번엔 그 대단한 반장이 아무 말 못 하고 버벅거렸다. 덕분에 여유를 되찾은 나는 다시는 없을 이 진풍경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민희는 차분하게 반장의 대답을 기다렸고, 마침내 반장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강, 혜정.”
비행기 엔진 굉음도 깨뜨리지 못한 5월의 하늘과, 어느새 녹아 없어진 사탕이 남기고 간 민트향.
우리 셋은, 여기에 있었다.
<14년 후>
5월의 첫 월요일 저녁.
짤랑. 골동품 가게의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아!”
가게 주인의 둥그런 눈에 반가움이 깃들었다. 그는 방금 들어온 손님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그래, 마음을 정한 거로군요.”
손님, 17세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듬어 주지 않아 눈을 찌를 정도로 자란 검은 앞머리칼이 그의 눈가에 그늘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