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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3)

by Outis

<다시, 월요일 저녁>


털썩.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퉁하고 날 쳐내는 매트리스 스프링의 반동이 거슬린다.

몸을 숙여 가방을 열었다. 노란색 포장지와 리본으로 장식된 선물상자를 꺼내 만지작거려 본다.

상자 안에 든 오르골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결국, 사고 말았다.


“무슨 생각으로 일을 저지른 거냐.”


난감하다. 대체 이걸 뭐라고 하면서 준담.

생일은 1월이라고 했으니까 아직 멀었고, 네가 갖고 싶다길래 샀다고 하면 아마 난리도 아니겠지. 얼레리꼴레리, 초등학생들처럼 들떠서 꺅꺅거릴 아랑과 다윗을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확 그냥, 모른 척 버려버릴까? 돈 주고 산 것도 아닌데.”


놀랍게도 오르골은 공짜였다. 아저씨는 짐작건대 그리 귀한 물건도 아니고, 게다가 얽힌 사연도 있다며 돈을 받을 수 없다 하셨다.


- 사연을 알고 나면 마음이 변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듣겠어요?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 뉴욕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을 앞둔 한 젊은 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떤 장식품 가게에서 “문 리버”를 연주하는 오르골을 발견하고 좋은 예감이 들어 흔쾌히 그 오르골을 샀다. 그의 첫사랑 여인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보석상 ‘티파니’에서 산 반지와 함께 오르골을 가지고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하러 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미 다른 남자 품에 안겨있는 그녀였다.

너무나 큰 슬픔과 충격에 빠진 청년은 반지와 오르골을 아무 데나 처박아두고 시름에 잠겼다. 그렇게 식음을 전폐하며 하루하루 야위어 가던 청년은 결국...


- 불과 며칠 만에 정신 차리고, 보란 듯이 더 좋은 사람 만나 복수하겠다며 이를 갈았지요. 그리고 그렇게 했어요.


아저씨는 멋쩍게 웃으시며 안사람한테는 부디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하셨다.


운 좋게 쓰레기통행을 면한 오르골은 창고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청년의 기억에서 잊혔다. 그렇게 청년은 중년, 노년이 되어 퇴직 후 골동품 가게를 열기로 결심했다. 그가 취미로 모아 온 골동품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던 중, 오르골은 다시금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 내 젊은 날의 상실과 못난 첫사랑의 기억이 담긴 물건이에요. 아름다운 사랑의 꿈도, 애절한 절개의 아픔도 간직하지 못한, 마치 열병이 남긴 흉터와도 같은 물건이죠.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흉터도 희미해지고, 이것도 보면서 웃을 수 있는 하나의 추억이 되더군요.


이렇듯 본인에게는 의미 있는 물건이지만, 아무리 친구라도 여자에게 선물하려는 손님에게 팔려니 아저씨는 영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셨다. 사연을 알고도 정말 사겠냐고 재차 물으시는 아저씨에게 나는 “저주받은 물건만 아니면 됩니다”며 감사히 오르골을 받아왔다. 아랑이 내 여자친구도 아니고, 마음에 걸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 여자친구도 아니고,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아저씨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니 버릴 수도 없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일단 선물상자를 서랍 속에 넣었다. 그러면서 쓸 일이 없었던 돈도 주머니에서 꺼내 도로 저금통에 넣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아랑은 오늘 아침 등교하자마자 대뜸 찾아와서는 “혹시 형한테 물어봤냐”고 채근했다. 어젠 일이 있어서 연락 못했다고 둘러대자 마지못해 물러나긴 했는데, 눈치를 보아하니 빌려줄 때까지 매일 와서 귀찮게 할 기세였다. 어차피 하겠다고 한 거 얼른 해치우는 편이 좋을 거 같았다.


메시지 창을 열고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하지.


톡톡톡톡.


[형 나 부탁이 있는데]


지잉- 형의 답장은 의외로 빨리 왔다.


[어 올만. 잘 있어? 무슨 부탁?]


“아, 잘 지내냐고 먼저 인사부터 했어야 하나..”


[형 게임 CD 누구 좀 빌려줘도 돼?]


[누구?]


“...... 누군지는 왜 물어봐.”


ㅊ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몇 번.


[반 친구]


[그럼 ㅇㅋ]


[감사]


나는 미리 챙겨둔 게임 CD와 공략집을 책가방에 넣었다.





“우와~ 빌려주신대?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줘.”


다음날, 아랑은 게임 CD를 받아 들고 활짝 웃으며 어깨춤을 추었다. 저렇게나 좋을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다.


... 안심인데, 왜 이렇게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지.


[정말 이유를 모르겠어?]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난 저 게임 CD를 통해서 내 쓸모를 보이려 한 거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말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는데 중요하단 걸 어떻게 알겠는가. 결국은 그냥 믿으란 소리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이 꾸준히 믿음을 유지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려 한다. 손에 잡히는 것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확인한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손가락에 끼우는 반지. 변함없는 우정을 약속하며 건네는 선물. 물건이 마음에 들 수록 사람들은 그 마음을 더 강하게 믿는다.


[네가 오르골을 산 이유도 같아. ‘이것 봐, 네가 원하는 걸 가져왔어. 그러니 날 계속 필요로 해줘~’, 푸흐흡! 꼴사나워.]


한참을 재잘거리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아랑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슬그머니 자는 척 책상 위에 엎드려 팔에 얼굴을 묻었다.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꽤 난처한 꼴에 처하게 된다. 절대로 상대보다 감정이 넘쳐서는 안 된다. 그럼 분명 떨어지고 만다. 아웃이다.


[잘 알면서, 왜 자꾸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모르겠다.





“아웃!”


공이 내 손을 맞고 코트 밖으로 나갔다. 나는 우리 편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수비를 위해 골대로 달려갔다.


“헉, 헉, 헉..”


중간고사 끝나고 첫 주. 체육선생님은 시험을 치른 우리에게 포상으로 자유시간을 주셨다. 여자애들은 벤치에 앉아 편안히 수다를 떨기로 한 반면,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남자애들은 농구를 하기로 결정했다. 원래 13명인 남학생 중 한 명이 배탈로 결석을 해서, 총인원은 12명이었다. 12명이서 5명이 한 팀인 농구를 한다니, 그럼 2명은 보조선수로 벤치에 있을 수 있겠구나, 운동신경 없는 걸로 유명한 나는 아마 거의 뛸 일이 없겠구나, 하고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건만.

‘다 같이 참여하는 즐거운 스포츠’라는 선생님의 모토에 따라 우린 시작부터 6대 6으로 뛰고 있다.


이게 무슨 성적에 반영되는 것도 아니고, 대충 뛰어도 될 텐데. 다들 쓸데없이 진심이다.

체육 수업은 언제나 그랬다. 내 쓸모없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간. 정말 싫다.


“아싸, 인터셉트! 속공!”


다윗이 훌쩍 점프해서 상대팀의 패스를 가로챘다. 그의 활약은 자칫 상대편의 득점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내 실책을 만회하며, 우리 팀에게 반격의 기회까지 안겨주었다. 나는 속으로 그에게 감사했다. 내가 가봤자 득점에 도움이 될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열심히 상대팀 골대를 향해 뛰었다.


그런데 그때, 누가 내 발을 걸었다.


“어, 아!”


나는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순간 발목이 비틀리면서 찌릿 통증이 올라왔다. 이어서 무릎과 팔, 어깨에 둔탁한 아픔이 느껴졌다.

삑!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코트를 가르고, 주변이 잠잠해졌다. 바닥에 쓰러진 내게 정우가 달려왔다. 퉁. 다윗이 공을 내던지고 달려오는 소리도 들렸다.


“괜찮아?”


“어.”


“왜 그래? 어디 다쳤어?”


“발목이 좀... 아!”


다친 발목을 잡고 살살 돌려보던 정우는 조심스레 내 다리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접질린 거 같은데.”


등뒤에서 다윗이 으르렁댔다.


“야 노대수, 너냐?”


뒤를 돌아보니 히죽거리고 있는 노대수와 그를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는 다윗이 대치하고 있었다.


“내가 뭐? 이 자식 혼자 발이 꼬여서 넘어진 거야.”


노대수가 나를 힐끔 쳐다보며 씩 웃었다. 나는 별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저런 녀석보다 발목의 상태가 더 걱정이었다.


‘집에 갈 때까지 못 걸으면 어쩌지. 그럼 부모님한테 연락이 갈 텐데.’


금방 털고 일어날 줄 알았던 내가 계속 앉아 있자,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으신 선생님이 달려오셨다.


“뭐야, 다쳤냐?”

“발목을 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건실에 데려가겠습니다.”


“어, 그래 반장. 그래라.”


나는 정우의 부축을 받으며 보건실로 절뚝절뚝 걸어갔다.


“미안해, 나 때문에.”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이윽고 우린 보건실에 다다랐다. 정우가 노크를 했다.


“들어와.”


보건실은 오늘 처음 와보는데,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리는 소리와 책상 의자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맞물리고, 막 이쪽으로 걸어오시는 보건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어? 너!”


“... 어!”


큰 키, 질끈 묶은 검은 생머리, 끝이 약간 올라간 눈. 하얀 가운과 잘 어울리는 전문가스러운 인상. 나는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학기 초에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러 돌아다닐 때, 옥상 문 앞에서 날 제지하던 그 사람이었다.

선생님에게선 그날처럼 깔끔하고 은은한 시더우드향이 났다. 거기에 우리의 땀냄새가 겹쳐지면서, 하얗고 차가운 보건실이 사람의 온도로 채워지고 있었다.


선생님도 나를 알아보셨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셨다.


“뭐야, 저번에 만났던 그 문제아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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