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분 전, 종례 직후>
집에 갈 채비를 하는 내게 정우가 다가오며 말했다.
“솔이는 결국 끝까지 안 왔네.”
다윗이가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서 우릴 돌아보았다.
“아까 가방 갖다 주러 보건실에 갔었지? 어땠어?”
“곤히 자고 있길래 가방만 두고 왔어. 선생님께선 괜찮을 거라고, 큰 문제는 없다고 하셨고.”
“다행이네. 그럼 난 도장에 가봐야 해서 이만. 먼저 간다!”
다윗이는 중학교 때부터 쭉 무에타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잰걸음으로 교실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난 별 뜻 없이 중얼거렸다.
“걔는 먼저 집에 갔으려나?”
“글쎄? 궁금하면 전화해 보든가.”
“어? 뭐 하러. 어차피 내일이면 볼 건데.”
뭘 그렇게까지.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가방 지퍼를 닫았다. 그때 불현듯 정우가 물었다.
“근데 시유는 오늘도 안 오네? 놀이공원 이후로 못 본 거 같아.”
“... 그러게.”
나는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지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놀이공원에 갔다 온 날 밤, 난 참지 못하고 시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끈질긴 내 전화를 마지못해 받은 시유는 고집스레 침묵을 이어갔다. 달래도 보고 얼러도 보고, 화도 내면서 난 그녀의 마음을 열어보려 애썼다.
마침내 입을 연 시유의 말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 나, 그 자식한테 널 빼앗길까 봐 신경이 좀 곤두서있었던 거 같아. 넌 내게 하나뿐인 특별한 친구인데... 당분간 혼자 지내면서 생각을 정리해 볼래.
시유가 솔이를 질투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가 무심코 한 말과 행동들이 시유를 그토록 힘들게 한 걸까. 그 점은 미안하고 안쓰러운데, 듣는 내내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벌써 가방에 때가 많이 탔다.
고등학교 가면 더 큰 게 필요하지 않겠냐며 아빠가 학기 초에 사주신 새 가방. 겨우 두 달 밖에 안 지났는데. 밝은 색이어서 그런가.
사람의 마음도 너무 순수하면 능숙하게 숨기지 못하는 거겠지. 이 때묻은 가방처럼.
“괜찮아?”
정우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누가 괜찮냐는 건지 헷갈렸지만, 난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당연히 괜찮고, 그날 시유도 끝에는 기분이 좀 나아진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응, 잘 가.”
정우가 나가고 얼마 뒤에 나도 교실에서 나왔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이 줄긴 했으나 복도는 여전히 떠들썩했다. 하교시간의 학교가 원래 이랬구나 하고, 새삼 깨닫는다.
딱히 혼자 다니는 걸 싫어하진 않는다. 사실 혼자가 더 편할 때도 있다. 누구 신경 쓸 필요 없이 맘껏 상상 속에 빠져들 수 있어서 좋다.
지금은 그냥, 최근에 있었던 일들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한 것뿐이다.
- 그 자식한테 널 빼앗길까 봐...
‘빼앗긴다’는 표현이 왠지 거북하다. 내가 무슨 소유할 대상 같아서.
그러나 한편으론 기쁘기도 하다. 그만큼 날 의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시유와는 중학교 입학식에서 만났다.
“어머, 아랑이 어머님 아니세요?”
시유의 어머니께서 먼저 우리 엄마를 알아보시고 인사를 하셨다. 오가는 대화를 들어보니 두 분은 예전에 같은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신 사이였다. 무슨 영재 아이를 가진 부모님들을 초청해 그들의 교육 노하우를 듣는 프로그램이라던가, 예전에 엄마가 말씀하신 기억이 났다.
‘본인이 행복하지 않은 한 성공은 아무 의미가 없고, 쭉 지속하지 못할 거면 너무 빨리 잘하는 건 오히려 독이다’라는 신조를 가진 우리 가족은 엄마의 방송출연을 그저 재미있는 해프닝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시유네는 달랐다. 시유 어머니는 딸이 왕년에 방송국에서도 인정하는 영재였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듯했다. 그 자부심은 예전 같지 않은 딸에 대한 깊은 실망감과 배신감의 원천이었다.
“아랑이도 여기, 일반 중학교에 왔나요? 아휴, 얘도 그래요... 어렸을 땐 안 그랬는데, 갈수록 어째 이럴까요?”
예의고 뭐고,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무리 기대에 못 미친다고 자기 자식을 저렇게 남 앞에서 깎아내리다니. 비슷한 처지의 타인을 겉으로는 위로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위안으로 삼는 것도 꼴불견이었다.
“그래도 전에 해놓은 게 있어서 졸업 성적은 아직 상위권이더라고요, 호호. 아랑이도 잘했겠죠?”
‘그래도 내가 너보단 낫지?’라며, 뭐라도 짓밟고 서야 마음이 놓이는 하찮은 인성. 나름 예의를 지키려 애쓰시던 엄마도 표정이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뻔한 걸 아닌 척하느라 복잡하고 지루하게 꼬여가는 어른들의 대화에 질린 나는 아줌마 뒤에 조용히 서있는 시유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내가 계속 쳐다보자 시유의 그늘진 눈도 나를 향했다. 반가움에 난 활짝 웃어 보였다.
시유는 바로 내 눈을 피해버렸다.
그다음 날, 우리는 같은 교실에서 다시 만났다. 나는 멀리 떨어져 앉은 시유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아가 말을 걸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늘 뾰로통한 표정에, 뚫어져라 째려보는 눈빛과 불퉁거리는 입, 불만 가득한 말투. 솔직히 불편했는데.
이유야 어쨌든, 나의 끈질긴 노력으로 우리는 결국 단짝 친구가 되었다. 내게 마음을 연 시유는 속에 있는 상처들을 하나씩 꺼내 보였다.
“난 집에서 있으나 마나야. 모범생인 장녀랑 뭘 해도 귀여운 막내아들만 있어도 우리 부모님은 충분할걸? 언니랑 동생보다 훨씬, 아주 훨씬 뛰어나지 않은 한 난 자식 취급도 못 받아. 예전에 영재 소리 들을 때나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지.”
시유는 집에 가기 싫어했다. 학교 끝나면 괜히 밖을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나는 그런 시유와 함께 있어 주었다. 친구니까.
내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지자 엄마가 차라리 친구랑 집에 와서 놀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시유는 매일 우리 집에 왔고, 밤늦게까지 놀다 갔다. 금요일엔 가끔 자고 가기도 했다.
부모님끼리 안면이 있는 사이라 크게 신경 쓰시지 않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엄마가 다소 심각한 얼굴로 물으셨다.
“시유 걔, 혹시 무슨 문제 있니?”
나는 친구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모른 척했다.
“아니. 왜?”
“너무 자주 외박을 하는 거 같아서. 그나마 우리 집에서 자고 가니 안심이긴 한데... 너 늦게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시유랑 어울리면서부터지?”
“아 엄마, 우리 더 이상 초딩 아니거든? 좀 놀 수도 있지 뭘.”
“글쎄다. 아무리 그래도 딸이 제시간에 안 들어오면 부모로서는 걱정이 되지. 시유 부모님도 많이 걱정하시는 눈치던데.”
“......”
“너, 혹시 무슨 문제 있으면 너희들끼리 해결하려다 일 더 크게 만들지 말고 어른들한테 얘기해. 알았지?”
틀린 말씀은 아니다. 아닌데.
‘그 문제가 어른들한테 있으면 어떡해야 하는데?’
나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다음 날, 눈치 빠른 시유는 우리 부모님이 자기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거 같다며 딴 길로 새려 했다. 나는 별로 내켜하지 않는 시유를 기어이 집으로 데려와, 가능한 가족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내방에서만 놀았다.
이런 방식으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쯤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내 앞에선 환하게 웃어주는 시유를 보면, 어쩐지 내가 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널 빼앗길까 봐.
그 결과가 이런 거라면, 난 과연 잘한 걸까?
- 넌 내게 하나뿐인 특별한 친구인데.
내게도 시유가 그와 같을까? 내가 한 모든 일은 ‘시유’라서였을까, 아니면...
무심코 걷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보건실 앞이었다.
왜 여기로 왔지.
똑똑.
“들어오세요.”
드르륵. 문까지 열어놓고서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안을 기웃거리기만 했다.
“왜 그래, 학생? 어디 아파?”
“아, 아니요. 저기... 발목 삐어서 온 애, 갔나요?”
“아, 아까 그 남학생? 응, 집에 갔는데. 왜?”
“그냥, 궁금해서요. 안녕히 계세요.”
문을 닫으려던 그 순간, 뭔가가 따끔하고 손가락을 찔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문에서 손을 뗐다.
“근데 학생, 이름이 뭐야?”
이름? 내 이름은 왜 물으시지?
“... 최아랑이요.”
“그렇구나. 너무 이뻐서 물어봤어.”
“아, 하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문을 닫고 나서 손가락을 살폈다. 가시나 그런 게 박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 다행이다.”
집에 갔다니까 괜찮겠지. 시유도 한동안 혼자 있고 싶다 했고.
“그럼 뭐, 그동안 난 게임이나 해야겠다.”
발걸음이 한껏 가벼워졌다. 가방 안에 든 게임 CD가 달그락 소리를 냈다.
따사로운 오후 햇살을 맞으며, 나는 제법 한적해진 운동장을 가로질러 갔다.
느닷없는 소녀의 등장에 깜짝 놀란 소년은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바람에 이어폰이 귀에서 빠졌고, 조그맣게 노랫소리가 새어 나왔다.
[恋は thrill, shock, suspense. 見えない力 頼りに(사랑은 스릴, 쇼크, 서스펜스. 보이지 않는 힘에 의지해서)...]
소녀가 말없이 손가락으로 자기 목을 가리켰다.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던 소년은 이내 얼굴이 사색이 되어 손을 목에 갖다 댔다. 거기 있어야 할 반창고가 없었다. 그새 또 새로 낸 생채기가 손에 닿아 따끔거렸다.
“반창고, 내가 떼서 버렸어.”
“네가... 왜?”
여러 의미를 내포한 질문. 소녀는 대답 대신 소매를 걷어 보였다.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 표정이 만족스러운 듯 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너와 같은 부류야.”
보기만 해도 아플 것 같은 상처가 끈적한 거미줄처럼 두 사람을 엮고 있었다.
‘나도 너와 같다’. 줄곧 자신을 숨기며 살아온 소년에게 이 한 마디는 블랙스완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춤과 같았고,
‘너에게 먹혀도 좋으니, 나와 같은 너를 만나고 싶다’는 소년의 은밀한 꿈을 입은 모르페우스(Morpheus; 꿈의 신. 모르핀(morphine)이라는 이름의 유래이다)의 위험한 속삭임이었다.
영원할 줄로만 알았던 겨울잠에서 깨어버린 소년.
따사로운 봄햇살 아래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허기가 죽을 만큼 두려웠던 소년은
[私が感じていた刺を君にも同じように与えていたのかもしれなかった(내가 느끼고 있었던 가시를 당신에게도 똑같이 주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독이 든 풋사과를 깨물었다.
배덕의 맛이었다.
[This love is thrill, shock, suspense(이 사랑은 스릴, 쇼크, 서스펜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괴물에게 잡아먹혀서 죽은 괴물.
둘.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괴물을 죽인 괴물.
셋. 도망치려 했으나 결국 잡아먹힌 괴물.
그리고 넷. 잡아먹으려 했으나, 끝내 도망친 괴물.
괴물이 되어버린 4명의 아이들의 이야기는 3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