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아’. 머리털 나고 처음 듣는 소리다. 옥상 한번 가보려 했다가 졸지에 문제아가 되다니.
“보아하니 다릴 다쳤구나?”
“네. 뛰다가 넘어져서 발목을 삐었어요.”
“여기 의자에 앉아 봐.”
내가 정우의 부축을 받아 의자에 앉는 동안 선생님은 의료용 장갑을 꺼내 끼셨다. 라텍스의 부드러우면서 끈적한 느낌은 발목 쪽으로 갈수록 둔해졌다.
“흠... 좀 붓긴 했지만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고, 일단 얼음 찜질하면서 지켜보자.”
휴우. 나는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최악의 시나리오는 면했다. 학교가 파할 때까지 앞으로 3시간. 부디 그 안에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어야 할 텐데.
“같이 온 친구는 반장인가?”
“네.”
“다음 수업 다 참석 못할 거 같으니까 선생님들께 잘 설명드려 줘. 종례도 못하고 집에 갈지도 몰라.”
“알겠습니다. 담임선생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너희 담임선생님한테는 내가 연락할게.”
“아, 네.”
보건 선생님이 아이스팩과 압박붕대를 꺼내오시는 동안 정우가 날 안심시켰다.
“가방은 걱정 마. 다음 쉬는 시간에 가져올게. 수업도. 오늘 진도 많이 안 나갈 거니까, 나중에 내 필기 보는 걸로 충분할 거야.”
“미안.. 고마워.”
“아냐. 잘 쉬고, 이따 보자.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정우가 보건실을 나가고 나서, 선생님은 빠른 손놀림으로 정확히 붕대를 감으시며 말씀하셨다.
“좋은 친구를 뒀구나.”
좋은 반장이죠,라는 너스레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 했지. 죄책감이 들었다.
발목에 아이스팩을 고정시킨 뒤, 선생님은 나를 부축하여 침대가 있는 안정실로 데려가셨다. 다리 밑에 푹신한 쿠션이 놓였다.
“여기서 쉬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고.”
“네. 감사합니다.”
침대 주변에 하얀 커튼이 둘러쳐졌다. 멀어지는 선생님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런가, 졸음이 쏟아졌다.
그러고 보니 내가 누구인지, 몇 반인지 안 물어보셨는데.
아, 맞다. 처음 만났을 때 말씀드렸지...
배수경 보건 선생은 창가에 서서 조그마한 민트 사탕 두 개를 입에 넣었다. 입안에 퍼지는 알싸한 느낌을 혀로 굴리며, 그녀는 빈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사탕이 다 녹을 때쯤, 그녀가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톡톡톡톡.
[네가 전에 말했던 애가 찾아왔어. 체육시간에 발목을 삐었다더라...]
잠깐의 머뭇거림 후, 그녀의 손가락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저 애, 민희랑 비슷한 느낌이 들어.]
문자를 다 보낸 수경은 전화기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면서 사탕 케이스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세어보지도 않고 나온 사탕 전부를 입에 털어 넣었다.
- 내가 더 잘 살펴봤더라면... 자꾸 괜찮은 척 도망가는 걸 붙잡고 물어봤더라면, 그랬다면!
토독. 녹기도 전에 이빨에 짓눌려 깨진 사탕은 그날의 기억처럼 알싸했다. 독한 향이 코를 찌르고, 들숨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수경과 혜정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죄책감과 상처를 안고서, 둘은 각자의 방식대로 옥살이를 했다.
어머니를 암으로 일찍 여읜 것. 친구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한 것. 그렇게 가까이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아니 ‘하지 않은’ 스스로를 탓하며, 수험생이었던 수경은 의외의 방향으로 진로를 틀었다. 이후의 행보는 마치 출구 없는 미로처럼 그녀를 이 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13년 전, 아름다웠던 추억이 백골이 되어 쓸쓸히 묻힌 이곳으로.
그녀는 기꺼이 그 저주를 받아들였다.
새하얀 가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수경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우릴 도와줘... 민희야.”
딩동- 기억에 잠겨 있던 혜정의 눈이 전화기를 응시했다.
[네가 전에 말했던 애가 찾아왔어.]
딩동-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저 애...]
‘민희’. 그 이름을 본 혜정은 눈을 가늘게 떴다.
딩동-
[이제 어쩔 거야?]
오늘 점심시간, 연극부 부장 새결이 교무실로 찾아와 “어젯밤 부탁했던 일은 어떻게 되었냐”며 혜정을 닦달했다. 막무가내인 새결을 혜정은 “모든 건 절차가 있으니, 우선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기다려라”하고 겨우 달래서 보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아이. 그런 새결의 개입이 소심한 솔이에게 과연 약이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곪아서 썩게 놔두느니 차라리 터뜨리는 게 낫다고, 친구의 메시지를 보고서 혜정은 마음을 굳혔다.
혜정의 하얀 손이 휴대전화를 지나, 책상 위의 유선전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통화연결음은 곧 음성 메시지 안내로 바뀌었다.
“안녕하세요. 솔이 부모님 되시죠? 전 솔이 담임선생, 강혜정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솔이 일로 좀 뵈었으면 해서요.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 걱정 마시고요, 다만 솔이는 모르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연락 주실 번호는...”
낯선 하얀 천장이 보인다.
조용하다.
“?!”
나는 벌떡 일어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7교시 수업이 한창일 시간이었다.
발목에 대고 있던 아이스팩이 없어졌다. 침대 옆에는 내 가방이 놓여 있었다. 누가 다녀간 것도, 날 건드리는 것도 모르고 곯아떨어졌던 모양이다. 처음 와본 보건실에서 이렇게 깊이 잠이 들다니.
“하... 최솔, 너 팔자 많이 편해졌다?”
조심스레 발목을 움직여 보았다. 통증과 붓기가 한결 가라앉아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살짝 걸어보았다. 조금 절뚝거리긴 해도 충분히 혼자 걸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됐다.”
나는 가방을 메고 커튼을 열었다. 그리고 안정실 문을 나섰다.
보건 선생님은 책상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계셨다. 막 입술에 댄 찻잔을 내려놓으시며 선생님이 물으셨다.
“가려고?”
“네. 이제 다 나았어요.”
“걷는 폼이 다 나은 거 같진 않은데? 부모님께 데리러 오시라고 연락할까?”
“아니요, 괜찮아요. 진짜로.”
보건 선생님의 날카로운 눈이 날 위아래로 훑었다. 입이 바짝 마른다. 절대 안 된다고, 데려갈 보호자가 없으면 안 보낼 거라고 하시면 어쩌지.
“앉아.”
“네?”
“지금 가봤자 곧 수업 끝나는데 뭐. 중간에 들어가면 뻘쭘하잖아?”
“아...”
“아까 반장한테 종례에도 참석 못할 거라고 했으니까, 여기서 차 좀 마시다가 바로 집에 가.”
선생님이 씩 웃으시며 컵 하나를 더 들고 오셨다. 나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차가 담긴 컵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주황색 차는 시큼하면서 달큼하니 제법 맛있었다.
“맛있어요. 무슨 차예요?”
“임신 잘되는 차.”
“푸흡! 쿨럭...”
“괜찮아. 남자도 마셔도 된다니까. 수족냉증에도 좋대. 너 아까 만져보니까 발이 차더라.”
“... 그래요.”
결혼하셨구나. 2세 준비하고 계시나 보다. ‘임신에 좋은 차’라는 말이 주는 부차적인 정보를 추측하며, 나는 선생님 책상 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책장에 꽂힌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파스텔색 물방울무늬 포장지로 감싼 얇은 책. 나는 그 책을 가리키며 선생님께 물었다.
“저건 무슨 책이에요?”
“... 왜?”
“같은 걸 담임선생님 책상에서 봤거든요.”
“아... 친구들이랑 나눠가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선생님은 그 책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지 않으셨다. 그런가 보다 하고, 나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컵을 다 비울 때쯤 7교시 수업종료를 알리는 종이 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뭘, 내 할 일을 한 거뿐인데.”
돌아서는 내 등에 대고 선생님이 덧붙이셨다.
“다음에 또 와.”
“... 예?”
“아프면 망설이지 말고 찾아와. 차 마시러 와도 좋고.”
“... 아, 네.”
드르륵. 보건실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선생님은 계속 날 바라보고 계셨다.
수업은 끝났으나 아직 종례가 남았다. 지금 운동장으로 나가면 교실에 있는 누군가가 날 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다고 별일이야 없겠지만, 왠지 싫었다.
나는 바깥 계단을 통해 공중정원으로 올라갔다. 등나무 벤치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종례 끝나고 인적이 드물어지면 나갈 생각이었다.
그저 은신처 정도로만 기대하고 갔는데, 벤치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놀라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와. 등나무꽃 피었네?”
여기서 세라 선배를 만났을 때만 해도 인색한 꽃봉오리가 바짝 오므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보라색 꽃이 풍성하게 만개해 있었다. 나는 벤치에 누워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그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오길 정말 잘했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끼었다. 날 주변으로부터 차단시켜 주는 익숙한 소음. 하늘하늘 바람에 흔들리는 꽃송이. 모든 게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스르륵, 눈이 감겼다.
아른아른 등나무 잎새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간지럽다 싶었던 그때,
‘... 뭐지?’
뭔가 입술을 스치는 느낌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고막을 때리는 비트 사이로 내 심장 고동소리가 파고들었다.
시유가 벤치 앞에 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똑똑. 하교 시간에 찾아온 작은 노크소리. 보건실을 정리하고 있던 수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지? 들어오세요.”
드르륵. 문이 열리고, 한 소녀가 안을 기웃거렸다.
“왜 그래, 학생? 어디 아파?”
“아, 아니요. 저기... 발목 삐어서 온 애, 갔나요?”
“아, 아까 그 남학생? 응, 집에 갔는데. 왜?”
“그냥, 궁금해서요. 안녕히 계세요.”
멋쩍은 듯이 웃으며 문을 닫으려는 소녀에게 수경이 물었다.
“근데 학생, 이름이 뭐야?”
막 닫히던 문이 멈추고, 소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최아랑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