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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쟁이의 헤테로크로니(8)

by Outis

“그날 나한테 우유를 준 그 친구는 선생님께 혼쭐이 났어. 정말 미안한 짓을 했지.”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도윤이에게 미안하다 되뇌었다. 그에겐 닿지 않겠지만, 결국 내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한 의식에 지나지 않을 뿐이어도,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늘 그렇게 되었다.


“왜 네가 미안해? 싫다는데도 그 애가 억지로 준 거잖아.”


놀이공원 바닥에 새겨진 문양을 무심코 좇고 있던 눈길을 들어 난 솔이를 돌아보았다. 내 말에 대한 반대와 위로가 적당히 반반씩 섞인 표정이었다.


“내가 싫다는 의사표현을 똑바로 했다면 그 애도 포기했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고개를 저었다는 것도 나 스스로에게 유리하도록 기억이 조작된 건지도 몰라. 그럼 그 앤 억울하게 혼난 거겠지.”


“그런... 너무 자신한테 엄격한 거 아냐?”


“하하.”


코에 먼지가 들어가면 재채기가 나오듯이, 졸리면 하품이 나오듯이, 반사적으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엄격하다기 보단, 나 나름 애쓰고 있는 거지.”


“뭘 위해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기 위해서.”


나는 고개를 똑바로 하고 앞을 바라보았다. 내가 좇던 바닥의 문양은 매표소로 이어져 있었다. 마침 매표소에 손님이 찾아왔다. 멍하니 있던 매표소 직원이 활짝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의 얼굴에 얼핏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졌다.


“... 난 다른 사람들과 의견이 안 맞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피했던 거야. 그런데 그걸 ‘모두를 위한 최선’이라 여긴 우를 범했어. 난 착한 사람이다, 모두를 위해 내가 참는 거다, 그러니까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 그게 어느 순간 ‘착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바뀌면서, ‘착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는 믿음에 갇혀 버린 거지.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피스 메이커 역할을 자처하면서 자기만족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의 욕구가 무시되는 괴로움과 억울함을 느꼈어. ‘나는 왜 늘 참는 쪽일까? 그건 내가 참아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저들 탓이야’, 이렇게 끊임없이 남을 탓하고 원망하며... 우습지?”


솔이는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날, 비록 엉망진창으로 끝났지만 처음으로 내 솔직한 마음을 인정하고 나서 난 차츰 깨달았어. 충돌을 피하는 게 꼭 최선은 아니란 걸. 남과 잘 부딪히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걸.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면서 속으로 그들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던 나도 결코 잘하는 게 아니었단 걸 말이야. 무조건 괜찮다 하지 말고 어디까지 괜찮은지 알려 주었어야 했다, 내가 지치지 않을 마지노선이 어딘지 알려 줬어야 했다, 그럼 분명 수긍하는 이들도 있었을 거다, 하고. 그 이후로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며 나만의 안전거리를 찾아갔지. 물론 아직 진행 중이고.”


놀이기구 굉음과 함께 한차례 비명이 우릴 둘러싼 공기를 흔들고 지나갔다. 부끄러운 이야기. 이쯤에서 대충 마무리 지을까 했는데, 솔이가 중얼거리며 이어나갔다.


“넌 정말 대단하구나.”


“뭐가?”


“스스로 깨달은 것도 대단하고, 깨달음을 토대로 변한 것도 대단해. 보통 그렇게 못하니까.”


“아냐. 그때 아랑이한테 거짓말쟁이라고 한방 맞지 않았다면 난 계속 그러고 살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감사하고 있어. 물론 그 당시엔 엄청 충격이었지만, 하하.”


“걔가 심했지. 예나 지금이나 정도란 걸 모르고 훅 들어오는 건 똑같네.”


“음? 혹시 너도 아랑이한테 한방 먹은 적 있어?”


“... 뭐, 조금.”


역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 혹시 얘기해 주려나 기대해 보았지만, 솔이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래서 둘이 부쩍 가까워진 그즈음, 영어회화 발표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하고 혼자 짐작해 버렸다.


‘정도를 모르고 훅 들어온다라...’


나는 꼬꼬마 유치원생 아랑이와 지금의 아랑이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비교해 보았다. 내게도 그랬듯 시간은 아랑이의 많은 걸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확실히, 변하지 않은 것도 있어 보였다.


“아무튼, 유치원 졸업하고 헤어져서 올해 처음 만났는데, 다행히 아랑이는 그때 일을 기억 못 하는 거 같더라. 너도 비밀로 해줘.”


“어? 너희 그때부터 쭉 함께해 온 거 아니었어?”


“응? 아니.”


“그럼 언제부터 둘이... 되게 친한 사이가 된 거야?”


“누가? 아랑이랑 나? 딱히 그렇진 않은데.”


나와 솔이는 눈을 깜빡이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뭔가 크게 어긋나 있는 느낌이 들었다.


“... 그럼 아까 그건 뭐야?”


“뭐?”


“어제 우연히... 정말 우연히 만난 거. 어떻게 알았어?”


주어도 목적어도 정확하지 않은 애매한 문장이지만, ‘어제’라는 말과 ‘만났다’는 말로 나는 쉽게 그 뜻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아 그거? 내가 너한테 가라고 보냈거든.”


“어?”


“시유가 집에 가길래 아랑이더러 너 따라가라고 했다고.”


슈웅! 꺄악! 돌연 비명과 굉음이 귀를 때리고 지나갔다.


“... 어?”


솔이는 살짝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무래도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그게, 내 입으로 말하긴 뭐 하지만 나 꽤 분위기를 잘 읽는 편이거든. 요새 시유 때문에 아랑이가 너랑 편하게 얘길 못 해서 아쉬워하는 거 같더라고. 그래서 어제 기회가 생긴 김에 내가 눈치껏 너한테 보낸 거야. 아랑이도 그러겠다며 바로 가던데? 둘이 어긋나지 않고 잘 만났나 봐. 다행이다.”


혼란에 빠져 있던 솔이의 얼굴에 천천히 허탈한 미소가 번졌다. 눈은 초점을 잃고 무릎 언저리에서 헤매었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손은 중간에 멈추어 머리칼을 살짝 움켜쥐었다. 뭔가 어이없어하는 거 같기도 하고 자책하는 거 같기도 한, 묘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나와 아랑이 사이를 오해한 듯하다. 어쩐지 오늘 아랑이랑 있을 때 태도가 영 어색하더라니. 나도 몰래 웃음을 터뜨릴 뻔한 걸 겨우 참았다.


“... 근데 걔가 왜 나랑 얘길 하고 싶어 해?”


문득 생각난 것처럼 솔이가 물었다. 하나의 의문이 해결되자 또 다른 의문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그런 건 본인이 더 잘 알아야 하지 않을까.


“글쎄? 아랑이는 누군가 자기 사람이 되겠다 싶으면 그 사람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하거든. 내가 보기에 걘 이미 널 자기 영역에 넣은 거 같던데? 다윗이도 널 특별히 생각하고 있고.”


점점 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 저 얼굴을 보니 솔이는 진짜 몰랐나 보다. 의외로 이런 데는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다 싶다.

그나저나 이 흐름,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사실 처음에는 속을 잘 모르겠어서 경계했었는데, 보면 볼수록 넌 좋은 녀석이구나 싶어. 그래서 나도 다윗이랑 아랑이랑 합류하려고.”


“... 응?”


“나도 너와 더 친해지고 싶단 뜻이야.”


솔이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크게 떴다. 저걸 뭐라고 해야 할까, 순수한 놀라움? 딱히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반응이다.

상관없다. 지금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든, 앞으로의 대답이 뭐든, 이젠 무작정 두려워만 하진 않을 셈이다.


내가 원하는 바를 되도록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것. 내겐 아직 연습이 많이 필요하다.

때가 되면 꼭 털어놓으리라 다짐한 ‘내 진심’을 전하기 위해.


“너희랑 같이 있으면 정말 즐겁거든. 난 너희와 계속 잘 지내고 싶어. 그러기 위해 너한테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진지하게 말했다.


“아랑이를 속이지 마. 걔가 사람을 잘 파악하려 하는 건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야. 한번 자기 사람으로 받아들이면 상대를 정말 아끼니까. 그런데 그 상대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면, 아랑이는 아마 견디지 못할 거야.”


‘거짓말쟁이는 질색’이란 아랑이의 말이 상대를 향한 공격이라기 보단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철칙이란 걸, 곁에서 지켜본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가능한 걔한테 진솔한 모습을 보여줘. 부탁할게.”


“......”


가타부타 대답 없이, 솔이는 내 시선을 피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과연 이걸, 내 말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오래 기다렸지~”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타이밍도 절묘하게 롤러코스터를 타러 갔던 세 사람이 돌아왔다. 나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반가이 그들을 맞이했다.


“잘 타고 왔어?”


“응. 너흰 어때? 좀 괜찮아졌어?”


“어. 난 그런데, 솔이는...”


“나도 괜찮아.”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솔이가 대답했다.


“정말 괜찮겠어?”


확인차 묻는 내게 솔이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 아랑이와 다윗이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잘됐다! 그럼 우리 뭐 타러 갈래?”


“바이킹 어때?”


“좋지! 가자.”


우리는 바이킹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맨 뒤에 혼자 떨어져서 따라오는 솔이를 돌아보았다. 그는 바닥만 쳐다보며 걷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서.





<2년 반 뒤>


반대에 부딪힐 줄 알고 있었다.


“절대 안 돼!”


실망시켜 드릴 줄 알고 있었다.


“너는 꼭 존경받고 당당하게 살기를, 우리가 그렇게 바랐는데.”


말하면 후회할 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말했다.


“저는 아빠 뒤를 이어서 제빵사가 되고 싶어요.”


안 그러면 평생, 더 후회할 테니까.


“의사도 세상에 필요하지만 제빵사도 세상에 필요해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도 숭고하지만, 맛있는 빵으로 기쁨을 주는 일도 숭고해요.”


“그런 허울 좋은 말로 둘러대지 마라. 비교가 되냐? 사람들이 의사랑 제빵사를 같게 보느냔 말이야!”


“적어도 제겐 그래요. 저는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아빠의 일이 자랑스러워요. 아빠가 만드신 빵을 먹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껴요.”


“좋은 것만 말하는구나. 우리가 힘들게 사는 그 꼴을 다 봐놓고도.”


“못되게 구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어요. 의사가 돼도, 회사에 다녀도, 어차피 그런 사람들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무시당하지 않잖니. 여기는 끝이 없어. 언제나 그 자리라고.”


“지금껏 두 분이서 손님들의 억지를 다 참고 버티신 거, 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한때 도망치던 자신과 동일시했던 부모님이 실은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하고 계셨는지, 이제는 알고 있다.


“그동안 우리 가족을, 보금자리를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존경하고 사랑해요, 엄마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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