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이라며 떠들썩했던 사람들의 불안과 흥분도 점점 짧아지는 해만큼 식어가던 어느 늦가을의 저녁. 쌀쌀한 바람이 갈색으로 물들인 거리를 교복을 입은 세 여학생이 나란히 걸어갔다. 바짝 마른 낙엽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발밑에서 스러지는 걸 알지 못한 채, 뭐가 즐거운지 셋은 그저 웃었다. 거리낄 것 없이 환하게 웃고 있는 한 명, 비죽 새어 나온 웃음을 들키기 전에 다시 담으려는 한 명, 그리고 말없이 조용히 웃고 있는 한 명.
마지막 그는 슬그머니 걸음을 멈추더니, 그대로 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다행히 나머지 둘이 금방 눈치채고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민희야?”
“신발에 뭐 들어갔어?”
“... 아니.”
“그럼?”
민희는 힘껏 미소 지었다.
“정말 다행이야. 너희를 만나서.”
바스러질 것 같은 그 미소 뒤로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13년 후>
‘거짓말.’
책상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회상에 잠겨있던 혜정은 반쯤 감았던 눈을 크게 떴다. 흐리멍덩하던 눈을 날카롭게 갈고서, 그녀는 책꽂이에 나란히 세워둔 책들 중 유난히 얇은 한 권을 노려보았다.
5월의 늦은 오후. 밖에서는 따스한 바람이 땀내 나는 청춘의 열기를 안고 달려오다가 굳게 닫힌 교무실 유리창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졌다. 우악스러운 함성소리가 아련히 부서지고, 새로운 함성이 그 뒤를 따랐다.
딩동- 책상 위에 놓인 혜정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었다. 혜정은 눈만 움직여 전화기 화면에 뜬 메시지를 읽었다.
[네가 전에 말했던 애가 찾아왔어.]
딩동-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저 애...]
딩동-
[이제 어쩔 거야?]
혜정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책상 위로 뻗었다. 하얗고 예쁜 손이 휴대전화를 지나 사무용 유선전화기 수화기를 집었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달칵.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삐-”
상대가 마치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혜정은 활짝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솔이 부모님 되시죠? 전 솔이 담임선생, 강혜정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솔이 일로 좀 뵈었으면 해서요.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 걱정 마시고요, 다만 솔이는 모르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연락 주실 번호는...”
음성 메시지를 남긴 혜정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자신의 휴대전화를 잡았다. 까만 거울 같은 휴대전화 액정에 차갑게 굳은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선의라든가 소명이라든가, 그런 깨끗한 게 아니야. 이건 나에게 내리는 처벌, 그리고...’
번들거리는 손때 사이로 비스듬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에 대한 복수야.’
<한 달 전>
달력에 큼지막하게 적힌 숫자가 3에서 4로 바뀌고, 겨울이 물러난 자리에 도둑처럼 재빠른 봄이 울긋불긋 색을 칠했다. 단단한 옥수수 알갱이가 팝콘이 되어 부드러운 하얀 속살을 터뜨리듯이, 드디어 껍데기를 벗은 연분홍빛이 보드라운 치마폭을 펼쳤다. 피어 있는 기간이 길지 않은 만큼 벚꽃은 얼마 안 되어 절정에 이르렀다.
준범 선배를 도와 방송실에 간 날부터 나는 점심시간에 이어폰을 끼지 않았다. 하지만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음에도 아직 내 신청곡은 나오지 않았다.
“여어, 최솔.”
장조림이 없는데도 김다윗은 여전히 나를 찾아와 말을 걸었다.
“우리 축구할 건데 같이 할래?”
“아, 미안. 난 뛰는 건 좀...”
“아... 그래?”
“야, 김다윗! 얼른 가자!”
“어, 가! 그럼 나중에 봐.”
“어.”
그새 물들었나. 나도 모르게 그가 하는 대로 손을 들어 인사를 해버렸다.
올렸던 손을 스르륵 내리고서, 나는 어느덧 막바지로 향하고 있는 방송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럼 오늘의 마지막 곡입니다. ‘씨스타’의 “나혼자”.”
‘아, 오늘도 아니네.’
점점 익숙해져 가는 실망 속에서 나는 이어폰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 사이 신나는 음악이 스피커에서 튀어나와 자극에 목마른 교실을 뒤흔들었다.
“추억이 이리 많을까. 넌 대체 뭐 할까. 아직 난 이래. 혹시 돌아올까 봐.
나 절대 이런 애 아닌데. 이런 적 없었는데. 사랑 너무도 독해 아직도 못 깼나 봐.”
“어, “나혼자”다!”
“웬일이야. 완전 좋아!”
화제의 신곡이 울려 퍼지자 신이 난 아이들은 중독성 있는 비트에 맞춰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너무도 달콤한 니 말에 속아 이제 와 혼자. Falling down. I’m falling down.
차라리 만나지 말걸 그랬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이토록 쉽게 우린 끝인가요.”
노래와 무아일체가 된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신기할 정도였다. 사랑 이야기에, 그것도 실연의 감정에 저토록 공감할 만한 나이는 아닌 거 같은데.
후렴구가 나올 즈음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고, 몇몇은 벌써 가사도 아는지 따라 부르고 있었다.
“또 나 혼자 밥을 먹고. 예! 나 혼자 영화를 보고. 오! 나 혼자 노래하고 이렇게 나 울고불고~”
‘... 아주 남 얘기 같진 않네.’
씁쓸히 웃으며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익숙한 멜로디로 주변 소음을 묻어버렸다.
노래 하나로 저토록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확실히 학교에서는 저런 가요가 더 적절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내 신청곡 같은 건 안 나왔으면 좋겠다 싶었다.
[정말 바보 같아. 너야 늘 그렇지.]
내면에서 들려오는 비웃음과 질책에 한 마디 변명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뫼비우스의 띠 위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IF의 행렬. 그 시작점이자 끝, 해답은 오직 하나기에.
투두둑. 오늘 아침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하루라도 더 잡아두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벚꽃을 빗방울이 때리고 있었다. 하늘색 우산으로 회색 하늘을 가리고서, 나는 땅에 점점이 떨어진 분홍 꽃잎을 애도하며 학교로 향했다.
학교 건물에 들어가기 전 우산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려고 우산을 한 바퀴 돌리는데, 하늘색 원 위로 웬 얼룩 하나가 보였다. 우산을 뒤집어 살펴보니 얼룩이 아니라 벚꽃잎이었다.
나는 최대한 조심하면서 그 연약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흔적을 집어 들었다.
딩딩딩 딩딩-
점심시간. 오늘도 쾌활한 인트로 음악이 학교에 울려 퍼졌다.
“안녕하세요? 오후의 음악 산책, 양세라입니다.”
이제 별 기대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선배가 제발 잊었으면 싶은데, 어째서인지 나는 오늘도 이어폰을 끼지 않았다. 그저 내 신청곡이 안 나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것뿐이라고 되뇌면서, 괜히 관심 없는 척 젓가락만 놀리고 있던 그때였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네요. 원래라면 살랑이는 꽃잎이 슬슬 눈처럼 내리기 시작할 때인데, 아쉽게도 비 때문에 꽃이 많이 져버렸어요.”
설마. 나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불편하다.
“벚꽃잎이 우수수 떨어질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저는 그 모습이 마치 눈이 내리는 거 같아요. 차갑지 않고 포근하고 보드라운, 보통 ‘눈’이라고 하면 우리가 으레 품게 되는 상상에 벚꽃 눈이 진짜 눈보다 더 가깝지 않을까요? 비록 지금은 비가 내리고 있지만, 우리 모두 그 환상에 같이 빠져들어 봐요. 첫 곡입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아침에 우산에서 떼어낸 꽃잎을 꺼내어 살살 어루만졌다. 손끝에 닿는 꽃잎의 보드라운 감촉과 부서질 듯 아름다운 피아노 음색은 너무 감미로웠다.
슬며시 닫히는 눈꺼풀의 장막 위로 벚꽃 눈이 내리는 환상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How can we deliver...”
나른한 5교시. 담임 선생님의 영어 수업 시간.
영어는 좋아하지 않지만 영어 교과서는 좋아한다.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는 빈 공간이 제법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필기를 하는 척하며 빈 공간에 대왕 고래 한 마리를 그렸다.
- 솔아, 이거 봐. 이건 대왕 고래라고, 세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야.
이젠 보지 않고도 한 번에 쓱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여러 번 그렸던, 그날 책에서 본 대왕 고래 그림.
일생의 거의 대부분을 혼자 보내는, 그렇게 큰데도 찾기 쉽지 않다는 그 신비로운 동물은 늘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나도, 이렇게나 큰 죄를 지은 나도 언젠가 너처럼...’
어느새 완성된 그림을 바라보며 나는 미소 지었다.
그런데 웬 꾸깃한 종이뭉치가 날아와 툭하고 책 위로 떨어졌다.
‘응?’
난데없는 불청객의 등장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이 날아온 궤적을 역으로 추적해 보니, 뚱한 얼굴을 한 옆자리의 그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종이뭉치를 가리키면서 손짓으로 그걸 열어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 뭐야?’
나는 그녀가 보낸 지시를 깡그리 무시한 채, 그녀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고민했다. 이대로 그냥 무시할까, 아니면 이걸 도로 던져줄까.
그때, 앞에서 들려오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면담시간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To keep the environment clean, we should...”
- 깨끗하네.
"... 하아."
나는 한숨을 쉬며 종이를 펼쳐보았다.
[딴짓하지 말고 집중해!]
‘뭐..?’
어이가 없었다. 그러는 자기는 왜 수업에 집중 안 하고 나를 봤데? 아니 그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옆을 돌아보며 이게 뭐냐고 표정으로 따졌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열이 받았다. 오지랖 떠는 것까진 그렇다 쳐도 저 웃음은 또 뭐야. 마치 날 한방 먹였다는 것처럼 만족스럽게.
‘저번에 내가 기분 나쁘게 한 것에 대한 복수다? 하, 맘대로 하라지.’
나는 더 이상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칠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도발에는 상종하지 않는 게 답이다. 괜히 자존심 때문에 얽혀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뿐. 한 번 시작했다간 저쪽과 똑같은 레벨로 떨어져 유치하고 지저분한, 지지부진한 싸움을 계속하게 될 뿐이다. 그냥 깔끔하게 무시하는 게 최고...
“......”
알고 있다.
‘최고의 정리는 애초에 어지럽히지 않는 것.’
이 세상에 남길 흔적은 가능한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홀연히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도록, 모두의 기억에서 회색빛으로 퇴색되거나 검게 눌려져야 한다.
그렇게 다짐하고 있는데, 갑자기 커진 선생님의 목소리가 귀에 꽂혀 들어왔다.
“자! 중요하니까 다들 딴짓하지 말고 잘 봐. 다소 길고 복잡해 보이지만 이렇게 부분으로 끊어서 보면 문장 구조가 단순해지지? 그래서 답이 1번이 되는 거야. 오케이?”
선생님 얼굴에 활짝 핀 확신의 미소는 아이들의 멍한 얼굴을 마주하면서 점점 시들어갔다.
“야, 이건... 이 정도는 못 하는 게 아니야, 안 하는 거지~!”
나는 가만히 칠판과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진솔하지 못하고 늘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이요.
- 너 일부러 안 하는 거지?
설명을 마치신 선생님은 계속 진도를 나가셨다.
“We must make changes before it is too late.”
꽉.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지금 읽고 계신 부분이 지문의 어디쯤인지를 확인했다. 마지막 단락의 첫 번째 문장이었다. 보아하니 이 단락에서는 새로 나올 문법적 설명은 없을 거 같고, 그렇다면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5분 남짓.
나는 책상 한 귀퉁이에 대충 밀어둔 아까 그 종이를 집어서 재빨리 뒷장에 휘갈겼다. 그리고 그걸 꽉 쥐어 뭉친 후, 뿌듯한 얼굴로 수업을 듣고 있는 그녀에게 던졌다. 뭐가 갑자기 날아와 깜짝 놀랐는지 그녀가 움찔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겁쟁이.’
다행히 그녀는 내가 던진 종이뭉치를 얼른 집어 펼쳤다. 눈을 휘둥그레 뜬 그녀가 당장이라도 쏘아붙일 기세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수업 시간이라는 자각은 있는지, 그녀는 다소 소심한 성량으로 으르렁거렸다.
“이게 무슨 뜻이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씩 웃었다.
“그렇게 해석하면 돼.”
이제 진도는 지문의 마지막 문장까지 해석 완료. 나는 웃음기를 싹 거두고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그녀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나 무시해?”
‘아, 걸렸다.’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고, 선생님이 들고 계시던 분필이 우리 쪽으로 날아왔다.
따악. 정확히 옆자리로 향한 분필은 시원한 소리를 내며 마지막 임무를 다하였다.
“아! 아야야...”
돌아보니 그녀가 머리를 감싸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이스 샷.’
“거기 너! 수업 중에 뭐 하는 거야? 왜 옆에 친구까지 방해해?”
“예..?”
비죽비죽 웃음이 삐져나오려는 걸 겨우 참고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 그녀와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경악에 찬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야, 너! 아니, 아닌데...”
억울해 죽겠다는 그녀의 반응에 선생님은 잠시 우릴 번갈아 보시더니, 별다른 말씀 없이 마저 수업을 진행하셨다.
나는 슬쩍 곁눈으로 그녀를 훔쳐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달구고서 입을 꼭 다물고 애꿎은 교과서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