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1)

by Outis

푸른 눈의 남자는 막 눈을 뜬 검은 눈의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여, 정신이 들어?”


아직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청년은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여 처음 보는 카라반 내부를 둘러보았다. 꿈인가 하고 그가 도로 눈을 감으려는데, 갑자기 칼로 찌르는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으윽!”


“왜 그래? 머리 아파?”


“......”


운 좋게 죽었거나, 아니면 운 나쁘게 살아서 병원에 실려왔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할 텐데. 웬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에게 영어로 말을 거는 지금 이 상황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치 뇌가 좁은 두개골 안에서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는 것 같은 생생한 통증은 현실의 것이 분명했다.

청년이 멍하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남자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 내 말 알아듣겠어? 어... 혹시 영어 할 줄 몰라? 그럼 한쿡, 한쿡 살람? 한쿡마르 하르 수 이쓰어?”


남자가 서투른 한국어에 손짓 발짓까지 섞어 열심히 대화를 시도했다. 그에 청년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어째서..?”


“허?”


“내가 왜 이런 데 있지?”


청년의 이 말은 절반은 상대에게 향한 질문이자, 절반은 자신의 기억과 합리적 추론에게 던진 지시였다.


크야, 내가 널를 쿠해드니카?”


그제야 청년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절벽 끝에 서 있는 자신에게 소리치던 그 사람. 무모하게도 자신을 따라 뛰어내린 그 사람이었다.

청년이 단정한 미간을 구기며 생명의 은인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왜?”


“오! 영어로 말했다.”


“왜 날 구했지?”


흠. 그거 어려운 질문이네.”


“모르는 사람인데. 하마터면 같이 빠져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싫다는 사람을 굳이 왜?”


“그러네. 왜일까? 네가 닮아서 아닐까.”


“닮아?”


“내가 아는 어떤 여자랑 닮아서.”


“... 뭐?!”


농담하는 것처럼 헤실거리는 미소. 그러나 남자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그 사람, 눈의 여왕을 찾기 위해 네가 필요해.”





<4년 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 나랑 같이 갈래?


그 바보 같은 제안에 응한 이유를.


“Here am I, a lifetime away from you(나는 여기, 당신으로부터 일평생 떨어진 곳에 있네).”


이젠 영영 닿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주제에, 그것만이 내게 허락된 영원이란 걸 잘 아는 주제에.


“The blood of Christ, or the beat of my heart(구세주의 피인가, 아니면 내 심장 고동인가).”


첫 숨을 들이 마신 죄, 고결한 보혈로도 갚지 못할 죄를 지은 주제에. 나는 염치도 없는 탕자가 되어 또 너를 탐닉하려는 걸까.


“My love wears forbidden colours(나의 사랑은 금단의 색을 입고).

My life believes(내 생명은 믿네).”


- 어때, 이젠 안 춥지?


- ... 응.


- 그거 알아? 눈의 여왕의 첫 번째 키스는 추위를 잊게 만든데.


- 첫 번째라... 그럼 그다음도 있어?


- 후훗, 두 번째 키스는... 가족과 친구들을 잊게 만들지.


- 정말이네. ... 그럼, 세 번째는?


- 응큼하긴.


지금의 난 구원을 바랄 수도 없는 더러운 몸이 되어버렸는데.


겹치고 또 겹친 우연이 처음부터 잘못 쌓은 둑을 한 번에 터뜨리면서 만든 진흙의 강. 똥물인지 흙탕물인지 구분이 안 가는 그것에 내가 빠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운명이었다.


- 야, 우리 다른 재미도 좀 볼까?


출구도 없이 빨갛게 그어지는 영원의 고리, 그 시작과 끝은...


하나였다.





<15년 전>


단순하든 복잡하든, 인간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실로 아주 간단한 법칙에 의해 일어난다.

모든 건 인간, 인간에 의한 것.

그리고 그 인간을 움직이는 건.


퍽.


“커헉.”


“아하하하하. 꼭 벌레 같아.”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겠지, 이 찐따 새끼.”


퍼억.


“쿨럭.”


“아, 짱나네. 이런 버러지 하나 줘 팬다고 뭐 나오는 것도 아닌데.”


“씨발! 그러고 보니 나 오늘 처음 신은 운동화잖아!”


성선설? 성악설? 웃기고 자빠졌네. 선이니 악이니, 애초에 그런 게 인간 행동의 동기가 될 리가 없잖아.

인간을 움직이는 건 그런 거창한 게 아니야.


퍽!


“크윽...”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일인가 아닌가.

선이니 악이니 그런 건 사후평가일 뿐, 결국 전부 다 ‘필요’에 의한 거다.


멀리서 실실 웃으며 구경하고 있던 한 녀석이 날 신나게 때리고 있는 둘을 말리는 척했다.


“야야, 적당히 해. 그러다 죽으면 골치 아파.”


“하핫, 걱정 마. 원래 벌레가 목숨은 질기잖아.”


그러게. 쓸데없이 고래 힘줄처럼 질기고 말이야.

목숨은 생각보다 훨씬 끈질겼다.


누구한테 맞은 기억이 거의 없다. 그래서 어디를 어떻게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지 못한다.


- 너만 없었어도.


그런데 죽으라니. 단숨에 진도를 올려도 너무 올렸다. 덧셈 뺄셈도 못하는데 대뜸 방정식을 풀라고 하는 것같이 부당한 요구다.


그래서였다. 내 목숨의 낯짝이 얼마나 두꺼운지 알아보고 싶어서.


‘이렇게 아픈데, 아직이야..?’


“어쭈, 이거 봐라? 배를 때리는데 웬 얼굴을 감싸고 자빠졌어.”


“야, 잠깐만.”


구경하던 놈이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와 내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윽.”


“그러고 보니까 이거 꽤 쓸만한데.”


놈이 있던 곳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 아이가 보였다.


‘저 바보... 도망이라도 좀 쳐보지.’


사실 이 모든 건 다 충동에 의한, 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쌓아 올린 결과였다.


그저 가능한 집에 늦게 들어가고 싶어서 방과 후 학교에 남아 어슬렁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운동장을 거닐다가 정말 무심코 학교 건물 뒤편에 갔는데, 하필 거기 있던 그들을 본 거였다.


“야, 얼른 내놔.”


평소에도 학교가 마치 제 안방인 양 껄렁껄렁 몰려다니는 그 세 명, 그리고 그들이 낄낄거리며 몰아세우고 있는, 우리보다 어려 보이는 남자애 하나.

딱 봐도 저기에 끼어드는 건 자살행위. 저 애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굳이 나설 의리도 없었고, 곤경에 처한 후배를 모른 척한다고 해서 찔릴 양심 따위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휘익. 미처 내 행동의 의미를 정리하기도 전에, 집어 든 돌멩이가 내 손을 떠나 세 놈 중 하나를 향해 날아갔다.


따악.


“아! 뭐야, 씨..!”


정확히 놈의 머리를 맞추고 땅에 떨어진 돌멩이는 내 무덤의 비석이 될 터였고,


“뭐야, 저 새낀?”


“너희들 그만둬.”


방금 그 말로 내가 그 무덤 안에 들어가는 것이 확정되었다.


무슨 약자를 구한다든지, 나쁜 놈들을 참교육 한다든지, 될 리도 없지만 그런 거창한 걸 바란 게 아니었다.


그럼 어째서였을까.

그래, 나는 그저 나의 필요에 충실했을 뿐이다.


다만 한 가지 판단 미스였던 건,


“야, 우리 다른 재미도 좀 볼까?”


... 뭐?’


내게 ‘그런 쓸모’가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던 것.


“아아, 이 미친놈 또 시작이네.”


“우린 그런 취미 없어.”


"너네는 그냥 잡고만 있어.”


‘싫어..!’


진작 놔버린 목숨은 수치심을 알지 못하고 그저 삶에 매달리고 있는데, 지금 내가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수치심이라니.

이 무슨 아이러니야.


“이거 놔!”


“어쭈, 이거 봐라. 아직 저항할 힘이 남아있나 보네?”


“짜샤, 꽉 잡아.”


위기에 몰려 눈이 돌아가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던가, 만화나 영화에서 그런 거 지겹게도 봐왔는데.


"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 고작 놈의 얼굴에 침을 뱉는 거라니.


“이런.. 이게 어디서!”


눈이 돌아간 놈이 내 배에 주먹을 날렸다.

아까 그 둘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파워. 명치를 제대로 맞았는지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히윽... 흐...”


이대로 있으면 분명 끔찍한 일이 일어날게 뻔한데, 숨겨진 힘은 고사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나질 않았다.

눈이 뜨겁고, 비 맞은 카메라 렌즈처럼 눈에 비치는 모든 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렇지. 얌전히 그대로 있어.”


그 안을 채운 건 악마. 신이니 천사니 믿지 않는 내 앞에 순수한 악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담벼락 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거기 급식들.”


가벼운 말투의 묵직한 목소리.

그는 우리 학교 바로 뒤에 있는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하. 어린것들이 어디서 나쁜 것만 보고 배워가지고는, 쯧쯧쯧.”


“넌 또 뭐야?”


“읏샤.”


그 형은 날렵하게 담에서 뛰어내리더니, 날파리를 쫓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야, 좋은 말로 할 때 곱게 가라.”


“이런, 미친!”


붙들려 있던 양팔이 풀리고, 나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하이에나 무리 속에 뛰어든 사자 한 마리와, 내게 달려온 그 조그만 아이의 울부짖음이었다.


“정신 차려! 저기, 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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