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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tis Dec 16. 2024

필요(2)

뚜벅뚜벅. 하얀 셔츠와 회색 세미 정장 바지를 입은 한 중년 남자가 간호사 스테이션을 향해 걸어갔다. 주인의 가는 다리 탓에 품이 넉넉한 바지가 서로 스치면서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이쪽 복도로 가셔서 두 번째 병실 창가 자리예요. 61 병동입니다.”


얼마 전 입원한 환자를 찾는 남자에게 간호사는 재빨리 대답한 후, 기다려줄 생각 따윈 없다는 듯이 시끄럽게 울어대는 전화를 받았다. 정지한 심장의 심전도같이 평평한 목소리가 마치 컨베이어 벨트처럼 이어졌다.

남자는 간호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6인실 하나를 지나고 몇 걸음을 더 걷자 또 다른 6인실이 나왔다. 남자는 문에 달린 유리를 통해 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창가 자리는 둘. 한쪽에는 곤히 잠든 노인이 있었다. 찾는 사람이 아닌 듯 남자는 바로 맞은편 침대로 눈을 돌렸다. 그런 다음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서 곧장 그곳으로 걸어갔다.  


“어머, 선생님.”


보호자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그를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어머님. 좀 어떠니?”


남자는 여자에게 인사를 한 뒤, 곧바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소년에게 안부를 물었다. 손님이 찾아와 말을 거는데도 소년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대신 여자가 대답했다.  


“수술은 잘 됐대요. 그보다 어떻게 됐나요? 찾았습니까?”


재촉하는 그녀에게 남자는 난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눈은 껄끄러운 상대를 피해 소년을 향했다. 현재 상황과 추후 방향, 그리고 어쩌면 과거 진상까지. 모든 것은 이 아이에게 달려 있었다. 앞으로 자신을 포함한 이해 관계자들이 얼마나 오래 이 일에 얽매어 있어야 하는지도.

남자는 담임인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묵묵히 침대 시트만 내려다보고 있는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죽은 생선 눈깔 같은 소년의 표정은 입고 있는 환자복과 머리와 손에 감겨 있는 붕대, 병원 특유의 냄새와 잘 어울렸다.


“그 건에 관해서 너와 얘길 좀 했으면 싶은데.”


줄곧 무반응이던 소년이 남자의 그 한 마디에 드디어 움직였다. 소년은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생명력이라곤 하나 없는 얼굴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마네킹 목을 억지로 비틀어서 얼굴만 돌린 것처럼 기괴한 장면이었다.

자신이 알던 학생과 눈앞에 있는 아이, 남자는 불편한 위화감을 녹여내기 위해 그럴싸한 이유들을 떠올렸다. 소년이 입은 부상과 또 다른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나선 학생의 증언, 그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이번 사태의 심각성. 남자는 이맛살을 구기며 생각했다. 그런 일을 당했으니 정신적 충격이 컸겠지. 아마 프라이버시도 필요할 거다.  


“어머님, 잠시 자리를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남자의 요구에 여자는 못마땅한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래도 담임선생만은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애 입막음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머릿속에 온갖 부정적인 전망과 의심이 차곡차곡 쌓여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불안정한 화산을 이루었다. 그 안에는 애초에 애가 이렇게 된 것도 학교가 그런 위험한 애들을 방치한 탓이라는 원망이 마그마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남자는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는 여자의 따가운 눈초리를 애써 모른 척하며, 일단 어떻게든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주절주절 입을 놀렸다.  


“걱정 마세요. 저희도 이번 일을 간과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염려하고 계시는 부분은 저희도 잘 알고 있고요. 그래서 더더욱...”


변명 같은 남자의 말이 길어질수록 여자의 표정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그녀가 예의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한 마디 쏘아붙이려는 찰나, 두 어른의 신경전을 지켜보고 있던 소년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엄마, 괜찮아요.”


두 사람은 소년을 돌아보았다. 고운 표정만큼이나 고운 말씨. 지금의 소년은 평소처럼 바람직했다. 역시 아까는 아파서 그랬구나 하고 넘겨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선생님이랑 얘기 잘할게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이렇듯 협조적으로 돌아선 소년의 태도가 자신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그 모습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망가진 인형 같던 표정이 어떻게 이렇게 바로 바뀔 수 있단 말인가. ‘괴물’이라는 한 단어가 그의 마음속에 저절로 떠올랐다.

한편, 여자의 마음 저 밑바닥에선 비밀스러운 반가움이 일렁였다. 애가 이 정도로 심하게 다쳐온 것도 처음이었고, 살면서 학교 폭력 같은 일에 엮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애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혹 남편이 속으로 자신을 탓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그간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밤샘 간호, 눈치, 끝이 안 보이는 진상규명과 무책임한 학교 및 무심한 학폭위와의 신경전. 솔직히 그녀에겐 모든 것이 너무 버거웠다. 그래서 방금 아들이 한 말은, 특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이란 말은 약간의 도피가 절실했던 그녀에게 오아시스와도 같은 여지를 주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원래부터 손이 안 가는 아이였고 혼자서도 알아서 잘해 왔으니까. 게다가 선생님도 애랑 둘이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하니까. 어쩌면 모든 게 알아서 잘 풀릴지도 모른다고.

여자는 못 이기는 척 자리를 떴다. 그래도 부모로서 걱정을 다 내려놓지는 못했는지, 그녀는 병실을 나가면서 몇 번 아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복도에 다다른 그녀는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며 병실 문을 살며시 닫았다. 문 유리에 그녀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모습이 얼핏 스쳤다.

여자가 나간 뒤 남자는 밖에서 볼 수 없도록 커튼을 둘러쳤다. 그리고 아직 움푹 패어있는 보호자용 의자에 앉았다.  


“주스라도 좀 드릴까요?”


입가에만 미소를 남기고 나머지는 다시 텅 비운 소년이 물었다.   


“... 아니, 됐다.”


담임으로서 반년 넘게 봐왔건만, 남자는 마치 소년과 오늘 처음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래는 “많이 아프겠다. 수술 잘 됐다던데 이제 뭘 좀 먹을 순 있니?” 같은 담소로 얘기를 시작할 참이었는데, 그는 그냥 바로 용건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아버님께 들었다. 내장 파열과 갈비뼈 골절, 그 외 머리와 팔의 타박상과 찰과상, 아무래도 네가 폭행을 당한 거 같다고 말이야. 의사도 외부충격, 정확히는 구타에 의한 부상이라고 진단 내렸고.”


비누거품이 물에 씻겨 내려가듯, 그나마 소년의 입가에 남아 있던 미소가 서서히 지워졌다.  


“하지만 누구한테 맞았는지 아무리 물어도 네가 통 대답을 안 한다고 하시더구나. 아버님께선 네가 학교와 집만 오가는 아이니 분명 학교에서 폭행당했을 거라고 짐작하고 계시던데.”


아직 물도 입에 대지 못해서 바짝 마른 소년의 양 입술이 더욱 단단히 달라붙었다. 이대로는 오늘 찾아온 목적의 달성이 점점 소원해질 것 같아서, 남자는 다소 직선적이었던 말의 방향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네 담임이 된 건 올해 처음이지만 훨씬 전부터 다른 선생님들한테 네 얘기를 들어왔어. 학업 성적도 우수하고 교우관계도 문제없는 훌륭한 학생이라고. 과연 그 형에 그 동생이라고."


그는 잠시 말을 쉬었다. 칭찬을 듣고도 소년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부터 뭔가 달라진 거 같아. 표정도 어두워지고, 주로 혼자 있고. 그런 와중에 아니나 다를까, 이런 일이 터졌구나. 혹시 너... 따돌림당하고 있니?”


‘아니나 다를까’라는 말에 소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고, ‘따돌림’이라는 말에 굳게 닫혀 있던 소년의 입이 벌어졌다. 그것을 긍정의 표현이라 여긴 남자는 천천히 릴을 감는 낚시꾼처럼 조바심을 억누르며 소년이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아이의 손 위에 부드럽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런 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다. 너 혼자서 끙끙 앓을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를 돕고 싶어 하고 또 도울 수 있는 어른들이 아주 많아. 네가 손만 내밀어 준다면 말이지.”


순간 소년의 한쪽 입꼬리가 쓱 올라간 걸 남자는 눈치채지 못했다. 소년은 얼른 조소의 흔적을 지우고 고개를 숙였다. 아이가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고 오해한 남자는 더욱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학교 폭력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우선은 이 일을 먼저 해결하자꾸나. 함께.”


그는 ‘함께’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러고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두 번 접힌 A4 종이를 꺼내어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는 셔츠 앞주머니에 꽂힌 펜을 잡았다.  


“너를 이렇게 만든 녀석이 누구야?”


참을성 있게 기다려 보았지만 소년은 조개처럼 고집스레 입을 다문 채 침대 시트만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자그맣게 한숨을 쉬며 접혀있는 종이를 펼쳐 보였다.  


“이거 너 맞지?”


남자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고 소년은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진통제에 눌려있던 통증이 다시 살아나 그의 갈비뼈와 배를 휘감았다.

종이에는 어떤 사진 한 장이 인쇄되어 있었고, 그 사진 안에 담긴 건 그날의 소년 자신과 그 세 명이었다. 소년과 소년의 양팔을 붙들고 있는 두 명은 얼굴까지 또렷이 찍혀 있었지만, 나머지 한 명은 뒷모습만 보였다. 금방이라도 놈이 고개를 돌려 징그러운 미소를 지을 것만 같아 소년은 속이 뒤틀렸다.  


“이 사진은 네가 병원으로 실려간 날 찍힌 거야. 구도만 봐도 알겠다만... 네 입으로 직접 들려다오. 이 애들이 너를 괴롭힌 거니?”


구역질을 겨우 참고 있던 소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걸 어디서 구하셨죠?”


“제보자가 있었어. 그때 거기에 함께 있었다고 하더구나.”


“제보자?”


소년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기와 저 세 명 말고 그 자리에 있었던 건 두 사람. 그중 한 명은 제보자라기 보단 피해자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할 테고, 그럼 남은 건 그 중학생 형이었다. 각도로 봐서 저 사진도 그 형이 찍은 게 분명했다.  


“... 그게 누구죠? 우리 학교 학생인가요?”


그러나 소년은 일부러 그의 존재를 모른 척했다.  


- 미안한데 나는 여기 없었던 걸로 해주라. 초딩들 때린 거 들키면 좀 곤란해져서.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며 갔는데 그가 나섰을 리가 없었다.  


“그래. 맞아.”


“......”


이 학교 학생. 그렇다면 그날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그 아이일 게 뻔했다. 아마도 증거 자료로 쓰기 위해 그 형한테서 사진을 받아둔 거겠지. 이제 자신은 한 발 물러서서 그 애에게 맡겨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과 갑자기 몰려오는 피로감에 소년은 눈을 감았다.  


“그럼 굳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시겠네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게 말이지... 좀 복잡하구나.”


이렇게나 단순하고 명백한데 어른들은 대체 뭐가 복잡하단 건지, 소년은 눈을 뜨고 채근하듯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제보자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데다가, 죄다 자기가 피해자라고 호소하는 중이라.”


“예?”


“여기, 너 말고 이 세 명도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했거든. 그 애들 말로는 자기들도 너도 그 제보자가 사주한 인물한테 맞은 거라고 하던데.”


“뭐라고요?”


허옇게 튼 입술 새로 드러난 꽉 다문 이빨, 시트를 움켜쥔 두 손. 줄곧 침착하던 소년이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걔네들의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그리 믿음은 안 가는데, 그래도 일단 다친 건 사실이니까. 가벼운 타박상이지만.”


“하..! 읏...”


소년은 너무 어이가 없어 그만 헛웃음을 다가 찌르르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배를 움켜잡았다.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너의 진술이 필요하단다. 나도 그렇지만 학폭위 측에서도 걔네들보단 너의 말을 더 믿을 거야.”


“... 그 아이는요?”


“응?”


“말씀하신 그 제보자, 제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다면 그 애가 최초의 피해자인데요. 그리고 이렇게 번듯한 증거도 있는데, 왜 그 애 말은 안 들으시죠?”


“흐음...”


남자는 숨을 길게 내쉬면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는 자신을 추궁하는 소년의 눈을 피해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몸에 새겨진 증거가 더 중하다는 거겠지. 지금 학폭위에서 주목하고 있는 잠정적 피해자는 너를 포함해서 총 네 명이야.”


소년은 눈을 크게 떴다. 이 말도 안 되게 돌아가는 일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애쓰던 그의 눈은 끝내 원하지 않는 답에 맞닥뜨렸다.  


그리고 네가 말한 그 아이, 현재까지는 걔가 이 사건의 유일한 가해자란다... 어때? 이제 얘기할 마음이 좀 생겼니?”


창밖에서는 썩은 장처럼 시커멓게 뒤틀린 구름이 낮게 울며 비를 쏟아 내었다. 후드득 빗방울이 창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저 빗줄기가 훨씬 순수하고 올곧구나 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정말이지 세상은, 인간이 얽힌 일은 복잡하고 싫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게 자신의 세치 혀에 달렸다는 것이었다.

그는 숨을 참고 사진을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돌을 던질 필요가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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