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이 셋 중에 주동자는 누구니?”
나는 손가락으로 사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날 돌을 던진 것도, 지금 이 자식을 지목한 것도, 다 ‘필요’한 일이야.’
“그렇구나.”
‘이것 봐. 선생님도 웃고 계시잖아. 내 ‘판단’은 옳았던 거야.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발발한 전쟁에 징병되어 처음으로 사람 머리를 겨누고 있는 소년병의 총구처럼, 내 손가락은 녀석의 뒤통수를 똑바로 가리키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는 선생님이 눈치채시기 전에 얼른 손을 거두어 다른 손으로 잡아 눌렀다.
[왜 떨고 있어? 방금 네가 한 짓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거야?]
‘죄책감?’
[어른들의 더러운 사정에 동조해서 거짓말을 했잖아. 저 녀석은 나머지 둘이 받을 벌까지 받게 될 거야. ‘너’ 때문에.]
‘그게 어때서. 셋 다 처벌할 수 없다면, 하나 밖에 제거할 수 없다면, 그럼 당연히 제일 악질인 걸 고르는 게 맞잖아.’
[그게 하필 왜 저 녀석일까? 판단이니 뭐니 그럴싸한 말로 둘러대봤자 결국 넌 네 감정과 욕망에 충실한 것뿐이야. 두려움을 피하고 싶은 거지.]
거미가 본능적으로 줄을 뽑아내듯이, ‘두려움’이란 세 글자에 원치 않는 기억이 얽혀 새로운 연결망을 만들었다. 그 이죽거리던 입매와 기분 나쁜 눈빛, 비릿한 피 냄새가 단단한 매듭이 되어 가슴을 옥죄었다.
“흐읍...”
나는 아직도 떨고 있는 손을 힘껏 주먹 쥐었다. 손 안에서 구겨진 침대 시트의 깔깔한 표면이 느껴졌다. 최소한의 책임만 다 하겠다고 선을 긋는, 그 어떤 안정감도 주지 않는 사무적이고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내가 아는 모든 어른들이 그러하듯이.
상관없다. 기댈 곳 따위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죄스러울 만큼.
- 너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애초에 모든 건 내 잘못이니까. 무결한 0 아니면 완전한 무한대, 내일이 없거나 어제를 후회할 일이 없거나, 둘 중 하나여야 했는데. 이런 어중간하고 꼴사나운 중간 따위 바라지 않았다.
- 왜 이런 일이 생겨가지고...
싫다. 빨리 없던 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러기 위해서라면.
‘저런 녀석 따위 얼마든지 벼랑 끝으로 몰아주겠어.’
한창 생각의 날을 세우고 있는데, 선생님의 앙상한 손이 내 어깨 위에 가볍게 앉았다. 선생님은 만면에 거품 같은 미소를 머금고 계셨다.
“걱정 마. 이 녀석만큼은 반드시 처벌하마.”
나는 물끄러미 그 미소를 바라보며 물었다.
“... 약속해 주시겠어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시는 선생님에게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덧붙였다.
“그 애, 그 제보자도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4년 후>
수업이 끝나자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이제 어쩔 거야?”
당돌한 목소리.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뭘?”
“뭐긴 뭐야. 영어 회화 과제지.”
“어쩌긴 어째. 그냥 하면 되지.”
솔직히 말하면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어차피 그런 평가 시스템인데 뭘. 처음이라 비교 대상도 없으니 심하게 버벅거리지 않을 정도로만 준비하면 될 거다.
“그냥 하는 게 뭐, 어떻게 하는 건데?”
그러나 그녀는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따지듯 물고 늘어지는 그녀가 귀찮아서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야. 각자 하고 싶은 말 알아서 하자고.”
“정말 재수 없어.”
“뭐?”
그녀는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름 같이 잘해보자는데, 이렇게까지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이유가 뭐야? 너 왜 자꾸 나한테 툴툴거려? 처음부터 그랬잖아. 대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네가 얼마나 잘났길래 이렇게 사람을 무시하는 건데?”
‘그야... 그러네. 왜지?’
막상 받아치려니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녀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숙제 한 번 안 해온 걸로 여태껏 무시한 것도 객관적으로 보면 매우 성급하고 고집스러운 편견이라 할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이렇게까지 누구를 신경 썼던 적이... 있었나?’
“왜 그렇게 봐? 할 말 있음 해.”
“어?”
생각에 잠겨 있느라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몰랐다. 당황해서 얼른 눈을 아래로 내렸는데, 하필이면 거기에 그녀의 다리가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아예 고개를 푹 숙여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위에서 위풍당당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난 창피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제대로 하고 싶어. 그런데 네가 대충 아무 말이나 해버리면 나까지 덩달아 말려버리게 되잖아. 그러니까 너도 제대로 준비해.”
‘... 잠깐만. 뭐지, 이거?’
왠지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것 같은 느낌. 내가 머리를 숙여서 뭔가 오해하고 있나 싶어,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대충 하자고 한 적은 없는데. 각자 생각을 정리하는 게 먼저라고. 말을 맞춰 보는 건 그다음이고.”
물론 아까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나는 그럴듯한 말로 술술 둘러대었다. 딱히 그쪽의 이해를 바란 건 아니었는데, 어쩐지 내 말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점점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럼... 협력하는 거야?”
“어?”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잖아. 둘이 협력해서 미리 각본을 짜도 되고, 각자 내용을 비밀로 준비해 와도 된다고.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다고.”
“아, 그거... 비밀로 하면 상대의 허를 찌를 수는 있겠지만 동시에 나도 똑같은 리스크를 짊어지게 되니까, 나도 그건 좀 별로인데.”
“그래? 그럼 우리 비밀 없기로 하는 거다?”
“어?”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난데없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나는 얼결에 내 손가락을 거기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을 휘감았다.
“약속.”
곧이어 그녀의 엄지가 내 엄지와 맞닿았고,
“도장.”
떨어진 손이 다시 스치며 만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사.”
이런 초등학생들이나 할 짓을. 부끄러워진 나는 재빨리 손을 거두어 책상 밑으로 감추며 투덜댔다.
“뭐야, 이거. 유치하게...”
“계약. 원래 유치하고 단순한 게 제일 무서운 법이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건 신뢰, 그치?”
기고만장해진 그녀는 바로 으름장을 놓았다.
“배신 때리기 없기다?”
하나도 안 무서운 으름장을.
‘그나저나 이대로 가면 결과는 내가 질 게 뻔한데. 마지막에 몰래 내용을 바꿔서 골탕 먹일까?’
나는 아까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정도 일로도 그랬는데, 반 모두의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내 이름은 아랑이야. 최아랑.”
그녀가 갑자기 명찰을 가리키며 자기소개를 했다. 처음 만난 것도 아니고,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샛노란 명찰에 검은 글씨라 쓸데없이 잘 보이는데.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 잘해보자?”
“......”
방금 생각한 그건 역시 관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딩동댕동- 종이 울리자마자 늘 정시에 도착하시는 수학 선생님이 반쯤 닫힌 교실 앞문을 활짝 열어젖히시며 들어오셨다. 아이들은 상어의 출몰에 안전한 곳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는 물고기처럼 부산스럽지만 정확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있다가 쉬는 시간에 또 얘기해.”
‘뭐가 ‘또 얘기해’냐.’
6교시가 끝나고 찾아온 오늘의 마지막 쉬는 시간, 그녀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아낌없는 위로를 받고 있었다.
“으잉~ 아랑이 어떡해~”
“하필이면 첫 번째로 걸려서. 엄청 부담되겠다.”
“헤헤, 아냐. 어차피 언젠가는 걸릴 거니까. 그럴 바엔 아예 처음에 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하긴, 처음이라 많이 봐주실지도? 비교할 앞사람도 없고.”
“뭐야, 그럼 나도 처음에 걸릴걸. 부럽다아~”
‘... 뭐지, 이거?’
아까는 큰일 났다고 난리 피우더니 이젠 부럽다고 야단. 여자애들은 원래 이런가.
“하지만 그 상대가...”
“응 응.”
그녀의 친구들이 나를 돌아보는지 옆이 따가웠다. 그들은 레이저 같은 시선으로 한참 날 구워대더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우리 아랑이 어떡해~ 운도 없어라.”
“토닥토닥, 힘내.”
나는 눈을 감고 애써 무시했다.
‘뭐가 안 됐다는 거야. 불리한 건 나라고.’
총 인원 30명 중 17명이 여학생. 단순히 성비만 봐도 저쪽이 과반수의 표를 받을 확률이 높은 데다가, 남은 12명의 남학생들 가운데서도 이탈표가 생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혈기왕성한 17세 남자애들이 같은 성별이라는 이유로 나 같은 칙칙한 놈한테 투표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친구도 없고, 게다가...
‘쟤는... 예쁘잖아.’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내 귀에 흘러들었다.
“왜? 쟤가 어때서?”
그 말은 메아리가 되어 내 귀를 간질였다. 서늘한 무언가가 귀 밑 목을 타고 내려가 등줄기를 훑는 느낌이 들어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그녀의 친구 한 명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떠냐니? 아랑이 너, 전에 쟤더러...”
“아냐. 아냐, 아냐. 아니야.”
몰래 훔쳐본 시야의 끝자락에 얼굴을 붉히며 연신 손을 흔들어대는 그녀와 그 친구들의 떨떠름한 표정이 걸렸다. 그들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마침내 종이 쳤다.
“아, 종 쳤다. 얘들아, 어서 가봐.”
그녀의 친구들이 자리를 떠나며 한 번씩 나를 쳐다보고 갔다.
“......”
이 느낌, 닮았다.
- 들었어? 쟤 말야...
- 어머, 웬일이야! 그래서 그동안 학교 안 나온 거야?
- 쟤 때린 애 이번에 퇴학당했다며?
등뒤에 숨어서 나를 즐기던 시선들. 껍질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어 연약한 속살을 끊임없이 음미하고 싶어 하던 욕구들.
- 쟤 걔한테 당했대.
- 당하다니?
-그거 있잖아. 그거.
- 어? 남자애인데?
금세 담백한 사실에 질리면 감칠맛 나는 거짓을 뿌리고,
- 내가 듣기로는 셋한테 당했다던데?
- 대~박~
조미료에 중독되어 원재료가 어땠는지는 잊어버리는, 무책임하고 무절제한 군상들.
그저 이야깃거리라는 걸, 그 쉽고 가벼운 이야기 속에 나라는 인격은 실재하고 있지 않다는 걸, 그리고 얼마 뒤면 잊힐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난 나라는 실체를 그 안에 놓고 혼자 괴로워했던 걸까.
줄곧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었다. 돌을 집어던진 것?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던 것? 아니면...
‘내가 나인 것.’
“자 그럼, 모두 좋은 주말 보내.”
종례가 끝나고, 이번 주 일정도 끝이 났다. 금요일 저녁과 주말에 대한 설렘에 마음이 바쁜 아이들이 일어나자 책상과 의자에 긁힌 바닥이 여기저기서 끼익 하고 비명을 질렀다.
나도 막 일어서서 가려는데, 그녀가 날 불러 세웠다.
“저기, 우리 잠깐 남아서 하고 갈까?”
“뭘?”
“뭐긴. 영어 회화 과제.”
“... 왜?”
“왜냐니?”
“굳이 뭐 하러? 각자 할 말부터 생각해야지.”
“그야 그렇지만...”
“할 일도 없으면서 붙어 있는 것만큼,”
용무도 없으면서 우르르 더러운 화장실에 몰려가는 거, 하수구 찌꺼기처럼 복도에 모여 있는 거, 그러면서 있는 얘기 없는 얘기 옮기는 거.
“멍청한 것도 없어.”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 갔다. 생기 넘치던 두 눈은 차갑게 식어갔고, 원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던 입은 점점 일자로 반듯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빈 도화지같이 변한 그녀의 얼굴에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려 넣은 듯한 고운 갈색 눈썹이 힘겨루기를 하며 미간을 구겨놓았고, 일자로 닫혔던 입이 열렸다.
“그럼 주말은?”
“주말 뭐?”
“주말 내내 그렇게 보내자고? 다음 주 수요일이 발표잖아. 영어로 고치고 연습까지 하려면 이틀은 너무 부족하지 않아?”
“난 그렇게 하자고 한 적 없는데?”
딱히 의도한 건 아닌데 그만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나와버렸다. 그녀가 질세라 콧방귀를 뀌었다.
“하, 그럼?”
“각자 정리하고 메일로 교환하면 되잖아.”
“아~ 그거 합쳐서 정리하는 건 누가 할 건데?”
“내가 할게.”
“내가 마음에 안 들면?”
나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지금껏 조별 과제의 마무리 작업은 늘 내가 해왔었다. 말이 마무리지, 다른 조원들이 너무 대충 해와서 내가 거진 다 한 거나 다름없다. 내 손에서 거듭난 결과물을 보고 다들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한 사람은 여태까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뭐, 마음에 안 들면? 나는 코웃음을 치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럼 네가 하던가.”
“내가 하면, 넌 군말 없이 그대로 할 거야?”
“... 그건, 일단 봐야지.”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이것 봐. 시작하기 전부터 이렇게 안 맞는데, 각자 알아서 하자고? 분명 메일만 주고받다가 시간만 다 날릴걸? 그럴 바엔 만나서 한 번에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게 낫지 않아?”
“......”
내가 얼굴만 찌푸리고 대답을 안 하자 그녀가 입을 떡 벌렸다.
“뭐야, 나 보는 게 그렇게 싫어?”
“... 너야말로.”
“뭐?”
“싫어하잖아? 나 같은 녀석.”
“어..?”
“가능한 안 부딪히는 게 피차 서로에게 좋은 거 아냐?”
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휭 교실을 나가버렸다.
“야, 야! 나 아직 말 안 끝났어!”
그녀의 당황한 목소리가 뒤에서 날 붙잡으러 다급히 뛰어왔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야, 야아!”
하이 피치 톤의 고함소리가 1층까지 내리 꽂히고, 주변에 있는 아이들이 어리둥절해하며 위를 쳐다보았다. 나는 모른 척 재빨리 학교 건물을 빠져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갔다. 평소보다 빠르게 교문을 통과하고,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지하도 앞에 다다른 후에야 나는 비로소 걸음을 늦추었다.
살짝 가빠진 숨을 고르며 나는 지하도 계단을 내려갔다. 여기까지 왔으니 됐다. 그녀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가니까. 심장 박동이 빨라져서 그런가, 이렇듯 마음은 여유로운데 가슴 한 구석이 꽉 막힌 느낌이었다. 아니, 뻥 뚫렸다는 게 더 맞을까. 모르겠다.
타다다다다닥. 누군가 뒤에서 다급히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답답한 지하도 벽을 때렸다. 이제 바로 내 뒤인데, 이러다가 부딪히겠는데 싶어 뒤를 돌아본 그때였다.
빠악!
“윽..!”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가 까매졌다. 그 와중에도 이렇게 넘어지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나는 다급히 난간을 붙잡았다. 다행히 계단에서 구르는 건 피할 수 있었다.
“아... 뭐야..!”
나는 얼얼한 머리를 감싸고서 위를 쳐다보았다. 그녀, 아랑이었다.
엄청 뛰어왔는지 땀에 젖은 머리카락으로 엉망인 얼굴을 하고서 그녀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어쩌라고 그렇게 가 버리는데? 난 네 메일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 아참, 안 알려주고 그냥 왔구나.’
살짝 멋쩍어진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양손에 꼭 잡혀 있는 샛노란 가방이 보였다. 아마 난 저거에 맞은 모양이다.
“얘기하다 말고 그렇게 혼자 가버리는 경우가 어딨어! 얼마나 기분 나쁜지 알아? 너 혼자 결론지으면, 그럼 그걸로 끝인 거야? 상대방 생각은 듣지도 않고? 너 원래 그래?”
그녀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려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 포탄을 멍하니 맞고 있던 나는 별 뜻 없이 눈으로 그 움직임을 좇았다. 분홍색 손가락을 보자 뜬금없이 '혈액순환이 잘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맥락도 뭣도 없는, 꼭 지금 상황 같았다.
“어디 또 한 번 혼자 막 가버리고 그래봐? 그땐 한 대로 끝나지 않을 거니까.”
아, 나 또 맞는 건가.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복수할 거야!”
“......”
방금 그건 정말, 너무 불필요하고 부당한 소리여서, 나도 모르게 그만 헛웃음이 났다.
“하, 하하...”
“야, 너... 왜 웃고 그래?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줄곧 당당하던 아랑은 내가 갑자기 실실 웃자 살짝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아까 너무 세게 때렸나?' 하고 걱정하는 눈치였다. 혼자서 옴팡 뒤집어쓰고 분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얼굴, 그리고 지금 이 얼굴.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미안해.”
“어?”
“다시는 안 그럴게.”
“야 너, 역시 머리가...”
“약속해.”
아무리 그래도 방금 그 말은, 정말 불필요했다.
역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