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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경미 Apr 11. 2022

시아버지 예찬론 (전편)

며느리 덕에 세상에서 젤 행복한 사람이 되다

“며늘아, 내가 젤 행복한 사람이란다.”

“누가요? 왜요?”

퇴근 후 막 집에 도착한 나를 보자마자 아버님은 식사하던 숟가락을 잠깐 내려놓으시고 환하게 웃으셨다. 아버님의 얼굴 주름이 하회탈 같다.


15년 전 처음 뵈었을 때 아버님의 첫인상은 거친 외모에 위엄 넘치는 상남자였다. 웬만한 외부의 충격에도 까닥하지 않을 것 같은 듬직한 체구, 태양의 열기가 고스란히 반영된 구릿빛 피부와 특유의 짧고 무뚝뚝한 말투가 꽤 까다로울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공연히 겁을 먹었었나 보다 생각한 건 바짝 긴장해 있는 나에게 성난 주름 속에 숨겨진 미소를 어렵지 않게 꺼내놓으셨을 때다. 지금처럼 말이다.

매일 저녁 “다녀왔습니다.” 인사하고 항공모함 같은 290 사이즈의 아버님 신발 옆에 내 구두를 벗어 놓고 보면 동화 <잭과 콩나무>의 주인공 잭이 마법 콩나무를 타고 하늘나라에 있는 거인의 집에 도착한 느낌이다.

‘인상이 좋다’라는 말은 아쉽게도 아버님에게 다소 거리가 있는 말이지만, 깜짝 놀랄만한 아버님의 특급 반전 매력은 셀 수 없이 많아서 이 한 편에 다 담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다. 물론 평생 같이 살아온 어머님과 다 큰 자녀들이 보기에 탐탁지 않은 아버님의 기묘한 행동 패턴이 여럿 있긴 하다. 예를 들면 며느리 앞임을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시원하게 뀌는, 100데시벨은 족히 넘길 것 같은 방귀 테러는 애교로 치더라도 절정에 치닫는 축구 중계나 월화드라마의 막장 줄거리에 과하게 몰입한 나머지, TV 속 그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허공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치실 때는 아주 난감하다. 도대체 누구랑 얘기하는 거냐며 아버님을 자제시키다가 포기하고, 어머님은 주방에서, 남편은 위층 거실에서 뿔뿔이 흩어져 TV를 보기 일쑤다. 운전하실 때 마음에 들지 않는 운전자는 여자일 거라는 편견이 있으신데, 뱃속 아기의 성별을 초음파로 여기저기 둘러가며 찾아내는 산부인과 의사처럼, 운전하는 내내 앞차 운전자의 성별을 찾아내기 위해 요리조리 살펴보려 안간힘을 쓰시는 모습은 운전대를 놓기 전까지 즐기는 게임 같은 건가 생각이 들 정도다. 그 불신은 꽤 자주 어긋나지만 가끔 아버님의 신념대로 여성 운전자를 찾아내면 “거봐. 여자잖아! 저렇게 운전하면서 일 차선으로 가면 안 되지!”라며 꽥 소리를 지르면서도 자신이 맞았다는 생각에 뿌듯한 생각이 드시는지 본인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계신다. 구두쇠 스크루지도 울고 갈 우리 아버님이, 새집을 사면서 어머님이 야심 차게 들여놓은 비싼 장롱을 가당치도 않다며 몰래 반품시켰다가 어머님을 온종일 눈물짓게 한 전설적인 일화는 외식할 때마다 항상 등판하는 소재 거리이다. 그런 분이 동묘시장 좌판에서 엉뚱하게도 부를 과시할 때면 어머님이 풍기는 불길한 기운에 자리를 슬쩍 피하신다.


어머님은 내가 직설적인 아버님에게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지만 나는 전혀 달랐다.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이 거칠긴 하셔도 아버님의 언어 속에는 어떤 의도가 들어가 있지 않아서 뉘앙스를 해석하느라 시간을 버릴 필요가 없었다. 다소 거친 감정이입도 공감능력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답답한 운전자에게 혼잣말로 불평하시긴 해도 그 사람을 향해 클랙슨 울리는 걸 본 적이 없다. 노화된 세포들이 죽기 살기로 서로 확고히 부둥켜안고 있기에 더 단단해진 70대 노인의 굳은 신념은, 내가 봤을 때도 때로는 옳고 때로는 그를 때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요즘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의 신념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아버님의 고집을 굳이 꺾으려 하지 않고 옆에서 장단을 맞춰드린다.

전생에 어떤 사연이 있었길래 현세에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연으로 사는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아버님의 좋은 점만 눈에 담겼다. 아버님이 손주를 사랑하는 방법도 그중 하나였다. 응애, 하고 손주가 태어날 때마다 어머님만큼 아버님도 바쁘셨다. 예상 밖일 수 있겠지만 아기의 이유식 주도권이 항상 아버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이유식만큼은 어머님도 며느리에게도 맡기지 않고 본인이 직접 만드셔야 직성이 풀리셨다. 질 좋은 고기와 신선한 각종 채소를 기어코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시장에서 사 오셔야 안심을 하셨다. 한껏 치켜 올라간 눈썹을 한 채 본인만의 엄격한 배합 원칙에 집중하면서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 이유식 전문 셰프를 초빙한 것 같았다. 마침내 완성된 맛, 영양소, 손주에 대한 애정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로열젤리 같은 이유식을 호호 불어서 먹이면 아기는 입을 꼼지락거리며 할아버지의 사랑을 천천히 음미했다. 아버님은 그 순간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시다가 만족스러운 한 끼에 대한 새의 지저귐 같은 아기의 옹알이를 듣고는 그렇게 좋아하실 수 없었다. 몇십 년을 태양을 피하지 않고 일한 탓에 단단한 껍질 같은 거친 손과 흙 만지길 좋아하는 아버님의 손톱 밑 까만 흙 테두리는 보드랍고 하얀 아기의 피부와 선명히 대조되었지만 내가 보기에 아버님의 손은 누구보다 부드럽고 깨끗했다.


아이들은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 큰 아이가 14살이 되었다. 아버님은 큰아이 나이보다 더 오랜 세월 동안 생수통 배달 사업을 하셨다. 가정이나 회사에 냉온수기를 대여해주거나 사무실에 생수통을 가져다주는 일이다. 예전엔 꽤 잘 되었다고 하는데 요즘엔 거꾸로 꽂아 쓰는 생수통의 불편함 때문에 거래처가 많이 줄어들어 돈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버님은 다 벗겨진 핑크색과 하늘색 테두리가 있는 외관에, 에어컨은 사치인 수명 다된 생수 트럭을 타고 아침마다 아이들을 유치원 앞까지 데려다주셨는데, 가끔은 손주들이 할아버지의 고물 트럭을 부끄러워하지 않을지 걱정하시는 모습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생수통 배달은 무척 고된 일이었다. 정기적으로 정수기를 소독해서 대여하는 것이나, 한 통에 20킬로그램이나 되는 물통을 트럭 가득 실어 올리는 일 모두 아버님 혼자 하셔야 하는 일이었다. 한 통은 어깨에 들쳐 매고 한 통은 한 손으로 거뜬히 들어 올려 배송지에 배달하는 일이, 힘센 아버님에게는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겠지만, 숨이 턱 막히는 한여름에 계단 없는 건물 5층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해도 힘든 중노동인 건 확실했다. 겨울에는 미끄러운 경사로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다 다치실 때도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버님의 몸에, 특히 다리에는 붉은 흉터가 많이 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 세월의 흔적일 거라 생각하니 존경심이 절로 들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님은 영세하고 궁핍할 뿐 아니라 골병들어 몸만 상하는 생수 배달에 대해 잔소리를 많이 하셨다. 그럴 때마다 아버님은 삶을 부정당하는 고약한 기분이 드시는지 표정이 영 좋지 않으셨다. 몇 년을 고집을 부리며 버티시다가 운동선수에 버금갔던 아버님의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셨는지 얼마 전에야 그 일을 그만두셨다.

“아버님, 일 안 하시니까 어떠세요? 그간 많이 힘드셨을 텐데 이제 좀 쉬세요.”

“마음이 허해. 사실은 물차를 인도할 때 그 사람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상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그날 아버님의 바람과는 다르게 계약은 취소되지 않고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누가 아버님의 복잡한 마음을 알 수 있을까. 느닷없는 실연의 아픔처럼 익숙한 것과 결별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궤적이 마무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생 열심히 산 사람도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여력을 잃어버리는 것이 이렇게 쉬운 일이라니. 삶은 가끔 우리를 어이없게 만든다. 나는 아버님의 그간 고생을 기념하자는 의미로 외식을 제안했지만, 전의를 상실하신 아버님은 괜찮다며 찹쌀밥에 막걸리 한잔으로 인생을 축이셨다. 그 후 며칠 쉬시는가 싶더니 지루해하는 기색이 역력하신 아버님은 다른 소일거리가 없는지 지인들과 연락하며 여기저기 돈을 벌 수 있는 곳을 알아보셨다. 이제 여가에 익숙해지시고 좋아하는 화초를 가꾸며 쉬실 거라 여긴 나의 생각은 명백한 오판이었다.


얼마 전, 아버님은 결국 나라에서 하는 어떤 공사에 투입되셨다. 집에서 출퇴근하면 좋으시련만, 다른 인부들과 여관에서 주무신다고 며칠 집에 안 들어오셨다. 여행 갔을 때를 제외하고 아버님의 외박은 전혀 낯선 데다가, 사랑하는 가족과 자기 집을 놔두고 조그만 여관에 다른 노동자와 함께 있으셔야 하나 싶어 어머님 앞에서 주책스럽게 눈물을 보였다. 어머님은 당황하신 듯 “그래도 일이라는 게 좋은 거야. 뭘 할 게 있다는 게 아직은 좋으신 거야.”라고 말씀하시며 조용히 티슈를 건네주셨다. 그날 저녁, 나는 심란한 마음을 감추고 아버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님, 일은 어떠셨어요? 지금 어디서 주무시는 거예요?” 

“응. 여기서 숙소 마련해줬어. 여관이야. 여러 명이 같이 자니까 심심하지 않아.”

“그래도 아버님, 저는 아버님이 그런 데서 주무시는 거 싫어요.”

“괜찮아. 여기 좋아. 이 사람아, 사람은 일을 해야 하는 거야.”

며칠 뒤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님은 사람들이 내가 젤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면서 식사하던 숟가락을 잠시 내려놓으시고 날 보며 환하게 웃으셨다.

“아니, 거기 여러 명 있었는데 며느리에게 전화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 며느리 잘 뒀다고 그게 행복이라면서 다들 부러워하지 뭐냐.”

아버님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며느리를 잘 둔 게 아니라 제가 시아버지를 잘 둔 거라고. 앞으로도 내가 아버님을 말릴 재간은 없다. 15년간 지켜본 아버님은 성실함과 책임감에 있어서는 천부의 재능을 갖고 계신 것 같다. 권태는 한 사람을 초라하고 우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 삶의 끔찍하고 지루한 공허함이 자신에게 덮치기 전에 이겨낼 수 있을 때까지 이겨보리라는 아버님의 위대한 생명력에 결국 모든 것을 수긍하게 된다. 이제는 갑옷으로 무장한 것 같은 15년 전 아버님은 찾아볼 수 없지만, 세월의 아득함이 느껴지는 주름 밖으로 자신의 삶을 끝까지 조립해내려는 아버님의 의지에 감히 찬사를 보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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