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플랭클린 - 적을 사랑하라.
자! 이제 나는 준비가 끝났다.
링 위에 올라선 복서처럼 심박수는 빠르게 증가하고, 체온이 상승한다.
근육이 긴장하고 미간은 찌푸려진다. 이를 꽉 문다.
거의 자제력을 잃기 직전이다.
그렇다. 나의 분노가 폭발하기 10초 전이다.
폭탄의 부착된 시계의 초침이 10초 밖에 남지 않았다.
파란 선과 빨간 선의 기폭선이 보인다.
흔하디 흔한 영화 속 폭탄 장면처럼 어떤 선을 잘라야 폭발을 막을 수 있을까?
빨간 선? 파란 선? 그러나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없다.
그냥 폭탄을 안전한 창밖으로 내던지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나를 현관 밖으로 내던진다.
집 안에서 폭발하지 않으려면 내가 밖으로 나가는 게 최선이다.
폭발 직전 나는 산책을 선택함으로써 집안의 평화를 지켜낸다.
“적을 사랑하라. 그들이 네 단점을 알려줄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플랭클린은 이런 말을 했다.
그는 대단한 분노 통제자였다.
물론 나는 아니다. 적을 사랑하라고? 나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적보다는 나를 더 사랑하고 싶다.
내 단점을 무례하고 천박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그들의 행동을 사랑해야 한다면, 나는 매일 '적들과의 동침'에 허우적거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분노는 우리 삶에서 생각보다 자주 만나는 감정이다.
그럼 분노라는 것이 대체 뭘까? 우리는 언제 이 붉으락 푸르락한 분노와 마주치는 것일까?
분노는 누군가가 내 영역을 허락 없이 침범할 때 생긴다.
누구나 자신만의 선이 있다. 그것이 물리적인 신체의 경계선일 수 있고, 심리적 경계선일 수도 있다.
신체적 폭력은 가장 대표적인 경계 침범 행위이다. 누군가 나를 때리면 당연히 분노가 터지고 화가 난다.
신체적 접촉이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선을 넘으면 불쾌하다.
그런데 물리적 경계선과 달리 심리적 경계선의 범위는 사람마다 다르다.
가족에서부터 자신의 가방이나 신발 까지도 심리적 경계 안에 포함시키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 경계선 안에 포함된 것을 함부로 손댔다간 상대의 분노를 자극할 수도 있다.
언어적 침범도 우리의 분노를 자극한다.
그것은 바로 조언이라는 탈을 쓴 잔소리다.
부탁하지도 않은 조언을 하며 라떼 신공을 시전 하는 상대의 침범은 분노를 유발한다.
조언은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조언일지 모르겠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잔소리이며, 지적질이고, 간섭일 뿐이다.
그 밖에도 분노가 발생하는 상황은 다양하다.
목표나 욕구가 방해받거나 좌절되었을 때, 또는 부당한 처우나 자존감을 손상시키는 상황에서 ‘무시당했다’, ‘존중받지 못했다’, ‘함부로 대해졌다'라고 지각하게 되면 화가 난다.
그런데 이런 자각이 열등감이나 심리적 상처로 인해 쌓이고 쌓이면, 누군가가 무심코 하는 말이나 행동이
자신에 대한 공격이나 무시로 왜곡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 느끼는 분노는 경험으로부터 축적된 엄청난 양의 분노가 한꺼번에 올라오기 때문에 무척 강력하다.
‘묻지 마 폭행’이나 ‘묻지 마 살인’ 등의 끔찍한 사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가해자들은 사전에 약속이나 한 것 같이 모두들 똑같은 말을 한다.
피해자가 자신을 무시해서 그랬다고.
화를 자주 느끼는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반드시 -해야 한다.’, ‘-할 때 -해야 한다.’, ‘-라면 -해야 한다.’와 같이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규칙을 지독하게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생각이 다르다. 사람마다 모두 다른 각자의 신념과 생각이 있다.
나에게 옳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 그렇지 않고, 나에게 당연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나의 기준이나 생각만 고집한다면, 분노가 기생충처럼 우리를 숙주 삼아 정신을 갉아먹는다.
사실 분노는 공격성을 동반한 굉장히 강력한 에너지다.
통제할 수 없는 분노는 신체적이든 언어적이든 어떤 형태의 폭력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늘 참담한 자책과 후회와 불이익으로 남는다.
반대로 분노를 내보내지 못하고 쌓아두면 어떨까?
나처럼 복종적이고 수동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에 대해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화를 속으로 삭이는 경우가 많다. 그때 분노라는 화살은 그대로 내 안으로 날아와 박힌다.
그럴 때마다 복통이나 위염, 궤양 등 신체적 통증으로 이어진다. 화병의 기본 증상이다.
맞다. 분노를 조절하는 방법은 그리 간단치 않다.
세상엔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구타 유발자들로 넘쳐난다.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뉴스, 혐오와 비난의 댓글로 가득한 소셜미디어, 직장 동료와의 갈등,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친구의 태도, 날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나 연인은 우리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장본인들이다.
우리는 스스로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자부하지만, 사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이성을 잃는 건 순식간이다.
그럼 어떻게 정신줄을 놓지 않으면서도 이 분노의 기폭선을 ‘안전하게’ 해체할 수 있을까?
우선 분노 뒤에 가려진 감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분노 뒤에는 고통과 괴로움을 유발하는 다른 감정이 꼭꼭 숨어 있다.
분노 안에는 슬픔, 수치심, 체념, 두려움, 죄책감 등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들이 위장막을 뒤집어쓰고 있다.
삶을 바꾸고 직면할 용기가 없는 경우, 이런 감정 상태는 분노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 감정들을 바로 보고 안아주는 것이 중요하다.
분노의 가면을 벗은 뒤 그 뒤에 숨어 있던 고통을 드러내면 우리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원인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고통스럽고 피곤한 과정이지만 천천히 들여다봐야 한다.
이 방법은 자신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게 하며 단호한 방식으로 분노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나는 조용히 걸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떠올린다.
그가 말하지 않았나. "최고의 복수는 적과 닮지 않는 것이다."라고
솔직히 말하면, 그 말이 처음엔 좀 와닿지 않았다.
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내가 똑같이 대응하지 않으면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받은 만큼 되갚아주는 것이 인지 상정이고 이자까지 쳐서 되돌려줘야 빚진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구타유발자들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결국 그들과 다를 게 없어진다.
그러든가 말든가. 우리는 이성을 집어던지고 분노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노는 항상 쓸데없는 파국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나는 경험적으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텔레비전을 켰다. 축구 장면이 나오는 영화가 보인다.
오합지졸의 축구팀이 강력한 라이벌과 경기를 하는 장면이다.
그 팀은 전반전에만 3골을 내주고 패배 직전이었다. 선수들은 지쳤고, 이미 체념한 상태다.
그런데 그때, 상대편 감독이 도발적인 말을 내뱉는다.
그 말을 들은 주인공 팀은 분노에 사로잡힌다.
카메라는 그들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면 이글거리는 눈빛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순간, '그래, 이젠 분노의 힘으로 역전하겠군!'이라고 확신했다.
분노를 동력 삼아 멋진 반전이 나올 차례였다.
하지만 현실은 내 기대와 달랐다.
그들은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경솔한 플레이로 불필요한 파울을 저질렀고, 주전 선수는 결국 레드카드를 받아 퇴장한다. 게임은 끝났다.
분노의 힘으로 역전하는 게 아니라, 분노로 자멸했다.
영화감독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분노가 치밀려고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다.
분노는 때로 우리를 강하게 만들 수 있지만, 잘못 다루면 스스로를 망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통제되지 않는 분노의 결과는 뻔하다. 자멸이다.
자. 여기서 나와 함께 분노라는 악마를 쫓아내는 신성한 구마의식을 거행해 보자.
첫 번째 단계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줄 "안전한 성직자"를 찾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악마의 모든 말도 안 되는 속삭임을 묵묵히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신실한 존재가 필요하다. 내 화를 끝까지 들어주고 수용해 줄 수 있는 친구나 가족, 상담자가 바로 그들이다.
만약 그런 인물을 찾을 수 없다면, 성역을 찾아 홀로 의식을 치를 준비를 하자.
방, 욕조, 혹은 차 안처럼 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안전한 공간이면 충분하다.
아니면 분노가 닿지 않는 한적한 산책로를 걷거나,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한 높은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공간 같은 곳 말이다.
다음은 감정을 표현할 의식 도구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의 키보드는 악마를 모니터 속에 봉인하는 주문서가 될 수 있고, 춤은 몸으로 분노를 정화하는 신성한 동작이 된다.
나 같은 음치라면 추천하진 않지만 노래를 선택했다면, 그것은 분노를 몰아내는 주술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안전이 확보되었다면, 이제 감정에 집중해 보자.
‘나 지금 엄청 화가 나!’ 같은 단순한 단어로 화를 인식하고, 그 감정을 말, 글, 몸짓으로 밖으로 끌어내어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가 다 풀릴 때까지, 그 감정이 가는 대로 끝까지 따라가며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노래를 선택했다면, 음정이나 박자는 무시해도 좋다.
잘 부르든 못 부르든 중요하지 않다. 분노를 몰아내는 데 필요한 건 조화가 아닌 격정이니까.
마음에 드는 의식 도구로 당신만의 방식으로 의식을 거행하라.
분노라는 악마가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그를 외면하지 말고 끝까지 직시해야 한다.
화가 말로 나오든, 몸짓으로 나오든 상관없다. 그저 악마의 발버둥을 있는 힘껏 느껴라.
만약 갑자기 맹렬한 분노가 솟구쳐 무언가를 때리고 싶다면, 실제 사람 말고, 쿠션, 소파, 매트리스 등을 이용해 때림으로써 공격적 충동을 안전하게 밖으로 비워내야 한다.
이 의식용 쿠션이나 매트리스는 당신의 공격적 감정을 받아줄 완벽한 제물이다.
마지막으로, 분노를 글로 봉인했다면 그걸 다시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구마가 끝난 후에는 악마의 흔적을 과감히 지워버려라.
글을 찢거나 삭제 버튼을 눌러 흔적을 없애는 것이 마지막 정화 의식이다.
절대로 자신의 분노를 써 내려간 글을 다시 읽지 말라. 완전히 지워버림으로 머리에서 삭제해야 한다.
이로써, 의식은 완수되었다.
마음에 남아 있던 어둠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당신은 다시 평화를 되찾게 될 것이다.
아직도 해소가 되지 않았다면, 위 구마 의식을 처음부터 다시 시행해 보라.
몇 번만 되풀이하면 지겨워서라도 당신은 다시 평화를 되찾게 될 것이다.
그렇다. 분노는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대 철학자들은 분노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많은 지혜를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의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분노는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이유로, 올바른 방식으로 나타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에픽테토스는 “분노는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했다.
이 철학자들의 말처럼, 분노는 우리가 그 감정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
혹시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말썽을 부리는가? 고장 난 기계를 때려 부수지 말고, 밖으로 나가거나 계단을 오르라.
지칠 때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그깟 기계가 주는 분노는 생각보다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빨간 선을 자르던, 파란 선을 자르던 어쨌든 폭탄은 터진다.
기폭선을 제거한 후 실수로 폭탄을 떨어트려 폭발하는 홍콩 코미디 영화처럼 말이다.
가장 좋은 것은 폭탄을 최대한 우리 자신에게서 멀리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폭탄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분노가 끓어오르는 그곳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치게 해야 한다.
그런 후에 분노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글쭈글해지도록 천천히 우리 마음에서 나가게 해야 한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천천히 걷는 것이 좋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차게 달려보는 것도 좋다.
이 방법이 항상 완벽하게 통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 분노가 일상을 잠식하지 않도록 막는 데는 꽤 도움이 된다.
결국, 분노는 모든 사람의 본능적인 감정이다. 화가 나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화나게 했을 때, 그 사람에게서 보복을 당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그로 인해 원하는 것을 잃을 수 있고, 좋은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갑작스러운 분노 폭발이나 보복 행동은 인간관계에서 갈등, 결별, 해고 등을 겪을 수 있다.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심지어는 해고나 사회적 단절 같은 극단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분노를 다스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복수하고 싶을 때마다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분노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리고 만약 그게 잘 안 된다면?
그땐... 책상을 꽝하고 내려치기 전에, 산책을 나가보자.
말썽 부리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는 여전히 그대로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