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라부아지에의 질량보존의 법칙
멍하게 생각없이 산책길을 걷고 있다.
치열하게 사색을 한 후에 때로는 아무 생각없이 가로수나 스치는 풍경을 바라볼 때가 있다.
나에겐 아주 특별하고 편안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때 툭 누군가 내 엉덩이를 친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노인이 한손엔 비닐봉지를 들고 내 엉덩이를 툭친다.
그리곤 씨익 웃으며 지나간다.
전혀 모르는 영감이다.
'아놔...' 순간 상스런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는다.
배나온 중년 남성에게 관심을 가지는 노인이 있다는 것이 고맙긴 하지만 이런 관심은 절대 사양이다.
잔디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 중 하나는 질량 보존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에 의해 확립되었는데,
대충 어떤 화학 반응이 일어나든 질량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다는 것이다.
즉, 물질이 타고, 녹고, 형태가 바뀌어도 총 질량은 어디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같은 문과 출신에겐 복잡한 내용이니 일단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자.
그런데 이 법칙이 물리적인 물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사회 속에도,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고 어디서나 일정하게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어디를 가든 이상한 사람, 이른바 '또라이'들은 항상 일정한 비율로 존재한다고 한다.
장소와 상황이 바뀌어도 그들의 존재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형태를 바꾸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할 뿐이다. 학교에서는 이상한 친구, 직장에서는 괴짜 상사, 가족 모임에서는 골칫덩이 친척으로 그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만일 주위에 그런 또라이를 보지 못했다면 어쩌면 우리가 그 또라이인지도 모르다.
또라이는 자신이 또라이인것을 알지 못한다.
이말을 누군가는 장난스런 농담으로 치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법칙은 심리학자들이 밝혀낸 과학적인 사실이다.
심리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인간 사회에서 반사회적 인격장애인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가 차지하는 비율을 연구했다.
지역, 문화, 연구 방법 등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통상 사이코패스는 1%, 소시오패스는 4% 정도라고 한다.
그둘을 합치면 약5% 정도로 추정된다.
우리가 100명을 만나면 그중 5명은 확률적으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매일 이상한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는 이유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세상이 왜 이 모양으로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심리학자들이 백 명 단위의 다양한 모집단을 만들어 심리성격 테스트를 진행했다고 한다.
교사 백 명, 성당이나 교회 수도원 등의 종교 집단에서 백 명, 회사원이나 학생들만 따로 백 명, 심지어 길을 지나는 행인들을 무작위로 모은 백 명 단위의 집단도 포함한 모집단을 구성했다.
그 결과 어떤 집단도 예외 없이 반사회적 인격장애 성향을 보인 비율이 백 명 중 4~5명, 즉 5% 내외의 범주 안에 있었다.
충격적인 반전이지만 종교 집단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또 이기적 성향의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을 실험을 통해 분류를 했더니 대략 10% 내외의 사람들이 매우 강한 이타적 성향을 보였고, 매우 강한 이기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고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나처럼 특별히 이타적이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이기적이지도 않은 부류로 분류되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이기적 성향이 강하지만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도덕이나 법 혹은 규범 속에 이기성을 자제하면서 이타성과의 균형을 유지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이타적 행동이 본인의 이기적 욕망을 포장한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별히 이타적이거나 혹은 이기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상황에 따라 이타적으로도, 이기적 인간으로 변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이기적이었다가 이타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 법칙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어디에서나 이상한 사람들은 일정 비율로 존재한다는 것.
우리가 만나던 사람이 갑자기 이상해졌다면, 그들이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성향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또 사람의 이타성과 이기성은 결국 그 사회의 지배적인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만약 미국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0년대 남부에 살았다면, 어쩌면 죄의식없이 노예제를 지지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쪽에 서서 싸웠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내가 노예가 아니라는 단서를 붙여야 하지만 말이다.
당시 남부 사회에서 노예제는 경제와 생활의 핵심이었고, 사회적 통념에 따라 나는 그 흐름에 따랐을 것이다. 개인적인 윤리적 기준보다는 사회적 흐름이 나를 이기적인 선택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또 내가 만약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에 살았다면,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나는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볼셰비키 혁명군을 지지하고, 때로는 혁명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몰아냈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지배적인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이타적인 혁명의 이상을 실현한다고 믿으며, 극단적인 이기적 선택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혹은 내가 만약 1950년대 냉전 시기의 미국에 살았다면,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나 또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려는 반공주의 사냥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사회에서 이기적으로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이웃을 의심하고, 때로는 고발하며 스스로의 이타성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왜곡되게 사용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좋은 사람이기를 바라지만 상황에 따라 혹은 상대적 관계에 따라 좋은 사람이었다가 나쁜 사람이 되거나 혹은 나쁜 사람이었다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삶이 바닥을 찍을 때 뜻밖의 구원의 손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상황들 역시 이 법칙의 원리 속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내가 살아가는 동안 내 생활 반경 안에는 5%의 반사회적 인격장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언제나 늘 주변을 서성거린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0%의 착한 사마리아인과 20% 정도의 내겐 썩 이롭지 않은 강한 이기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뉴스에서 쏟아지는 상식 밖의 소식을 보자.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저러는 거야?" 하고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더 잦아지는 느낌이다.
누군가는 '원래 그랬던 거야. 뉴스가 자극적인 소식을 더 많이, 더 자주 전할 뿐이야.'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이 법칙이 최근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든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누구나 한 번쯤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하고 당황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된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새로운 직장이나 동네로 도망쳐 봐도 소용없다. 그들은 공포영화처럼 어디든 있다.
그러니까, 어딜 가든 5%의 비율로 찾아오는 또라이들을 만날 준비는 항상 해두는 게 좋다.
이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미리 알고 당하는 것과, 영문도 모른 채 휘말리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알고 당하는 것은 마치 비 오는 날 우산을 준비한 상태와 같다.
그들이 곧 폭풍처럼 휘몰아칠 걸 예상하고 있으면, 비가 내리더라도 "아, 올 게 왔구나" 하고 우산을 펼칠 수 있다.
"저 사람은 왜 이러지?"라고 멘붕에 빠지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람들을 알고 있으면,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불필요한 자책을 하지 않게 된다.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답은 간단하다.
아무 잘못도 없다.
그냥 세상에 늘 존재하는 그 부류의 사람일 뿐이다.
그들이 내 인생에 잠시 들렀다가 일을 벌인 것이니,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다시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솔직히, 그 사람들 때문에 한동안 마음이 불편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면, 삶이 한결 가벼워진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하면, 스트레스 받을 이유도 없다.
나중에 지나고 나면, 가끔은 그 사람 왜 그랬나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유는 단순하다.
그냥 그랬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때 그 사람이 한 이상한 행동들도 더 이상 내 인생을 괴롭히지 않는다.
아마 그 사람은 평생 그래왔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과거의 상처도 덜 아프게 느껴진다.
"아, 그땐 그랬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과거의 일들은 조금 더 가벼워질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하게 자기 길을 가지만,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다르다.
그들은 남의 감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과 맞닥뜨리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오히려 쿨하게 대응하는 게 좋다. 그들이 원하는 건 내가 당황하거나 화내는 모습이니까, 절대로 그들의 장단에 맞춰주면 안 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들과 거리를 두는 것이 제일이다.
이왕이면 접촉을 최소화하고, 그들이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그들에게 단호하게 선을 긋는 법을 배우는 것이 정신적 건강을 지키는 첫걸음이다.
물론 소시오패스는 상대의 거절을 거절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맞서 싸우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득이 될때가 많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이들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어디서든, 그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는 이들과의 충돌을 피할 방법을 터득해야 하고, 때로는 그냥 현명하게 모른 척 넘어가는 기술도 필요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이 있듯이, 그들과 거리를 두며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수밖에 없다.
솔직히, 나는 세상이 좀 더 이타적이었으면 좋겠다. 이타적인 문화와 분위기라면 70%의 가변적인 사람들도 이타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이기적인 면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타인의 감정을 조금 더 생각하는 사회가 된다면, 이런 골치 아픈 상황도 줄어들지 않을까?
다들 서로 조금만 더 배려하고 이해하는 분위기 속에서 산다면, 세상이 살기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뭐, 그게 당장 바뀔 리는 없겠지. 그저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밖에.
세상에는 언제나 그 5%가 존재하고, 우리는 그들과 어찌 됐든 함께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배려심 있고 이타적인 곳이 되길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