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매트와 피아노 건반 사이에서 신앙을 묻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새번역)
주일 예배 시간, 찬양대의 피아노가 첫 화음을 누르면, 기타가 잔잔히 리듬을 맞추고, 드럼이 박자를 세기 시작합니다.
플루트의 숨결과 바이올린의 선율이 어우러지고, 어린아이의 탬버린 소리까지 더해지면, 예배당은 어느새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악기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졌을까?”
피아노의 조상은 귀족의 음악회를 위해 만들어졌고, 기타는 스페인의 거리에서 춤과 술의 리듬을 위해 울렸습니다.
드럼은 고대 부족이 전쟁을 알리거나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 사용하던 악기였고, 플루트와 하프는 태양신과 달의 여신에게 바치는 제사 음악의 주악기였습니다.
놀랍게도, 오늘날 예배를 채우는 그 모든 소리의 대부분은 처음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향한 제사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악기들이 지금 교회 안에서 다시 울리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누가 만들었느냐보다, 지금 누구를 위해 울리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소리는 주인을 바꾸어 예배가 되었고, 악기는 의미를 바꾸어 찬양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으며 “한 살 더 먹었다”고 말합니다.
입으로는 농담처럼 하지만, 그 안엔 새해의 기운을 받아들인다는 옛 믿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밤에 휘파람을 불면 귀신이 온다, 시험 전에 돼지꿈을 꾸면 길하다, 빨간 펜으로 이름을 쓰면 안 된다.
이제는 웃으며 넘기지만, 그 말들에는 여전히 오래된 신앙의 그림자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아도, 몸은 여전히 그것을 기억합니다.
어떤 행위는 오랜 세월 동안 신을 향한 몸짓이었다가 지금은 의미를 잃은 채 습관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신앙은 바뀌었지만, 몸은 여전히 옛 신의 리듬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심신의 균형을 위해, 또는 건강을 위해 요가를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요가의 시작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요가(Yoga)’는 산스크리트어 Yuj, ‘묶다, 결합하다’에서 나왔습니다.
인간의 영혼(아트만)과 우주의 본질(브라만)을 하나로 합하는 것, 그것이 요가의 근본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그것이 요가의 본래 의미입니다.
태양 경배 자세(Surya Namaskar)’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요가는 태양신에게 절하는 예식에서 시작된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뜻을 모르고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호흡을 정리하는 운동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동작 속에 남아 있는 신의 흔적을 생각해 보면, 믿음과 몸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럼 스포츠는 어떨까요?
눈을 감고, 드넓은 바다를 상상해 보십시오. 거친 파도 위에서 한 서퍼가 균형을 잡습니다.
보드 아래로 몰아치는 물살은 두렵지만, 그는 마치 그 파도와 하나가 된 듯 평화를 느낍니다.
그 광경은 그저 자유와 젊음을 상징하는 스포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달랐습니다.
하와이의 원주민들에게 바다는 신이 거하는 성스러운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은 파도를 신의 숨결로 여겼고, 서핑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신과의 교감 의식, 즉 일종의 제사 의식이였습니다.
왕족만이 파도를 탈 수 있었고, 경기 전에는 바다의 신 ‘카나로아’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오늘날 서핑은 전 세계 젊은이들의 스포츠가 되었지만, 그 뿌리에는 여전히 “신에게 다가가려는 인간의 몸짓”이 숨어 있습니다.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씨름과 비슷한 일본의 스모라는 스포츠가 그것입니다.
스모는 인기있는 일본의 전통 스포츠지만, 그 기원은 신토(神道)의 제사 의식이었습니다.
경기 전, 선수들이 다리를 들어 땅을 밟는 이유는 준비 운동이 아닙니다.
악귀를 밟아 누르거나 땅의 신을 깨우기 위함입니다.
심판은 제복을 입고 부채를 든 채, 제사장의 복장을 하고 서 있습니다.
스모는 본래 인간의 승부가 아니라,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제의적 공연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합에서 이겨도 선수들이 우리나라 씨름 선수들처럼 모래를 뿌리며 환호하거나 화려한 세레모니를 하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은 이제 그것을 종교가 아니라 ‘국민 스포츠’라 부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속의 제의는 희미해졌고, 남은 건 경기와 승부의 형식뿐입니다.
신은 사라졌지만, 그를 위해 준비된 몸짓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올림픽은 어떨까요?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평화의 축제’라고 부르지만, 그 뿌리는 제우스 신을 기리는 고대 그리스의 제전(신을 기리기 위해 여는 큰 규모의 행사나 축제)이었습니다.
성화는 지금도 그리스 헤라 신전에서 채화되고, ‘봉송’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돌며 받들어 옮겨집니다.
월계관은 신에게 바치는 찬미의 상징이었고, 경기 기간의 ‘신성한 휴전’은 신을 위한 시간의 정화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모의 종교적 기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건 기독교인이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올림픽의 불꽃이 여전히 헤라 신전에서 채화되어 봉송된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모는 여전히 ‘신토의 제의’로 여겨지는데, 올림픽은 ‘인류의 축제’로 불리며 그리스도인조차 그 불꽃 아래에서 기도하고 노래합니다.
왜 우리는 어떤 제의에는 거리를 두면서, 또 어떤 제의에는 아무렇지 않게 동참하게 되는 걸까요?
아마 그 이유는 우리가 ‘행위의 근원’보다 ‘행위의 감정’을 더 신뢰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핑을 하면 자유를 느끼고, 요가를 하면 평화를 얻으며, 올림픽을 보면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뿌리가 무엇이든, 우리는 ‘좋은 감정’을 주는 행위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죠.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누구를 예배하는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 (새번역)
요가가 ‘몸의 제의’였다면, 음악은 ‘소리의 제의’였습니다.
고대 문명에서 음악은 언제나 신에게 바치는 예배의 도구였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제사장이 하프와 플루트를 연주하며 태양신 라(Ra)에게 예배했고, 메소포타미아의 신전에서는 비파가 신의 이름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스의 음악 신 ‘뮤즈(Muse)’는 신성한 영감을 상징했고, 중세의 교회에서는 오르간이 성전 중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17세기, 한 악기 제작자가 하프시코드의 (오늘날의 피아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유럽의 고악기) 불편함을 해결하려고 만든 새로운 악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에서 빠지지 않는 악기인 피아노로 인간의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하려는 시도였습니다.
피아노는 처음엔 귀족의 거실에서 세속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였지만, 이내 교회로 들어와 찬양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신을 찬미하던 소리가 인간의 손끝에서 다시 창조주의 찬양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서핑을 하든 요가를 하든, 심지어 노래를 부르든, 그 모든 몸의 움직임은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향해 이 몸을 드리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요가 매트 위에서도, 스모의 흙판 위에서도, 피아노의 건반 위에서도, 우리는 같은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몸짓과 이 소리가 지금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세상은 신을 잃었지만, 제의를 잃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향해 손을 모으고, 소리를 냅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건 단지 이름만 바뀐 또 다른 제의일 뿐입니다.
“그들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다.” (로마서 1:25)
찬양대의 손끝에서 울리는 피아노의 음, 드럼의 리듬, 플루트의 숨결, 그 모든 것이 본래의 주인을 되찾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음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배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요가의 호흡도, 스모의 절제도, 올림픽의 땀방울도 하나님을 향할 때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무릎의 각도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우리는 믿지 않아도 남아 있는 제의의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순간, 그 모든 행위는 제의에서 예배로, 습관에서 찬양으로 변합니다.
결국 신앙은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절하고 있습니까?”
세상은 수많은 몸짓으로 신을 대신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모든 몸짓 속에서 누구에게 절하고 있는가를 잊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