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나는 길이다.’는 정말 배타적 선언이었을까?
남의 종을 심판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가 서 있는 것도, 넘어지는 것도 그 주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능히 서 있게 하실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4절
구원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미국의 바르나 그룹이 오랫동안 반복해 온 조사가 있습니다.
“당신은 죽으면 천국에 갈 것 같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은 놀라울 정도로 한결같습니다.
종교가 있든 없든, 신앙 생활을 하든 말든, 80% 이상이 “네, 저는 천국에 갈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마치 천국 회원권이 이미 발급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천국에 갈 것 같습니까?”
그런데 이 질문 앞에서는 분위기가 좀 달라집니다.
방금 전까지 천국 문을 활짝 열어 두던 사람들도, 다른 이들의 구원 문제 앞에서는 갑자기 조심스러워집니다.
마음속에 묘하게 이런 생각이 스며듭니다.
“나는 괜찮은데… 저 사람은 좀 애매하지 않나?”
또 다른 조사도 있습니다.
Pew Research Center는 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면 예수님을 몰라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놀랍게도, 기독교인 중 절반 이상이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막상 사람과 삶을 떠올리면, 마음 한편에서는 “그래도 선하게 살면 되지 않나요?” 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이 두 조사가 말해 주는 사실은 단순합니다.
구원 문제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는 유난히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은근히 복잡한 기준을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후한 점수를 줄까요?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자기중심적 관대함’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내로남불입니다.
내가 화난 날에는 “오늘은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렇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옆 사람이 화를 내면 “저분은 성격이 좀 그렇구나.”라고 판단합니다.
구원 문제도 비슷합니다.
내 삶의 부족함은 “사정이 있어서 그랬지.”라고 설명하고, 내가 해 온 선한 일들은 “그래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기억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천국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기준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올려 줍니다.
물론 구원의 기준은 우리의 선함과는 무관하게 작동하는 것을 논외로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나에게 후해질수록, 타인에게는 기준이 더 까다로워지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정도면 천국 갈 만하지. 그런데 저 사람은… 좀 애매하지 않나?”
이런 비교는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계속 반복되면 ‘나는 선하고, 저 사람은 부족하다.’는 구조가 마음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 구조가 바로 배타성의 씨앗입니다.
배타성은 처음부터 공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건 공평하지 않아 보인다.”, "이 사람은 좀 어렵지 않을까?”라는 정의감의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그러나 밑바닥에는 언제나 “나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하려는 태도”가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태도가 쌓이면 타인의 구원 문제를 내가 평가하는 자리로 올라서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는 구원 앞에서 자신에게 관대해지고, 그 관대함은 종종 타인을 향한 엄격함과 배타성으로 변합니다.
문제는 이런 심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도 똑같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두 구절이 그렇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 (요 14:6)
이 예수 외에는,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행 4:12의 요지)
이 말씀들을 맥락 없이 떼어내어 읽으면, 금세 이렇게 해석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면,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조상들은 어떻게 되는가?”, “선하게 살았던 인물들은?”,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들은?”
그리고 이 질문들은 다시 “누가 안 되고, 누가 되고…”라는 판단을 낳으면서 우리 안의 배타성을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들을 그때, 그 자리에서, 누구에게 하신 말씀이었는지 상황과 맥락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말씀의 본래 의도가 드러나고, 우리가 흔히 빠지는 오해도 자연스럽게 풀리기 시작합니다.
먼저 요한복음 14장은 토론장에서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 아니라, 위로의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곧 떠나신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마음은 크게 흔들려 있었습니다.
세상을 떠난다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지금까지 따랐던 길은 헛된 것이 아닌가?”
제자들에게 두려움과 혼란이 몰려왔습니다.
그때 도마가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저희는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요 14:5)
이 질문은 논쟁을 위한 질문이 아니라 마음이 무너지는 제자의 울음과도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 (요 14:6)
이 말씀은 “너희는 나를 통해 이미 하나님을 보았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를 놓지 않는다.” 라는 관계적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경고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막 흔들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의 길이다. 너희가 흔들릴 이유는 없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관계적 위로의 말씀을 한 구절만 떼어내어 “예수님을 몰랐다면 모두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우주적 공식처럼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을 알 수 없었던 시대나 지역을 향한 판결이 아니라, 믿음이 흔들리던 제자들을 다시 붙잡기 위한 말씀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장면의 청중은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보았고, 그분의 기적을 보았고, 무죄를 알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겼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 앞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2)
이 말은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들을 향한 정죄가 아니라, 이미 진리를 알고도 자기 이익 때문에 거부한 사람들에게 회개의 결단을 촉구하는 선언이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맥락 없이 가져와 “예수님을 몰랐다면 구원은 없다.”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성경이 의도한 사용법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를 알고도 외면했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경고였지, 예수를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의 구원을 한 줄 공식으로 정리한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베드로의 선언은 원래 정죄의 칼이 아니라 떨리는 제자들을 향한 위로, 진리를 알고도 거부한 이들에게 던진 진실의 직면이었습니다.
판단이 아니라 관계, 닫힌 문이 아니라 열린 초대, 교리의 문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살아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들을 불안과 기준으로 읽기 시작하면 의도가 흐려지고 방향이 달라집니다.
초대는 어느새 경계가 되고, 관계는 규칙이 되고, 복음은 선 긋기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는데 어떻게 되었을까?”
“다윗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는데 구원받았을까?”
“엘리야는? 사라, 한나, 느헤미야는?”
더 내려와 봅시다.
역사 속에서 놀라운 선함을 실천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 평생을 바친 간디, 평등을 향한 평생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넬슨 만델라, 지극히 작은 이들을 돌보며 자신의 생을 바친 마더 테레사, 인권을 위해 헌신한 여러 활동가들, 생명을 살리기 위해 국제 구호 현장에서 뛰던 이름 없는 의료진들…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마음 안에는 더 가까운 이름들도 떠오를 것입니다.
유난히 선하고 따뜻했던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평생 성실하게 살았지만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이웃의 이름들.
이런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되는지, 이 질문은 우리가 결코 쉽게 넘길 수 없는 질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이름들은 끝이 없습니다.
구약의 인물부터 현대의 위대한 선인들까지, 심지어 우리가 사랑했던 가족의 이름까지도 이 질문 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질문을 거의 다루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다른 전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교회는 하나님을 특정 시대와 종교 안에 갇힌 분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모든 시대, 모든 민족, 모든 문화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부르시는 분으로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이름을 몰랐어도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었습니다.
모세가 복음을 전해 들은 적이 없었어도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걸었습니다.
다윗, 룻, 이사야, 사무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초기 교회는 굳이 그들의 구원을 따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미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들도 구원받았을까?” 라는 질문은 초기 교회에게는 전제가 잘못된 질문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몰랐던 시대와 지역의 구원을 따로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우리가 가진 것보다 훨씬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넓은 시야를 잘 보여 주는 장면이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의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주 기초부터 설명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도행전 17:25, 새번역)
이 말은 하나님이 특정 종교나 특정 나라에만 머무르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존재 안에 이미 가까이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주신 생명 안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바울은 이렇게 이어갑니다.
“하나님은 정해진 때와 그들이 살 경계도 정하셨습니다.” (17:26, 새번역)
우리는 어느 나라에 태어날지, 언제 태어날지, 어떤 종교 환경 속에서 자랄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그 사람의 공로나 실수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며 더듬어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7:27, 새번역)
‘더듬는다’는 표현이 참 절묘합니다.
사람은 완벽하게 알지 못해도 자신이 가진 만큼의 빛 안에서 진리를 향해 조금씩 움직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철학을 통해, 어떤 사람은 자연을 바라보며, 또 어떤 사람은 양심을 따라 살면서 어둠 속에서 벽을 짚듯 진리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사람은 더듬어도 하나님을 향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무지한 시대에는 눈감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7:30, 새번역)
이 말은 “괜찮다, 아무 문제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이 알 수 없었던 시대와 조건을 죄의 책임으로 묻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대적, 문화적 제약을 그대로 고려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설교는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라고 결과를 단정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대신 이렇게 말하는 설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보다 훨씬 넓은 시야를 가지고 계시며, 인간의 한계를 아시고, 진리를 향한 작은 움직임까지 보시고, 시대와 문화의 장벽 속에서도 사람을 부르신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정보 기준으로 사람을 나누지 않으신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는 예수님 이전 시대의 구원을 “알았느냐, 몰랐느냐”라는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이라는 사건을 ‘하나님의 성품’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원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공평하심이 아니라 우리의 판단 방식입니다.
우리는 구원 문제를 다룰 때 자연스럽게 인간적 기준을 적용합니다.
“이 사람은 선했으니까 구원받아야지.” “저 사람은 엉망이니 힘들지 않을까.” “그 시대는 복음을 들을 수 없었으니 어떻게 되지?”
이 질문들 속에는 “내 기준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해 보겠다.”는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이 마음이 쌓이면 성경은 사람을 나누는 잣대가 되고, 그 순간 배타주의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을 인간의 자격 심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고, 그분의 시야는 우리가 세울 수 있는 어떤 기준보다
넓고 깊습니다.
결국 우리는 누가 구원받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는 척해서도 안 됩니다.
그 판단은 우리 권한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정확히 아신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누군가를 잘라내기 위한 칼이 아니라,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 초대와 확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의 구원을 재단하기보다 내 삶에서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따라가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설 때, 우리는 배타주의가 아니라 겸손과 사랑을 품고 세상 속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