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나요? -ep.5
'나는 왜 재주가 없을까?', '이게 나의 길이 맞는 걸까?'란 고민들을 '내가 발견하지 못한 재주는 뭐가 있을까?', '지금의 내가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라고 바꾸려 노력하는 것 외에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생각들도 있습니다.
그중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은 '사람은 왜 사는가?'입니다. 어떤 매력에 끌렸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철학적인 물음에 조금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생 때 읽었던 책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인걸 보면요. 그런 책을 읽으며 한 번은 '사람은 왜 사는가?'에 대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그냥 사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밥은 왜 먹고, 잠은 왜 자고, 일은 왜 하는지에 대한 답은 찾다 보면 저에게 더 맞는 삶을 위해 노력이라도 하게 되지만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은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저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삶이라 결론 지었습니다.
그처럼 저를 갉아먹는 생각 중에 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로 '굳이?'입니다. 제가 호기심이 많은 성격은 맞지만 관심 있어 하는 분야에만 호기심이 있습니다. 호불호가 강합니다. 그래서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이라 철벽 친 분야라거나 전혀 궁금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라는 반응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거나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이 아니라 다른 시도를 하는 이들을 보며 "굳이?"라며 못되게 반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세상은 '효율'로만 굴러가는 것이 아니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그렇지 않은 방향에서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리고 "굳이?"라는 생각과 태도에는 상대방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표현하는 것, 오만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기회들을 제 발로 차버린다는 두 가지의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고 또 다른 시도를 하다 보면 기대하지 않던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난 뒤부터는 의식적으로 '굳이?'란 물음표를 달지 않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굳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여전히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저를 갉아먹는 것까진 아니지만 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 역시나 마음먹은 만큼 잘 되진 않지만 저는 '완벽하려는 욕심'을 내려놓는 중입니다.
완벽함의 문제점은 자기가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만 완벽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완벽함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자신의 사고의 틀을 벗어나면 완벽함은 부족함으로 바뀌게 된다.
<442 시간 법칙> 하태호, 216쪽
예전에 빌게이츠와 일론 머스크에게서 배우는 시간관리법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442 시간 법칙>이라는 책에서 발견한 문장입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기 위해서 완벽하려고 애썼던 지난 노력들이 어쩌면 '굳이'라는 편견만큼이나 좁은 사고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구나, 사고의 전환이 일어난 순간이었습니다.
과거의 저는 스스로 대단한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완벽을 추구한다는 것에서 약간의 자부심까지 느낄 정도였습니다. 지금에야 생각해 보면 정말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가장 많이 두드러졌을 때가 학창 시절 필기 노트를 정리할 때였지 않나 싶습니다.
그 당시 저는 수성펜 위에 형광펜을 덧칠하면 번진다는 것을 생각해서 형광펜을 글 길이만큼 계산해서 먼저 색칠해 놓은 후에 수성펜으로 필기를 했습니다. 노트 첫 페이지에 쓴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고 다시 쓰는 것이 아니라 노트를 새로 샀습니다. 노트를 찢은 자국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서요. 그리고 첫 페이지부터 쓰기 시작한 펜과 형광펜의 색깔은 각자 역할이 있었고, 그것을 칼같이 지키기 위해서 노트 앞장을 매번 들춰보며 필기를 했습니다. 그러다 역할에 맞는 펜이 없는 때에는 다른 곳에 필기를 한 후 다음에 옮겨 쓸 정도였습니다. 노트를 다 쓴 후에는 정갈하게 들어찬 필기들을 보며 완벽함에 대한 흡족함을 느끼곤 했답니다. 필기 내용을 살펴본 것이 아니고요. 공부를 하느라 그렇게 완벽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쓸데없는 부분에서 완벽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도 완벽하려 애썼던 적도 있습니다. 대학생 시절 독서모임을 준비했을 때가 기억이 납니다. 독서모임에 참여하는 동아리 멤버들이 책을 읽지 않고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던 저는, 제가 진행할 차례에는 완벽하게 책 내용을 인지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정한 책을 읽지 않으면 전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만들었고, 조금이라도 읽게 만들고자 책 속에서 중요한 부분은 모두 타이핑을 한 후 동아리에 뿌렸습니다. 그렇게 진행한 독서모임은 제 나름대로 만족스러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한 선배로부터 '네가 동아리에 애착이 있는 건 알겠는데...'로 시작하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리고 현재 하는 일이 아이들의 성적과 미래에 큰 영향을 주는 일이다 보니 완벽하려는 욕심을 부릴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이 시험 전까지 한 문제라도 더 풀어봤으면 좋겠고, 문제 속에 사용되는 개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제대로 이해했으면 좋겠고,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설명해 준 개념들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여전히 합니다. 그러나 '완벽함은 주관적인 것이다'라는 한 문장을 읽은 후에는 조금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더군요. 모든 아이들의 목표가 1등급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시험대비를 하며 알려준 문제들을 다 맞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강의를 했지만, 그들의 목표가 그 정도가 아니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 기준과 아이의 기준이 달랐던 것을 모른 채 그저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압박하고 있었던 겁니다. 제 입장만 생각하며 '당연한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아이들을 몰아붙였던 겁니다. 참 미안해지더군요.
책 속의 한 문장 덕에 많이 내려놓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그림을 그리다 '완벽하려는 생각은 정말 버려야겠구나' 한 번 더 깨닫기도 했습니다. 물감에 물을 타서 그리는 그림을 '수채화'라고 합니다. 유치원 시절 크레파스와 함께 많이 접하는 미술재료입니다. 한 번쯤 해보셨지요? 물에 타서 농도를 조절하며 그리기 때문에 수채화는 맑고 투명한 것이 매력입니다. 그렇기에 색을 쌓아 만들어나가는 유화와는 다르게 힘을 빼면 뺄수록 매력이 더 잘 드러나는 그림입니다. '여기에 조금만 더 칠하면 완벽할 것 같은데'란 생각으로 덧칠에 덧칠을 하다 보면 투명함을 잃고 탁해지기 시작합니다. 제가 작년에만 해도 그런 식으로 망친 그림이 얼마나 되는지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 번은 사과 하나를 그리려다가도 하루를 꼬박 보냈습니다. 마음에 드는 분위기와 색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그날 하루에 그린 사과 그림만 대여섯 장은 될 겁니다. 그것도 한 장에 사과가 하나만 있었을 뿐인데 말입니다. 허리와 팔에 근육통이 느껴질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어찌어찌해서 완성한 사과 그림은, 그날 하루 동안 그렸던 사과 중 가장 빠른 시간에 완성한 것이었습니다. 붓터치를 최대한 적게 하고 색을 최대한 덜 섞어 그린 그림이 가장 예뻤습니다. 그때, 욕심을 덜어내고 덜어내는 것이 가장 본래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또 한 번 느꼈습니다.
그런 깨달음 덕에 서른이 넘어 욕심을 하나씩 덜어내다 보니 좋은 점이 많습니다. 일단, 당연하게도 스트레스를 덜 받습니다. 그리고 상대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일도 덜합니다. 누군가의 실력을 기대하거나 누군가로부터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다 보니 인간관계가 좀 편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도 내려놓고 보니 조금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완벽하려다 보니 게으르다'는 말에 참 공감하던 사람이었는데도요.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니 도전하려는 용기가 생겼고, 잘 되지 않더라도 '그럴 수 있지'라며 가벼이 넘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기교가 완벽했던 참가자보다 매 라운드마다 성장하며 다른 모습을 보여줬던 참가자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던 이유를 이제는 이해합니다. '다음이 기대되는'이란 수식어가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완벽한'보다도 더 큰 가치를 가지는 지도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스스로를 갉아먹는 생각과 함께 완벽하려는 욕심을 덜어내려 합니다.
혹여나 저처럼 스스로를 가둬놓는 생각들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돌이켜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평소에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들여다보는 것부터가 변화의 시작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