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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이 May 29. 2023

'워킹맘'이 아닌 그냥 '맘'

휴직 3개월 차, 한창 육아로 인한 우울감이 절정에 달했을 때 친구가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남편들에게 아기를 맡기고 우리는 자부(자유부인) 타임을 가지자는 것이었다. 최근 나의 우울함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남편은 흔쾌히 수락했고,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와 둘이서 밖으로 나왔다. 날씨 좋은 토요일 오후, 예쁜 카페, 달달한 케이크, 편안한 대화. 신이 난 나는 쉬지 않고 떠들었고, 친구는 나의 이야기에 함께 공감하고, 웃고, 울면서 들어주었다. 그러다 문득,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근데 너, 지금이 그리워질 수도 있다?



친구는 아기 둘을 연달아 낳고 워킹맘으로 지내고 있다. 양가 부모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시고 남편의 육아 참여도가 친구 스스로 '상위 5프로'라고 평할 정도로 높지만, 그래도 워킹맘으로 사는 것은 힘이 든다고 했다.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 일을 하고 퇴근하면 다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일이 쌓여있는 매일. 그 매일이 반복되는 삶을 살다 보니 '그래도 휴직했을 때가 좋았구나' 싶다는 것이다.


그제야 남편이 퇴근 후 넋두리처럼 하던 말들이 와닿았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출근하면 아기랑 당신이 걱정되고, 막상 집에 오면 미처 못 끝내고 온 일들이 자꾸 생각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남편은 올해도 많은 업무를 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기가 깨는 새벽을 책임지고, 칼같이 퇴근 시간을 지키며 집으로 달려와 나와 함께 아기를 돌보고, 씻기고, 밀린 집안일을 했다. 모든 일을 마친 내가 샤워 후 나와보면 남편은 늘 침대에 기절하듯 쓰러져 있었다. 육퇴 후에도 좀처럼 책을 펼치지 못하고 잠을 청하는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나: 여보, 집에서 수업 준비 안 해도 돼?

남편: 요즘 작년에 만들었던 자료 그대로 쓰고 있어.

나: 올해 수정하고 싶은 부분 있다고 하지 않았어?

남편: 수정하고 싶은데, 할 힘이 없어. 내가 학교랑 집에 쓸 수 있는 에너지는 한정돼 있잖아. 나는 여보랑 아기가 더 중요해. 그래서 학교에 쓸 에너지를 아끼기로 했어.


평소 남편은 매일 학습지를 검사하고 아이들이 쓴 글에 일일이 긴 답장을 써줄 정도로 수업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그런데 과도한 업무와 육아 사이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수업 준비를 포기한 것이었다. 물론 수업하는 순간만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임하고, 학교에서 틈틈이 남는 시간에 계속 수업 준비를 할 테지만, 딱 거기까지. 퇴근 후의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진짜 하고 싶은 수업'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남편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나의 육아 휴직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복직이 하고 싶었다. 하루종일 아기를 돌보면서 집에만 있는 내 모습이 정체된 것 같아 불안했고, 일을 하면서 느꼈던 성취감과 보람이 그리웠다. 즉 여태까지의 나는 '워킹, ' 그러니까 일을 다시 하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을 뿐, '워킹맘'이 된 나의 모습은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일만 하면서 지낼 수 있는 삶은 나에게 있을 수 없다. 복직을 하면 좋든 싫든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한다. 아기가 홀로 세상에 나아갈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워킹맘'으로 살아가야 한다. 임신과 출산에 뒤따르는 이 필연적인 사실을 '워킹대디'인 남편을 보면서야 새삼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나의 아기, 오로지 이 아기만이 삶의 목적인 시간이 지금 뿐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니까 아마도 지금 나의 휴직은 육아에만 집중할 수 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일의 멈춤, 휴식 정도로 느껴졌던 육아 휴직이 사실은 얼마나 눈부신 시기인지를 깨닫게 되니, 오랜 우울감이 조금씩 해소되었다.




매주 아기를 돌보러 와주시는 어머님은 잠든 우리 아기를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딱 하루라도 좋으니, 이때의 우리 아들을 다시 만나보고 싶어.


이제 그 말의 참 뜻을 알 것 같다.

아, 그렇구나. 힘들다고만 생각한 이 시간이, 나중에는 정말로 그리울 때가 오겠구나. 벌써부터 훌쩍 자랐다고 느낄 만큼 커진 아기를 보면서, 밤마다 더 아기일 때의 사진을 넘겨보는 나는, 아마 앞으로도 평생 그러고 있겠구나.




이제는 이 육아 휴직 동안 뭘 해야 할지 알겠다. 나는 평생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해 내 아기에게 사랑을 듬뿍 주기로 했다. 아기로 인한 웃음도, 화도, 눈물마저도 다 즐기기로 했다. '워킹맘'이 아닌 그냥 '맘'으로지낼 수 있는 이 시간을 온전히 즐기기로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기의 모든 순간을 오래도록 내 눈에 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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