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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이 Oct 17. 2023

아기가 아픈 날

어떻게 아름다운 육아만 할 수 있겠어

아기가 감기에 걸렸다. 해열제를 먹고 푹 잠든 줄 알았더니 밤새 열 번도 넘게 깨는 바람에 같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코가 막혀 쪽쪽이도 거부하고, 숨쉬기가 괴로운지 소리 지르며 깨길 반복하는 아기를 눕혀서 토닥여도 보고, 안아서 달래도 보고, 혹시 또 열이 오르진 않았나 노심초사하고... 겨우 아침까지 버텨서 소아과로 갔다. 행여 추울까 꽁꽁 싸매 진료를 보고 코를 빼주니 돌아오는 유모차에서 잠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들어 올리자마자 바로 깰 텐데 조심스레 침대에 눕히니 그대로 계속 잤다.


같이 깊이 잠들어 버린 바람에 10시 30분에 먹여야 하는 이유식을 11시 40분에야 겨우 깨워 먹였지만, 아기는 한 숟가락 먹고는 거부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배가 고파 잘 안 먹나 싶어 분유를 먼저 먹이고, 다시 이유식을 주니 몇 숟가락이나마 먹었다. 그마저도 감사했다. 거기에 평소 잘 주지 않는 큰 떡뻥을 몇 개나 먹이고 물도 계속 마시게 했더니 그래도 배가 찬 것 같아서 조금은 안심이 됐다. 내 늦은 점심은 남은 된장국에 밥만 말아 5분 만에 흡입하듯 먹었다.




요즘 부쩍 혼자서 이것저것 탐색하며 잘 놀던 아기였는데, 오늘은 내가 잠시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소리를 지른다. 그야말로 완전히 '엄마 껌딱지'가 된 아기를 안고 이 방 저 방을 수십 번 왔다 갔다 했다. 평소 좋아하던 그림책을 읽어주고, 장난감을 쥐여주고, 노래를 불러줘도 아기는 짜증이 가득했다. 아기띠만 거의 30분을 해서 겨우 재우고 나니, 온종일 아기 옆에만 붙어있느라 난장판이 된 거실이며 부엌이 보였다.


소리 없이 집을 치우고 떡뻥 가루로 엉망이 된 부엌 바닥을 닦고 나니, 그제야 아까 점심을 먹고 양치를 못한 게 생각이 났다. 하지만 지금 화장실에 가면 아기가 깨지 않을까? 몇 번을 갈등하다 결국 양치를 포기하고 안방으로 와 지친 몸을 뉘었다. 아기가 기침하는 소리, 자다 깨서 우는 소리에 반응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그새 1시간이 지나있었다.


'수유 시간이 지났는데 깨워야 하나? 푹 자야 나을 텐데. 근데 오늘 제대로 먹은 건 떡뻥이 다인데. 뭘 좀 먹어야 할 텐데.' 고민하는 사이 다행히 아기가 울면서 깼다. 안아 올려 달래주다 보니 갑자기 내 배가 따뜻해져 온다. 아... 너무 오래 기저귀를 하고 있었구나. 정신이 없다 보니 시간마다 갈아주는 기저귀도 때를 놓쳐 오줌이 샌 것이다. 축축해진 옷 때문에 더 짜증이 난 아기에게 황급히 새 기저귀와 옷을 입혔다.




수유를 하며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잘 안 하던 설사를 엄청 했다. 엉덩이를 씻기고 기저귀 갈이대에 눕혀 다시 새 기저귀를 채우는데 갑자기 기침을 크게 하더니 숨이 막히는 듯 컥컥거렸다. 놀란 마음에 얼른 일으켜 앉히고 등을 세게 두드렸다. 그랬더니 토가 분수처럼 마구 튀어나와 아기 옷은 물론이고 내 옷과 손목 보호대를 흠뻑 적시고 매트와 방바닥, 미쳐 버리지 못한 똥기저귀에까지 흘러내렸다. 이럴 수가. 오늘 하루종일 힘겹게 먹인 모든 걸 토했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토범벅이 된 아기의 옷부터 벗겨 욕실로 갔다. 한 손으로는 칭얼대는 아기를 안고, 한 손으로는 아기 욕조에 물을 받아 온도를 체크했다. 아기를 욕조에 앉혀 씻기니 이유식 잔해들이 물 위로 둥둥 떠올랐다. 한 번 더 헹궈줘야겠다 싶어 다른 욕조에도 물을 받아 다시 씻겼다. 평소처럼 욕실을 나가 물기를 닦아주려니 문득 에어컨 바람이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목욕 전에 끄는 에어컨을 끄지 않은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물이 묻지 않은 변기 옆 욕실 바닥 한편에 수건을 펴고 조심스레 아기를 눕혀 물기를 닦았다. 평소와 다른 방식에 아기는 짜증이 나는지 유독 소리를 지른다.


아기를 수건으로 감싸 방에 와서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기 옷 바구니가 토 범벅인 바닥 너머에 있는 것이다. 수건을 챙길 때 옷도 함께 챙기지 않았던 나를 원망하며 토 바닥을 조심스레 건너뛰어 옷을 챙겼다. 겨우 새 기저귀와 옷을 입히고 뽀송해진 아기에게 장난감을 쥐어주고 뒤처리를 시작했다. 아아... 계속 운다. 나도 울고 싶다. 하지만 닦아야 할 곳이 산더미다. 토로 젖은 몸으로 방, 욕실,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아기 돌보기와 뒷정리를 동시에 하고 빨래에 바닥까지 빡빡 닦고 나니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제야 나도 씻고 토 묻은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는지 혼자 논다 싶을 때쯤 남편이 퇴근했다. 내가 아기를 끼고 있는 동안 남편이 저녁상을 차리고, 아기까지 셋이 밥상에 앉았다. 다시 이유식 먹이기를 시도하니 이번에는 입을 열심히 벌린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평소의 반 밖에 먹지 않았지만 그게 어디인가. 내 밥은 맛을 느낄 틈도 없이 대충 욱여넣으며 아기의 작은 입에 조심조심 죽을 떠먹였다.


남편이 전담하는 저녁 목욕 시간이 되어서야 마침내 아기에게서 잠시나마 떨어질 수 있었다. 남편이 밀린 설거지를 하는 동안 마지막 힘을 내서 약과 분유를 먹이고 양치, 트림까지 시키니 아기도 지쳤는지 내 어깨에 얼굴을 마구 비빈다. 아가야, 너도 힘들었지. 둥기둥기 안아주다 눕히니 거의 바로 잠이 들었다.


정말이지 너무, 너무, 힘든 하루였다.





잘 아프지 않던 아기가 유독 감기를 심하게 앓았던 6월의 어느 날. 치열한 하루를 보내고도 누구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게 억울해서 낱낱이 써뒀던 기억이다. '어떻게 아름다운 육아만 할 수 있겠어'라고 부제를 달면서 스스로를 다독이던 그 시간도 지금 보니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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