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디자인 스튜디오로 살아남기
다른 많은 직군들도 그렇겠지만, 디자인 스튜디오는 특히 '회의'가 많다. 정말 많다.
매주 정기적으로 진행사항 체크와 R&R을 위한 주간회의와 모든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마다 필요한 내용을 팀원들에게 공유하고 전달하기 위한 킥오프회의부터... 프로젝트마다 이슈 사항이 생기는 경우 PM에 의해 긴급하게 소집되는 긴급회의, 각 프로젝트의 분석/전략을 위한 기획회의, 촬영이 필요하면 촬영기획회의, 전시가 필요하면 전시기획회의, 디자인 착수와 진행을 위한 디자인회의, 진행 사항 점검을 위한 중간회의를 비롯한 실무에 필요한 다양한 상시회의들... 실무 작업 중 회의의 성격조차 띠지 못한 채, 각 담당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급박하게 자료와 의견을 주고받으며 실시간으로 의견을 상호 반영하는 임시 회의, 해당 사업을 이끄는 리더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운영 회의, 디자인 업무와 별개로 HR차원에서 진행되는 팀원들과의 1:1 면담 or 커피챗, 고객사에서 프로젝트 문의가 들어오면 가볍게 니즈를 체크하는 사전미팅, 보다 세부적인 고객사와 의견을 조율하거나 작업 과정 중 안내를 위한 고객사 미팅...
그야말로 회의 지옥. 더구나 에이전시나 스튜디오에서는 언제나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가 하나가 아님을 감안한다면 아득해진다.
그렇기에 가끔은 당장 진행되어야 하는 디자인 업무가 밀려있음에도... 하루에 2~3번의 회의를 소화하고 나면 이미 하루가 끝나가는 시간. 그러면 그제야 정신 차리고 디자인을 잡게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 뭐, 어쩌겠는가- 결국 늦게라도 심기일전하여 야간작업에 임할 수밖에...
아무튼 사정이 이렇다 보니, 디자인 스튜디오에서는 회의 또한 효율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디자인 에이전시/스튜디오에서의 회의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들을 풀어보려 한다.
글의 서두에서부터 '회의가 많다'는 앓는 소리로 시작했지만-
사실 이것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일 수 있긴 하다. 지금까지 내가 거쳐온 스튜디오/에이전시들을 상기해 보면 그 집단의 관리자 스타일에 따라 달랐으니까. 회의라고는 일절 없이 지정해 주는 부분만, 시키는 것만 기계처럼 디자인해야(쳐내야) 하는 곳도 많았으니까... 그러니 단적으로 모든 디자인 스튜디오나 에이전시는 회의가 많다며 일반화를 할 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구성원들과의 협업이나 함께 성장하는 것을 중요시 생각하는 곳이라면 자연스레 회의는 많을 수밖에 없으리라. 무엇보다 내가 추구하는 방식이 그렇기도 하고...
자, 어쨌거나 이 많은 회의들이 필요하고, 유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전재로 이야기를 풀어보자.
그럼, 먼저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회의는 어떤 분위기일까? 회의에서 새로운 안건을 화두에 올린 직후의 상황을 상상해 보자.
답은 둘 중 하나다.
일단 높은 확률로 회의실에 흐르는 정적. 아니면 보다 낮은 확률이지만, 불이 붙어- 회의 안건에서부터 파생된... 온갖 시답지 않은 소리들까지 1절, 2절, 3절을 지나 뇌절까지 왁자지껄하게 이어지는 경우.
그래도 두 경우 중 긍정적인 회의를 꼽아 보자면 단연 후자다. 너무도 많은 이야기와 아이디어의 홍수 속에서 옥석을 가리고,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하는 것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럼에도 훨씬 건강한 회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위의 두 가지 경우 모두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디렉터'의 역할인데...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회의는 일종의 '항해'와 같다. 각 프로젝트가 배라면 디렉터는 선장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배가 나아가야 할 곳을 명확히 제시해 주고, 비상시나 위기의 순간에도 중심을 잡아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 먼저 회의가 정적에 잠겨 진행되지 않을 경우는-
보통 회의 구성원들에게 던져진 화두가 막연하게 느껴지거나, 결정권이 없는 '내가 이런 의견을 내도 될까?' 싶은 우려, 아니면 '내가 말을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먼저 나대지 말야지.' 같은 생각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경우, 디렉터가 나서서 큰 방향성을 먼저 제시해 준다거나- 각 개별 인원들에게 하나씩 보다 작고 세부적인 단위에서부터 의견을 물어본다거나- 가볍게 참고를 위해서 드는 생각을 들어보는 식으로 발언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낮춰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물론... 그 모든 의견을 다 들어보되 결정은 디렉터가 할 것임을 공적으로 명시할 필요도 있다.
그리고 반대로- 너무 과열된 회의가 진행될 경우, 회의가 너무 논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디렉터는 항상 긴장을 곤두세우고 중심을 잡아주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프로젝트에 의욕과 욕심이 앞서는 구성원이 생길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특별히 주의를 요한다. 해당 구성원의 성향에 따라 본인의 의견이나 주장을 단순한 어필 수준을 넘어, 강하게 푸시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여기서 디렉터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의견이나 주장이 디렉터의 판단 하에 맞는 방향을 향하고 있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어긋난 방향을 향하고 있다면 단호하게 기각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역시... 이 경우는 자칫하면 서로가 감정적으로 대응하게 될 수 있는 예민한 부분이 많은 지점이라서, 회의 중 이런 지점이 발생하는 경우가 경험상 가장 어려웠다.
그렇지만 명심해야 될 사실 하나. 보통 클라이언트는 그 스튜디오에 소속된 구성원의 감각을 보고 의뢰를 하지 않는다. 해당 디자인 스튜디오의 전체적인 디자인 무드나 완성도, 결을 종합적으로 보고 컨택한다. 또한 그 결과물에 대한 책임은 해당 구성원이 져 주지 않는다. 언제나 이 모든 책임은 디렉터에게 있다.
한 번은 이런 경우가 있었다.
고객사의 프로젝트는 아니었지만... 내부적으로 새롭게 자사의 하위 브랜드 론칭을 준비하기로 결정하고, 내부 인원들과 몇 개월에 걸쳐, 기획과 브랜딩에 착수한 적이 있었는데- 해당 프로젝트에 특히 의욕적이었던 구성원이 있었다. 그 마음이 고맙고 기특하기도 했고...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실제 브랜드가 론칭된 이후에도 그 친구가 핵심 멤버로 활동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브랜드 빌딩 단계에서 내가 초기에 디렉터로써 구상했던 느낌과 조금은 결이 다르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음에도- 해당 구성원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비록 당장 완벽하게 흡족하지 않더라도 추후 함께 완성도를 높여가고, 다듬어 나갈 것을 기대하며...
그렇게 그 구성원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결과물로 시제품도 만들어보고, 패키지까지 생산하여 샘플 촬영까지 진행했다. 하지만 그 시기와 겹쳐 본 사업에서 우선순위가 높은 이슈들이 발생하며- 예정했던 론칭 시기가 조금씩 뒤로 밀렸고, 어느덧 해당 구성원의 연봉협상시기를 맞게 되었다.
누구보다 의욕과 욕심이 많았던 친구였던 만큼 회사에 기대하는 바도 많았으리라. 하지만 그 기대치만큼 맞춰 주기엔 당시 회사의 여력이 부족했고, 다른 구성원과의 형평성에도 문제가 생기리라 판단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해당 구성원과는 아쉬운 작별을 맞이했다.
어쨌거나 그렇게- 정신없는 일정 속에서 작별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 한채, 우선순위가 높은 이슈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그리고 다시 한시름을 돌릴 여력이 생겼을 때 다시 열어본 자사 하위 브랜드 론칭 프로젝트.
그 프로젝트를 다시 훑어보던 나는 진한 현타를 맞이했다.
하나씩 다시 뜯어보았을 때 이대로 론칭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 해당 프로젝트는 지금까지도 홀딩 상태... 디렉터로써 결정과 책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고, 배우게 된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