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디자이너는 도태될 것이라는 생각에 대하여
너무 오랜만에 들어온 브런치.
브런치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뭐라도 끄적여보자는 마음으로 글쓰기에 임했기에 이 글의 끝이 어디로 갈지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최근, 아니 불과 하루 전에 겪은... 개인적으로 꽤 충격이 컸던 대화를 계기로, 스스로의 생각도 정리해 볼 겸 이번 글을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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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은 어제.
"OPEN AI에서 발표한 SORA 혹시 보셨나요?"
이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그 말에 나 또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AI 기술에 대한 경이와 놀라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가볍게 시작한 대화였으나, 대화가 이어질수록 대화를 주고받던 상대의 결론이 어째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감을 느꼈다. 그 대화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결국 디자인이라는 이 산업분야는 곧 AI로 대체될 것이며, 그렇기에 이 비즈니스 모델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는 이야기.
물론 해당 대화상대는 따지자면... 디자이너가 아니었지만- 밀접한 연관성이 있고,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비즈니스 측면에서 리스펙 하던... 가장 가까운 지인(?) 중 하나였기에 그의 말과 태도는 나에게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디자이너가 아닌 일반인들의 시선에서 현시대를 어떻게 보고, 느끼는지 피부로 실감하게 되었다.
잠깐 개인적인 근황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최근- 현재 출시된 여러 AI툴들을 유료 결제까지 하며 이것저것 만들어보고, 공부/연구를 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놀라운 결과물에 감탄하며 이를 어찌 더 잘 써먹을 수 있을지를 연구하던 중.
그렇기에 위와 같은 대화에서 해당 툴들을 실제로 써보며 느낀 한계와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가치에 대해 피력하며 다양한 반론을 제기했으나... 그 모든 반론에 허탈한 미소와 함께 '아직은.'이라는 말만 던지던 모습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어, 해당 대화를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 제가 실제로 써보니, 아트워크 자체는 훌륭하게 나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목적한 바에 핏한 결과물은 생성형 AI만으로는 불가능하더라고요. 그렇기에 디자이너는 그 이격을 좁혀주는 역할로써 분명한 포지션이 시장에...
- 아직은. 아직은 그럴 뿐이죠. 1달, 2달? 1년 후, 5년 후를 생각했을 때... 글쎄요. 그 마저도 금방 메워질 거라 봐요.
- 디자인이 단지 퀄리티 높은 시각물을 뽑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동의하시잖아요?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 목표하는 타깃의 성향 등 모든 걸 다각적으로 고려해서 시각적 전략을 잡아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인데... 생성형 AI가 그 부분까지는...
- 아직은. 그것도 아직 그럴 뿐이에요.
- 뭐, 그럼 말씀대로 그 모든 영역을 AI가 대체한다고 하더라도- 그 AI툴 자체를 다룰 사람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AI에게 필요한 부분을 설명하고, 명령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거죠. 저는 AI가 디자이너의 표현방식을 더 풍성하게 해주는 일종의 툴이 늘어났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그런 결과물을 더 조화롭고 매끄럽게 디렉션을 주는 역할이 디자이너의 지향점 아닐까요.
- 글쎄요. 저는 직접 해보니, 얼마든지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 가능해서- 그 부분이 경쟁력이 있을까 싶네요. 최종적으론 이 업계의 최상위 0. 몇% 정도만이 디렉터로써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겠죠.
- 음... 그럼 이렇게 생각해 봐요. 현재 웹사이트를 만들고자 하면 웹코딩을 몰라도 웹사이트를 제작할 수 있게 해주는 많은 서비스들이 넘쳐나지만, 사람들은 그 서비스들조차도 어렵게 느끼며 잘 이용하지 않고, 하더라도 시각적으로 조화로운 결과물을 만들 수 없어서 결국 디자인 의뢰를 하지 않던가요? 저는 같은 맥락에서 AI를 보고 있어요.
- 네. 맞는 말씀이죠. 그렇기는 하지만 역시- 그런 서비스들이 시장에 나와 있기에 웹사이트를 직접 만드시는 분들도 분명 많아지기는 하지 않았나요?
- 뭐, 그런 분들도 분명 있으시긴 하죠.
- 그 부분이에요. 결국 비즈니스는 모수의 싸움입니다. 결국 모수가 줄어들면 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이미 결론을 내려버린 상대에게 그 이상 반론을 길게 이어봐야 결국 언쟁으로 이어질 뿐이라 생각하여 대화는 그것으로 마무리하였다. 그는 그 대화를 통해 나에게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시대가 이렇게 되었으니 AI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지금이라도 빨리 다른 살길을 찾으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까.
물론, 그 조차도 혼란스럽고 충격적인 현실에 정리되지 않은 심정을 편하게 던졌을 뿐이라는 부분을 이해하며,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이 디자인 관련 업에 발을 담그며 느끼는 불안감도 이해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 비관적인 시각에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관점이 맞는 부분도 분명히 있는 것도 사실. 나 또한, 분명 AI로 인하여 이 산업의 구조가 지금까지와 매우 다른 모습으로 변할 것이라는 부분에 충분히 동의하는 바이기에- 모든 디자이너는 지금, 경각심을 가지고 AI라는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고, 연구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진짜 디자이너'라면 이 시대를 대하고 받아들이는 '디자이너 다운'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 나는 디자이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는 디자이너로써 지향점의 문제,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고 그런- 단순 아트워크 위주의 콘텐츠, 스톡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지향점인 디자이너라면 현시대는 엄청난 위기임은 맞으리라. 하지만 나의, 우리의 지향점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닌 것을... 기술이 얼마나 어떻게 발전하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얼마나 '잘' 하는가에 있다. 같은 AI를 활용하더라도 누가 더 잘 사용하는가.
누구나 요리를 하지만 누구나 요리사/셰프가 될 수 없다.
누구나 뛸 수 있지만 누구나 마라토너가 될 수 없다.
누구나 글을 쓰지만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AI를 다룰 수 있겠지만 누구나 디자이너가 될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명확하지 않은가.
나는, 아니 우리는 그 누구나보다는 분명 더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있다.
시장의 규모는 현재보다 일부 쪼그라들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지점은 그 쪼그라들고 사라져 버릴 위치에 있지 않다. 그리고 대체 언제 디자인 산업이 타 산업 대비 경쟁력 있는 분야였던가? 단 한 번도 그래왔던 역사가 없다. 애초에 그런 관점으로 삶을 살았다면 우리는 디자인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른 공부를 하거나 장사를 했겠지.
이 업계의 최상위 몇몇만이 명맥을 유지할 것이다? 그럼 왜 우리가 그 최상위 몇몇이 되고자 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이런 비관론에 빠지면 끝이 없다. 곧 배고플 텐데 왜 먹고, 언젠가 죽을 텐데 왜 사는가. 이와 같은 논리로 따지면 인간이 하는 일에서 기계와 AI가 대체하지 못할 영역이 비단 디자인뿐인가? 현재 인간이 하는 일의 90% 이상은 대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디자이너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비관론. 전문가가 아니기에 전문가의 영역을 가치절하하여 판단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들.
그렇기에 나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디자이너로써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뭐가 얼마나 발전했다 하더라도 내가...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너다.
이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 이런 자신감도 없으면 안 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