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월동 준비를 위해 뒷마당을 정리했다. 한 해 동안 우리 가족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던 상추, 고추, 깻잎, 가지들도 뽑아주었다. 텃밭은 제철의 마지막 숨을 고르듯 고요했고, 가장자리에 남아있던 부추꽃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 하얗게 피어 있던 부추꽃은 어느새 씨앗을 가득 품은 체 말라 있었다. 그 모습이 할 일을 다 끝내고 느긋하게 자신의 시간을 즐기는 듯 여유로워 보였다. 식탁 위에서 부추가 보여주던 '쓸모'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요즈음 새로운 소재로 소품을 만들고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멈췄다. '이것으로 뭘 만들 수 있을까?' 여러 상상을 하며 바라보았다. 일단 씨앗은 채종하고 꽃대를 잘라 작업실 책상 위에 놓으니, 늦가을의 분위기가 고즈넉하다.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가을꽃과 작은 솔방울을 더했더니 빈티지한 가을 리스로 완성되었다.
인스타에 올리자 “이런 재료로 리스가 가능하냐”며 신기하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식재료로만 알고 있던 부추꽃이 이렇게 새로운 소재로 활용되다니. 나 역시 생각하지 못했던 터였다. 생명을 끝난 것 같았던 부추꽃이 다시 쓰이며 이렇듯 기쁨을 준다.
그러고 보면 나는 오랜 시간 '쓸모'라는 기준에 익숙해져 있었다. 분명한 목적이 없거나 특별한 결과가 보이지 않으면 시간 낭비 같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일에서도 관계에서도 쓸모와 효율을 우선으로 삼았다. 성취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시절이니 그럴 수 있겠지만, 돌아보면 늘 마음이 바쁘고 여유롭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당연히 부추처럼 그만의 역할만 떠올리고 그저 바라보는 일은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는 이런 ‘쓸모’의 기준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독립하고 일에서 한 발 물러서게 되면서, 비로소 느린 시간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예전 같으면 단번에 버렸을 것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고, 이미 끝났다고 여겼던 순간도 조금 남겨두게 되었다. 정원의 잎을 쓸어 담고, 말린 가지를 모으고, 꽃대를 바라보는 일. 겉으로 보기엔 쓸모없어 보이는 시간도 일상에 숨결을 불어넣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중이었다. 이런 변화들을 느끼던 순간, 문득 떠오른 문장이 있었다.
얼마 전 읽었던 스벤 브링크만의 『쓸모를 증명하지 않은 삶에 관하여 』에서의 한 글귀였다.
"쓸모없는 것이란 우리가 다른 것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쓸모없는 활동에 시간을 쓰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쓸모없는 활동이야말로 삶의 진짜 의미를 되찾아주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성장과 자기 계발이라는 명목하에 할 일 없이 보내는 상황을 죄악시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을 쓰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저자의 말은 큰 안도감을 주었다.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삶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는 것을 확인했달까. 쓸모를 다한 부추꾳이 가을 감성 가득한 소품으로 변신하듯 말이다.
완성된 리스를 벽에 걸어두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쓸모’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을 판단했지만, 그렇게 증명하지 않아도 꽤 괜찮은 일들이 많다는 걸 알려주는 듯하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도 쓰임을 잃어가는 게 아니라, 쓰임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한 번의 계절을 끝낸 부추꽃은 처음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서 있다. 맡은 역할은 끝났지만, 더 멋진 모습으로. 쓸모없음의 '쓸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