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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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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현 Jul 03. 2024

그만큼 좋아해서

좋아하는 건 항상 있었다만..


초등학생 때는 종이접기가 좋았다. 6학년때까지 꿈은 종이접기 작가였다. 장난이 아니라 진짜루..

'오리가미'

종이 한 장을 자르거나 이어 붙이지 않고 요리조리 접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종이접기의 일본 말이다. 그렇다. 나는 '오리가미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다. 엄마랑 머리를 맞대고 몇 시간에 걸쳐서 완성한 종이학이 시작이었다. 그렇게 종이접기 책을 하나 둘 사서 모았다. 부모님이랑 서점에 가면 아빠는 항상 신앙서적 코너로, 엄마는 내가 곧 풀어야 할 학습지 코너로, 나는 항상 종이접기 코너로 향했다.


토끼나 거북이, 개구리 따위나 접다가 끝날 줄 알았던 초등학교 1학년의 취미생활은 시간이 갈수록 매니악해졌다. 등교 전 가방을 챙길 때면 교과서보다 색종이를 먼저 챙겼다. 자습 시간에는 몰래몰래 종이를 접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해외 유명한 종이접기 작가들의 작품을 구경했다.

처음에는 15cm짜리 색종이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별별 종이를 다 사들였다. 한지, 포장지,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것들의 종이들을 사서 모았다. 그 또래 남자애들이 다 환장했던 드래곤이나 공룡 같은 것들을 접어서는 학교로 가져갔다. 쉬는 시간마다 내 책상은 작은 갤러리가 되었고, 본인 생일선물로 원하는 것을 접어달라는 부탁도 받았다. 돈 안 들이고 가성비 좋게 퉁친 샘이다.


언젠가는 10만 원짜리 종이접기 책을 사달라고 부모님께 떼를 썼다. 당연히 씨알도 안 먹힌 줄로 알았지만, 한 달 즈음 지나서였을까,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엄마는 오늘 할 일을 다 끝내면 선물을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늘 루틴처럼 지켜오던 '하교 후 닌텐도 30분'을 마다하고 선물이라는 것이 뭘까 기대하며 무아지경으로 학교 숙제와 학습지를 풀었다. 마지막 수학문제를 다 풀어 갈 때 즈음 엄마는 냉장고 위에 숨겨두었던 크고 납작한 택배상자를 나에게 건넸다. 10만 원짜리 종이접기 책이었다. 그 유명한 카미야 사토시 선생님의 신곡철사. 나도 꼭 유명한 오리가미 대가가 되어서 부모님께 대저택을 지어주겠다고 넙죽 절을 했다.


공부는 뒷전이고 방에 틀어박혀 종이만 접는 아들 모습에 이러다가 정말로 '오리가미 아티스트'가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오리가미 아티스트가 되었는데 대저택은 고사하고 대학이나 갈 수 있을는지, 부모님은 알게 모르게 속이 타들어갔을 지도 모르겠다. 종이접기로는 모자라서 이제는 용돈을 받는 족족 건담 프라모델을 사모으고 있는 꼴에, 부모님은 그때부터 나를 '돈 쓰는 기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 아들에게 나가서 뭐라도 배워오라고 손에 쥐어준 것은 기타였다. 억하심정으로 일요일마다 교회 집사님께 기타를 배웠다. '나비야'부터 '독도는 우리 땅, 김광석의 '일어나' 같은 쉬운 노래를 배웠다.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 선배가 기타 치는 모습을 보고서는 속으로 '개멋지다'고 생각했다. 무심한 듯 피크를 손에 쥐고 지판과 몸판 사이를 오고 가며 현란하게 연주한 곡은 버스커버스커의 '막걸리나'였다. 그 뒤로 오리가미 아티스트의 꿈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기타만 쳤다. '막걸리나'를 완벽하게 치겠다는 마음으로,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를 완곡하겠다는 마음으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게 재미있어졌다. 손에 굳은살이 붙고 떨어지고를 스물다섯 번 정도 반복했을 즈음에 나는 막걸리나를 비롯해 버스커버스커의 거의 모든 곡을 완벽하게 칠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덕분에 좋아하던 누나도 꼬셨다. 공부는 여전히 뒷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나와 동생을 찍은 영상을 마구잡이로 업로드한 유튜브 계정이 친구들에게 유출되면서 '오빠와 여운'(여운은 동생 이름이다)이라는 제목의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 커버영상은 고등학교 졸업식 때까지 나를 괴롭혔다. 나는 그런 영상이 있는 줄도 몰랐다. 누가 그 영상을 졸업식날 사람들 다 모인 강당에서 틀 생각을 했을까... 간지럽히듯 청량한 권정열의 목소리는 홍대 버스커들의 전설로 남겠지만, 진안군 부귀면 잠동길 자칭 포크 뮤지션 박시현의 목소리는 여름밤 귓가에 모기 같은 '앵앵 사운드'였다. 의도치 않게 자기 객관화를 한 샘이다. 뮤지션이 되어서 대저택을 지어드릴 계획이었는데 곤란하게 되었다고 졸업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엄마 아빠한테 말했다.


24살의 박시현은 종이접기를 하지 않는다. 자취방에 들여놓은 기타는 먼지가 수북이 쌓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떼 묻지 않은 마음으로 마냥 좋아서 했던 것들은 점차 사라지는 것만 같다. 세상 물 잔뜩 머금은 20대의 중턱에서 내가 취미라고 할 수 있는 건 라면에 계란 두 개 넣어먹기, 열심히 모은 알바비로 20만 원짜리 신발 사기, 읽지도 않을 책 쌓아놓기, 비싼 커피 마시기, 넷플릭스랑 왓챠 결제하고 한 달에 영화 한 편 보기...라고 할 수 있겠다. 취향은 종잇장처럼 가볍고, 취미에는 너무 많은 이유를 붙이는 나를 발견했다. 남이 하거나, 좋아 보이거나, 도서관 대각선 방향에 앉은 여자한테 잘 보이고 싶다거나.. 세상의 속도에 뒤지지 않으려고 온갖 애를 써가며 의미 없는 '좋아요'를 외치는 못난 어른이 된 것만 같아 한때는 오리가미 아티스트였던, 앵앵 보이스를 가진 뮤지션이었던 어린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세상이 원하는 방향과 모양에 맞춰서 나다움을 찾으려 한 아이러니가 부끄러운 것이다.


이따금씩 아빠는 빵을 굽는다. 오후 내 저녁이 될 때까지 작은 오븐으로 머핀이나 파운드 케이크, 파이를 굽는다. 교회 가져가서 교인들 나눠줄 거라고, 포장까지 정성스레 해서는 두 손 가득 빵봉다리를 들고 일요일 아침에 집을 나선다. 아빠는 그렇게 시간이 날 때면 빵을 굽는다. 아주 가끔씩 차를 몰고 강가로 나가 카약을 탄다. 요즘에는 여유가 없다며 아쉬운 소리를 내시곤 한다. 아빠의 차분하고 단정한 취미생활을 보고 있자니, 뭐가 그리 바쁘고 산만하게 '막무가내식 취향 넓히기'를 하는 내가 참 피곤하게 산다고 생각했다.


오리가미 아티스트가 되어서 부모님 대저택을 지어드리거나,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 커버 영상으로 일약 유튜브 스타가 되지는 못했지만, 무언가에 파묻혀 순수하게 좋아했던 마음만큼은 희미해져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팍팍한 오늘내일을 보내다가도 지난날의 기억을 들춰내며 때때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거나, 요상한 종이접기를 하는 어른으로 늙었으면 좋겠다. 사뿐히 글로 적어내며 조심스레 마음에 틈을 내어본다. 구태여 '왜'라고 질문하지 않는 마음으로, 오롯이 내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포개어내듯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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