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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현 Jul 17. 2024

바쁜 척 그만하고 나 좀 고쳐줘요

데몰리션

데이비스의 아내는 교통사고로 죽는다. 그러나 그는 슬퍼하지 않는다.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고 당일 밤, 그는 태연하게 구두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병원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꺼내 먹기 위해 동전을 넣는다. 그러나 나오지 않는 초콜릿. 그는 병원 직원에게 문의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병원 소유가 아니니, 자판기 회사에 문의하세요

그 뒤로 그는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챔피언 자판기 회사 고객센터로. 본인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자판기가 돈만 먹고 초콜릿은 뱉어내지 않았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내가 죽었는데 슬프지 않다는 것, 아내의 아버지는 증권사 대표인데 그녀와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친족등용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비교적 쉬운 인생이라는 것, 아내가 죽은 뒤로 전엔 못 보던 것들이 눈에 뜨기 시작했다는 것... 편지는 점차 그의 마음을 들춰내고 꽁꽁 감춰진 슬픔의 실마리를 찾아내기 시작한다.

편지를 쓰면서 데이비스는 무언가에 사로잡힌다. 본인을 둘러싼 모든 것을 허물고, 분해한다. 아내가 고쳐달라고 했던 냉장고부터, 에러가 발생한 사무실 컴퓨터, 끼익 끼익 소리가 나는 화장실 칸막이 문, 아내 이름으로 배송된 카푸치노 머신까지 모조리 분해한다. 모든 것을 부수고 분해하며 그 안에 감추인 것이 무엇일는지,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 필사적으로 찾아내기를 시도한다. 마치 그가 편지를 쓰면서 마음 구석구석을 종이 위에 끄집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에게는 반드시 찾아내야만 하는 슬픔이 있었다.

그렇게 그는 슬픔을 좇으면서, 삶을 통째로 분해하면서 점차 새로운 것들을 보기 시작한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상실은 그의 일상에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고 그로 하여금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모든 것이 은유가 되었네요

데이비스는 계속해서 죽은 아내의 잔상과 마주한다. 아내와 나눴던 대화, 사고가 나기 전 아내가 보인 표정, 아내를 처음 만난 파티장에서의 장면들이 반복재생된다. 어느 날 자판기 고객센터 직원 캐런과 함께 바다를 보러 갔을 때, 그는 캐런을 통해 죽은 아내를 투영한다. 불현듯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그가 그토록 찾던 슬픔이었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해

그는 좀체 웃음기 없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숫자와 이성으로 판단하고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킨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쌓아온 삶은 견고해 보이지만 위태로웠다. 그의 마음속에는 도처에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외로움이 새어 나오지 못하게 설계한 일상은 감히 미소가 새어 들어갈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아내가 죽으면서 삶과 상실의 낙차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스스로 아내를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고 되뇐다. 그는 그렇게 서서히 고장이 났다. 아내가 고쳐달라고 말하던, 물이 새는 냉장고처럼. '무엇이 문제일까?' '아내가 죽었는데 왜 슬퍼할 수 없는 거지?' 겉으로는 아무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는 그였지만, 감추인 내면 깊은 곳에서는 아내를 그리워하는 슬픈 마음이 파편처럼 흩어져있었다.

마침내 그가 모든 것을 분해했을 때,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게 되었을 때, 데이비스는 웃는다. 입꼬리에 스미는 미소와 함께 슬픔이 그의 마음 구석구석을 흥건하게 적신다. 비로소 아내의 잔상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무척이나, 아주 많이 아내를 사랑했다.

자꾸 어릴 때 생각이 나요

아플 때 엄마 무릎을 베고 누우면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주셨죠
 
제 눈꺼풀에 뽀뽀해 주시고 그럼 다 괜찮아졌어요

다시 하긴 너무 늦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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