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금요일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 주는 어떻게든 글을 써보려고 노력을 했는데, 과연 마음만큼 잘 되지는 않더군요. 아마 지금껏 글을 쓸 때마다, 나를 쓸 때마다, 스스로와 주고받는 대화가 분명히 있었는데, 이번 주는, 지난 한 달은 통 스스로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한쪽이 마음이 상해버린 건지, 원인 모를 것에 겁에 질려버렸는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군요. 어느 쪽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에 나는 나뿐이니까요, 여하튼 제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까, 어떤 마음으로 적어낼까 고민을 거듭하다, 편지를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글을 쓰노라면 한결 동그랗고,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거든요. 겨우 피워낸 심지를 금세 꺼뜨리지 않으려 노심초사 한 자 한 자 적어보렵니다.
개강을 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저는 수업도 듣고, 도서관도 다니고, 일도 열심히 하고, 교회도 열심히 출석합니다. 꽤나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이라고 느껴지긴 했으나, 지나가는 하루하루 만큼은 눈코뜰 새 없이 바빴던 것 같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탓이었을까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매일이 만족스럽지가 않았습니다. 3년을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삶을 겪었는데, 이렇게 놓고 보니 학교를 다닌 햇수보다, 학교를 비운 햇수가 더 길어진 것이 되었네요. 시간은 이렇게나 빠르게, 나도 모르는 새 흘러가는 가 봅니다.
그동안 저는 계속해서 일을 해왔습니다. 일이라고 하면 옷을 팔았고, 커피를 만들었습니다. 영화도 많이 보고, 책도 열심히 읽었네요. 하기야 책 한 줄도 읽기를 싫어하던 사람이 이제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며 툴툴거린다면 분명 책을 좋아하려 부단한 노력을 이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학교로 돌아와 보니, 그간의 경험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원하지 않는 과목의 공부를 하고 있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방을 나눠 쓰고, 남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오래간만에 숙제도 해보는 중입니다. 갑자기 일상이 단조로워진 것입니다. 아, 단조롭다기보다는 스스로를 방목하며 넓은 뜰 안에서 쉬게 한 지난 세월들과는 다르게 삶의 반경이, 발을 내딛을 수 있는 지경이 한 층 좁아진 기분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그간의 관성이 있어 무리하게 아르바이트를 구해버린 탓에, 학교와 학교가 아닌 삶의 경계에 양 쪽 발을 담그고 있는 나는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마치 한쪽 발은 냉탕에, 다른 발은 온탕에 담가놓은 셈이지요. 이런 느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저는 여전히 옷가게에서 옷을 팔고, 커피숍에서 커피를 팔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로 돌아왔지요. 돌아오고야 말았습니다. 돌아와 버렸다고 해서 애당초 돌아오지 말아야겠다는 계획이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것에 이질감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은 단체로 맞춘 옷을 입고, 연인들은 팔짱을 낀 채로 학교 구석을 배회하고, 도서관에는 자주 갈수록 눈에 익는 얼굴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는 신분을, 학생이라는 명찰을 마음에 세기고선 몇 년의 정해진 시간을 학교에서 보냅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니 저도 학생이라는 신분에 놓여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막상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이유가 참 이상합니다만, 옷을 팔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버스에 몸을 싣고, 매장에 도착하면 네, 다섯, 여섯 시간 정도 일을 하는데 퇴근을 하고 기숙사로 돌아오니 자정에 가까운 시간입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입니다. 늦은 저녁을 먹고, 기숙사 복도의 작은 소파에 몸을 기대어 자판을 두드립니다. 자고 있는 룸메이트를 깨우지 않고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하고, 일기를 써야겠지요.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번주는 일기를 하루도 쓰지 못했군요.
여하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전하고 싶은 마음은, 마음이 퍽 불안하다는 겁니다. 일을 하는 관성, 가난해지고 싶지 않은 관성, 글쓰기를 멈추고 싶지 않은 관성, 읽고 싶은 책에 묻혀 지내고 싶지 않은 관성, 나를 방목한 관성에서 그만 브레이크를 밟는 일. 크게 나가떨어져서 이곳저곳에 멍이 들더라도 잠시, 그만, 다시금 삶을 가다듬어야겠다는 다짐, 혹은 체념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왔으니, 학생의 때에만 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지라는 다그침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되겠지만요. 이러한 스스로와의 싸움 속에서 어떻게든 지게 되어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주어진 상황에 때로는 굴복하며 할 수 있는 일, 할 수 있는 일이라 하면 내 능력과 체력 안에서, 쌓아온 경험과 관계 속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까지 나뒹굴고 있는 나를 애써서 바라보자니 마음이 퍽 좋진 않습니다. 여전히 불안하구요. 어디에도 소속되어있지 않다는 점은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는 제게 있어서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잠시나마, 그리고 이렇게 적어나가는 문장마저도 임시방편으로 찔러 넣는 진통제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쓰는 대로 살아가겠다고 굳게 믿었는데, 손이 가는 길과 삶이 쓰는 글은 사뭇 다르더군요. 그 후로는 글을 쓰는 저 스스로도 쉽사리 믿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글을 읽어주는 당신이라면, 저는 당신을 믿고 몇 자 더 적어낼 용기가 생기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만,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어떻게 스스로를 털어놓아야 할지 영 떠오르지 않아, 감추인 치부를, 어쩌면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저의 곪은 마음을 그저 적어내렵니다. 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날들의 연속입니다. 일을 하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나아갈 길을 계획하는 것도, 막연한 마음에 알게 모르게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중인데, 제가 과연 남들의 조언이나 위로마저도 곧바로 받아들일 마음밭일까 하는 생각에 편치는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이럴 때만 신을 찾는 저의 모습이 퍽 못났다고 생각하는 밤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힘든 시간을 보낼 때일수록 '오히려 좋다'라고 외치자고 하는군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미약함을 인정하라고 하더군요. 마음깨나 위로가 되는 말이었습니다. 그 덕에 오늘 밤도 무사히 잠에 들 수 있겠어요.
여전히 마음은 불안하고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만, 차근차근 다시 쌓아 올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밤입니다. 이럴 때면 얼마 남지 않은, 자주 만나지 못하는, 어쩌면 다소 어색한 대학교 친구들을 떠올립니다. 저는 시간이 무색하게 놀다 지쳐 돌아왔는데, 친구들은 저마다 방향을 정하고 나아갈 길로 열심히, 굳세게 발걸음을 내딛는 중이더군요. 부럽다는 생각을 하다, 나와는 걸어온 시간의 속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나도 빠르게 마음을 고쳐먹어야지 다짐을 합니다. 지나온 경험은, 지나친 시간은 세월이 무성하다며 마음에 고이 간직한 채,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학생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하여 하나 둘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뭐든 다 잘할 수 있는 황새가 아닌, 겨우겨우 살아가는 뱁새였음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글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혹여나 읽으시다가 지루해 그만 덮어버리시는 건 아닌지, 눈을 감고 고개를 휘저으시는 건 아닌지, 퍽 미안한 마음이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까지 앍어주신 분들께, 시간의 무던함을 걷고 계신 분들께,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계시는 분들께, 제가 한심하다며 이해할 수 없는 눈빛을 보내주실 분들께, 편지를 시작할 때 안부를 묻는 것이 당연한 예의인데 모쪼록 잘 지내시냐는 물음에 대답을 바라진 않겠습니다. 제게 또한 물어봐주신다면 저도 대답은 마음에 고이 담아두었다 정말 잘 지낸다며 미소 지을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한번 편지하겠습니다. 그때는 저도 잘 지내시냐는 안부인사로 편지를 시작하겠습니다. 좋아하는 문장을 끝으로 물러나려 합니다. 요새는 책을 통 읽지 못해서 여러 번 써먹은 적이 많더라도 이해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림자 없는 햇빛이란 없기에 밤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시지프 신화
박시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