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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미소를 위해

<리디아의 정원>에 나오는 리디아에게

by 민혜숙

친구 : 아, 앞으로 찬란한 5월의 봄을 얼마나 볼 수 있을까?

나 :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어르신이 하던 말과 똑같은 말인데?

친구 : 평균수명과 여행할 수 있는 튼튼한 다리 수명은 다르지.

나 : 앞으로 5월엔 무조건 여행을 떠나야겠다!


친구는 여행을 사랑한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가고 싶어 해서 나를 놀라게 한다. 그녀 때문에 캐나다 로키산맥 자락에 있는 밴프, 이탈리아 알프스산맥 자락에 있는 돌로미티, 단풍이 아름답다는 캐나다의 퀘백지역을 죽기 전에 가봐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북미지역이나 유럽은 많은 사람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인데 남아메리카까지 가겠다는 그녀의 선언에 나는 깜짝 놀랐다. 스페인어 공부도 시작했고, 3명의 여인들이 남미를 여행한 책을 읽으며 여정을 살피고 있으며, 2달 정도는 머물러야 남미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하면서 꿈꾸는 사람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꿈도 못 꿀 일이다. 2주도 긴 여정인데 2달이라니! 비용도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워낙 먼 곳이니까. 그런데 남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녀의 얼굴엔 5월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는 도대체 여행을 왜 하는 것일까? 나도 친구 못지않게 여행을 늘 떠나고 싶어 한다. 좀 이기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반 은퇴 상태인 남편이 여행안내자, 사진사, 가족 역사 기록자로서 유튜버로 태어난 덕에 느슨한 여정의 여행을 할 수 있어서 그렇기도 하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아마도 여행을 떠나기 전 설레는 마음에 가족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미소를 때문이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타자의 미소를 찾는 이유는 아마도 그 미소로 인해 내가 즐거워지기 때문인 것 같다. 내 행복은 타인의 행복에 굳건히 연결되어 있다.


8월 말에 가족과 함께 발리에 가서 4박을 지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내 마음에 큰 울림을 준 이유를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대자연과 바다와 함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미소 때문인 것 같다. 호텔에 들어가 체크인할 때 만난 프런트에서 일하고 있던 젊은 여성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있었다. 합장하고 목을 숙여 인사도 해주었다. 이렇게 미소가 아름다운 젊은 남성과 여성이 호텔에는 가득했다. 즐겁게 휴가를 즐기는 투숙객들과 직원들 모두 밝은 얼굴이었다.


호텔은 3성급이라 호화로운 곳도 아니었지만, 직원들이 나에게 보여준 정중한 태도는 내가 고객으로서 또 사람으로서 잘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호텔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가져다줄 때도 미소를 지으며 ‘여기 당신의 커피가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라는 말과 함께 테이블 위에 놓아 주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녀와 눈을 맞추며 그녀의 미소에 감동했다. 키오스크에서 주문하고 진동벨이 울리면 뛰어가서 받아오는 커피와 전혀 다른 맛이었다. 만족감으로 꽉 찬 내 머리는 찬란한 발리의 아침 햇살로 더욱 신이 나서 이 커피가 내 인생 커피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다시 발리에 오고 싶다는 느낌과 함께.


이런 미소에 대한 생각은 대학원 수업에서 배운 철학자 엠마뉘엘 레비나스의 얼굴에 대한 논의를 떠오르게 했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le visage de l’Autre) 단순한 외형적 모습이 아니라, 타자가 나에게 드러나는 근원적 방식이라고 말한다. 타자의 존재 그 자체라는 뜻이다. 얼굴은 나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것”이며, 나를 향해 말을 걸고 '윤리적 요청'을 던지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나는 아마도 이러한 윤리적 요청을 미소에서 발견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 같다.


버릇처럼 타인을 처음 만났을 때 얼굴을 보고 그의 얼굴에 웃음이 있는지 살필 때가 많다. 딸아이가 사는 서울 한복판에 젊은 처자들이 많은 카페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주인장이 친절한 목소리로 맞이했지만 주문할 때 그의 얼굴을 찬찬히 보니 얼굴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럴 때 나는 마음이 괴롭다. 이렇게 예쁜 꽃처럼 피어난 처자들이 가득한 카페에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과 커피 향이 나는 이 장소에서 얼굴이 굳어져 있다니 저분의 마음에는 무슨 근심과 돌덩이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조금만 더 웃으시면 손님이 더 많이 오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피할 수 없다. 계산대로 가서 딸이 맛있다고 칭찬하여 먹게 된 카눌레라는 디저트가 너무 맛있으니 두 개 더 가지고 가겠다고 해도 여전히 미소는 피어나지 않는다. 포장하는 손길이 야무지고 카눌레를 구운 향기는 내 코를 간질이는 데 주인장 얼굴은 카눌레 주름처럼 펴지지 않는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레비나스의 ‘얼굴의 철학’에서 사람은 타자 앞에서 무한히 책임을 지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 책임은 계약이나 합의 이전에 주어진 것이라며 타자의 얼굴에서 무한의 흔적, 즉 신의 흔적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존재론보다 윤리학이 먼저라는 명제로 타자 지향적인 세계관을 주장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든 모든 인간이 존엄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뜻일 터이다. 레비나스를 몰라도 엄마는 태어난 아가의 미소를 보기 위해 헌신하고 선생님은 뭔가를 알았다는 ‘아하’의 순간에 보이는 아이들의 환한 얼굴을 위해 일한다. 아빠는 토끼 같은 자식들이 웃어대는 모습에 힘을 얻어 일터에 나간다. 성직자는 신자들의 미소로, 의료인들은 환자의 미소로 고된 일을 감당한다.


우연히 발견하여 그림책 모임에서 읽은 <리디아의 정원>에 나오는 리디아 역시 절대 웃지 않으시는 외삼촌을 위해 열심히 꽃을 가꾼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모두 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 가난한 사람들의 집 창문가에 피어난 꽃으로 내리비치는 햇빛을 리디아는 발견하고 작은 정원의 꿈을 꾼다. 완전히 난장판이 된 건물의 옥상을 비밀리에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정원으로 탈바꿈시키고 외삼촌을 초대하던 날, 외삼촌은 여전히 웃고 있지는 않지만 ‘천 개의 미소와 같은’ 꽃으로 장식된 케익을 리디아에게 선물한다.


리디아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외삼촌 댁에 가서 살면서 외삼촌의 빵 가게 일을 돕는다. 부모를 떠나 낯선 곳에 와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들 텐데 리디아는 너무나 용감했다. 절대 웃지 않는 외삼촌을 웃게 하고 싶은 이 소녀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적 책임을 완수한 천사였다. 철학은 꽃이라는 도구로 정원이라는 생명이 자라나는 장소로 완성되었다. 굳은 얼굴에 꽃으로 미소를 그리는 소녀.


이 책의 마지막 그림에서 코끝이 찡하며 눈물이 나왔다. 아버지가 직업을 구해서 이제 집으로 돌아가게 된 리디아를 꼭 안아주시는 외삼촌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조카를 꼭 안으며 이별을 아쉬워하는 외삼촌은 얼굴은 눈물을 참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그런지 거의 모든 그림책 마지막 부분에서 울컥한다.


문학, 철학, 신학,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 책을 읽어서 머리만 커지면 뭐하나. 리디아처럼 꽃을 심고 사랑하고 사람들의 얼굴에 꽃을 피우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림책을 읽으면 윤리적 요청을 받곤 한다. 그 요청에 응답하는 것은 나에게 행복을 줄 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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