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혜숙 Jun 12. 2024

노화감속직업 과외업

학생들에게 감사를!

민희: 쌤, 요즘 제가 잠을 못 자요.

나 : 우리 민희는 하루 9시간을 자야 하는데 어쩐 일이냐?

민희 : 어느 고등학교에 가야 할지 고민이 많아서요.

나 : 고민이 있으면 표를 만들어 봐!     


  올해는 유난히 중3 학생이 많다. 7명의 여학생들이 고등학교 진학 사전조사를 마치고 나더니, 어느 고등학교에 갈지 선택을 놓고 고민 중이라고 한다. 우리 동네 학교인가 옆 동네 학교인가, 남녀공학인가 여학교인가, 내신이 빡쎈가 아닌가, 기숙사에 살 것인가 집에서 통학할 것인가와 같은 주요한 문제에서 교복이 예쁜가, 급식이 맛있는가, 학교 시설이 좋은가, 선생님들이 수업에 열정적인가 등등을 놓고 고민이 많다. 여학생 중에 특히 민희는 전교 회장이라 그런지 의사소통 능력이 출중해서 나에게 자기감정을 잘 표현한다. 어느 고등학교가 좋을까 고민 중이라고 같이 공부하는 나머지 친구들과 토의를 하고 싶어 했다. 이런 민희의 태도를 보고 그룹의 리더가 되면 좋겠다라고 했더니 자기는 CEO가 딱 맞는 MBTI가 결과가 나왔다고 하면서 뭔가 나에게 사람 보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는 놀란 눈길을 보내주었다.     


  아이들이 나의 내공을 알아주는 순간이 오면 도파민 분비가 높아진다. 아마도 도박장에서 대박을 내는 순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상승 모드에 접어 들고나서 나는 아이들에게 표를 그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모든 것을 정량화할 수는 없지만 나는 화이트보드에 표를 만들었다. 먼저 학교와 집의 거리, 기숙사, 남녀공학 등 고려사항을 왼쪽에 적었다. 오른쪽에는 아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고등학교 2개를 쓰고 각 항목에 대해 점수를 매겨 보았다. 그리고 점수의 총합으로 결정을 하면 된다는 예시를 보여주었다. 왼쪽의 고려사항은 가장 중요한 순서대로 쓰게 하고 중요도가 높은 항목은 점수를 높게 배점했다. 간단한 의사 결정을 하는 방식이다. 합리적인 사고의 한 면을 보여주니 민희의 크고 맑은 눈망울이 더욱 반짝였다. 이런 느낌 역시 정량화할 수는 없지만 자기 효능감을 높이는 기폭제로서 매우 강력한 노화 감속제 역할을 한다.   

   

  고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밤 10시에 수업을 시작하거나 주말에 일해야 한다. 점심때 약속이 있어서 지인이나 친구와 오래 대화를 나누거나, 오전에 첼로 레슨이나 캘리그라피 수업으로 체력을 많이 쓰고 나면, 밤늦게 수업하는 것이 힘들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이제 과외업에서 은퇴를 하고 제주도 한 달 살이를 떠나고 싶어진다. 나이아가라 폭포도 보고 싶고, 뮤직 비디오에서 본 록키 산맥에서 한 달 때쯤 살아보고 싶기도 하다. 존 덴버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친 ‘애니의 노래 Annie’s Song’ 에 나오는 가사처럼 봄철의 로키 산맥의 산들이 내 감각을 어떻게 채우는지 느껴보고 싶다라는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도,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궁시렁거림 사이에서 빛나는 아이들의 눈빛을 그만 볼 수는 없지 하는 마음이 든다. 


 '애니의 노래'에 너의 웃음에 흠뻑 잠기게 해줘 Let me drown in you laughter 라는 가사가 나온다. 흠뻑 잠긴다는 뜻의 drown 이라는 단어가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아이들의 웃음의 낄낄, 큭큭, 깔깔거림은 나의 뇌를 청소해주는 시원한 물과 같다. 수업하면서 하루에 한두 번은 활달한 학생의 웃음소리와 조심성 많은 학생의 미소에 잠겨 든다. 잠자는 동안에는 뇌척수액인 나와 뇌의 노폐물을 씻어주기 때문에 잠을 충분히 자야 하는 것처럼 깨어 있는 동안에는 웃음으로 마음을 청소하고 정화한다. 그래서 수업을 계속 이어갈 힘이 난다. 유머가 없는 삶은 앙꼬없는 찐빵이다.  다만 작년부터는 일 욕심을 좀 버리고 학생 수를 줄어가고 있다. 수입은 줄었지만 일의 만족도는 높아졌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즐겁게 하는 것도 노화 속도 억제제다.      


  과외업을 하는 한 나는 영어로 된 글을 계속 읽어야 한다. 뇌를 건강하게 하는 방법 중에 독서는 항상 운동과 함께 1위 다툼을 한다. 큰 근육을 쓰게 하는 운동과 작은 근육을 쓰게 하는 악기 연주가 뇌를 건강하게 한다고 한다. 독서와 함께 외국어 학습도 고도의 정신 작용을 요구하기 때문에 집중하는 시간이 허락된다. 수업 준비하느라 읽는 영어 텍스트는 독서와 외국어 학습을 동시에 할 수 있게 해준다. 뇌의 가소성에 대해서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다. 이번 6월 고1 영어 수능 모의고사 32번도 뇌가 물리적으로 변화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예로 바이올린 연주자의 왼쪽 손에 해당하는 대뇌 피질이 보통 사람들보다 극적으로 많이 확장되어 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바이올린의 그 높은 소리를 내려면 폭이 엄청 좁은 4개의 현 사이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기술을 익혀야 하니 드라마틱한 대뇌 피질의 확장이 당연히 들린다. 


  또 택시 운전사님들은 기억을 담당하는 대뇌 측두엽의 해마라는 곳이 또 많이 커져 있다고 한다. 예전에 EBS 다큐에서 영국 런던의 택시 운전사님들의 해마를 연구한 장면이 떠올랐다. 여하튼 뇌는 쓰는 대로 변화하고 발전한다. 영어 수능 문제 풀고 수능 관련 문제집을 푸는 것이 나의 뇌를 일하게 하고 고도의 집중 또한 가능하게 해주니 이만한 뇌 영양제도 없다. 


  자존감을 잃지 않는 것이 노인이 되는 수업 중에 가장 큰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인격 의학이라는 분야를 창안한 폴 투르니에는 인생의 가장 어려운 2개의 과업이 ‘어른이 되는 것’과 ‘노인이 되는 것’이라 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전두엽 발달을 온전히 거쳐 타인의 입장이 될 줄 알고 정서적 경제적으로 자립한다는 의미라면, 노인이 된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갖고 있던 자기 조절감과 자기 효능감을 완전히 잃지 않으면서 삶의 의미를 아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직업 생활을 할 때 만큼의 사회적 지위와 수입은 없더라도, 내가 누군가의 삶에 ‘기여한다 contribute’ 는 느낌이 드는 것은 노년의 허무를 막아주는 버팀목이고 나에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그런 버팀목이 되어 준다. 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며 나의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서 끌어올린 자원을 영어 지문을 설명하면서 조금씩 나눠주고 있다는 느낌 역시 건강한 노인이 되는 과정에 필요한 무엇이다.    

 

  그래서 나는 영어 과외업을 폐업할 수가 없다. 수업을 시작할 때 뻑적지근했던 몸이 수업을 마치고 나면 가뿐해진다. 이건 달리기를 시작할 때 1km도 뛸 수 없을 것 같던 몸이 3km쯤부터 풀리고 5km에 이르면 가벼워지는 것과 같다. 수업을 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나에게 과외업은 확실히 노화 억제제가 맞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