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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혜숙 Oct 12. 2024

조지아 여행기(3)

시그나기와 백만 송이 장미

나 : 얘들아, 요즘 커플들은 데이트 통장이라는 걸 만든다면서?
민희 : 누가 돈을 낼지 고민 안 해도 되니까 좋은 거 같아요.

선미 : 남친이 너무 비싼 거 사주면 받기 부담스럽잖아요.

나 : 그렇긴 한데, 상대가 주고 싶은 걸 받는 것도 사랑 아닌가?   

  

  학생들에게 데이트 통장에 대해 물어 보았다. 아이들은 찬성이었다. 합리성을 극대화하는 연애법은 더치페이로 지불하는 것을 넘어 데이트 통장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통장에 각자 같은 양의 돈을 입금하고 카드로 결제하는 방식이라는데 왜 이것에 거부감이 생기는 걸까?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주머니 사정 보다 좀 더 비싼 것을 사주고 싶은 게 사랑이라고 하면 나는 꼰대인가? 주는 것도 사랑이고 받는 것도 사랑 아닌가? 조금도 손해를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찌 연애를 할 수 있을지, 그것을 연애라고 말해도 좋을지, 나는 난감했다.     

  조지아 여행은 카즈베기 지역의 트랙킹이 하이라이트이긴 하지만 트빌리시 주변을 둘러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버스로 1시간 반 정도로 갈 수 있는 ‘시그’라는 도시였다. 이  곳은 사랑의 도시라고 불리는데, 24시간 결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예약도 필요 없고 옷도 자유롭게 입고 신분증과 2명의 증인만 있으면 시청에서 바로 결혼 증명서를 발급해 준다고 한다. 연애할 때도 불확실한 것이 싫어서 통장을 만드는 젊은이에게 시그나기는 정말 철딱서니 없는 도시라고 느껴질 것 같다. 결혼할 마음이 생겼을 때 증인할 친구 2명만 있다면 당장 결혼이 가능한 도시!   


  시그나기는 조지아 여행 첫 방문지였다. 사랑의 도시로 여행의 첫 테이프를 자르는 느낌이었다. 도로는 마차 다니던 길처럼 돌로 되어 있었고 언덕길을 오르면 종탑이 보이고 지붕은 주황색에 벽은 연한 크림색이나 연노랑으로 지어져 있었다. 낭만적인 사랑이 이루어져야만 할 것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과연 24시간 결혼을 할 수 있는 시청에는 사랑의 도시라고 쓰여 있었다. 아무래도 모험심이 없이는 사랑도 연애도 결혼도 불가능한 것 같다. 그래서 신은 연애할 때 콩깍지가 쓰이도록 인간을 설계했는데 어쩐 일인지 콩깍지가 잘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사치품이 하나씩 생활필수품으로 자리매김해서 자동차, 스마트폰, 대형가전제품, 대학 졸업장, 멋진 직장, 해외여행이 다 생필품이 되어 버렸다. 의자 뺏기 놀이를 하는 것처럼 경쟁으로 지친 우리 젊은이들이 사랑과 낭만이라는 생활 필수품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 슬픈 일이다. (사랑과 낭만이 필수가 아니라고 하는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아무튼 나에겐 그러하다) 20세에서 50세 사이의 미혼 남녀가 현재 연애 중이라고 말한 비율이 20% 정도라는 통계를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해외여행이 필수품이고 연애가 사치가 돼버렸다.     


  이 사랑의 도시에서 낭만의 화신처럼 전해 내려오는 시그나기의 화가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니코 피로스마니 Niko Pirosmani 이다. 가수 심수봉의 노래 ‘백만 송이 장미’가 태어나게 한 사나이다. 프랑스 출신 마르게리타라는 여배우를 사랑해서 그녀가 머무는 호텔 앞에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백만 송이 장미를 바쳤다고 한다. 정말 낭만에 목숨을 바친 전설로 노래가 만들어졌다. 러시아 가수 알라 푸카초바가 부른 백만 송이 장미로 화가는 세상에 알려졌고 심수봉의 노래로 지구 반대편에 사는 나도 그 백만 송이 장미를 알게 되었다. 예전에 뉴질랜드 살 때 일이다. 가락이 너무 익숙한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로 시작하는 ‘연가’라는 노래를 포카레카레 아라~하며 마오리족 원주민들이 불렀을 때 감동이 밀려 왔었는데, 그와 비슷한 감동이 다시 일어났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음악으로 연결된 것 같은 지구인으로서 하나가 된 듯하여 걱정 근심이 잠시 증발해 버리는 기분이었다.     


  이 날 저녁식사는 트리빌시의 올드 메테키 Old Metekhi 라는 식당에서 했는데 나이가 지긋하고 낮은 목소리가 매력적인 여성 가수가 피로스마니의 사랑 노래를 우리에게 불러주었다. 여행자가 이국땅에서 느끼는 낭만이 넘쳐 흘렀다. 그 낭만의 극치는 구애를 하는 듯한 남성 두 명과 여성 한 명으로 이루어진 춤이었다. 빠르고 절도있게 움직이는 세 사람의 동작도 아름다웠지만 춤추는 여성의 얼굴이 정말 예뻤다. 피로스마니가 사랑한 프랑스 여배우 마르게리타의 얼굴이 저렇게 아름다웠을까?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북부를 코카서스라고 부른다. 흔히 백인을 코케이션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 지역 사람들의 뚜렷한 이목구비, 밝은 피부색, 짙은 머리칼을 백인들의 특징이라고 여긴 것 같다. 아무튼, 조지아 여인들은 백인과 황인의 좋은 점만 섞어 놓은 듯 아름답다. 특히 짙은 화장을 하고 화려한 머리 장식과 의상을 입은 무용수의 자태는 잊을 수 없다.     

   유럽의 레스토랑이 그러하듯 조도가 낮은 식탁에 포도주와 음식이 흰 테이블보 위에 놓여 있었다. 냅킨도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포도주 한잔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 시그나기의 화가 파로스마니의 사랑이 식도를 통해 위로 들어가는 듯했다. 식탁 위에 놓인 빵은 붉은 팥이 든 둥근 파이처럼 생긴 빵이었다. 맛이 참 좋았다. 로비아니 라는 빵인데 얇은 빵 반죽에 삶은 팥을 으깨서 만든 것이다. 레드빈이라 불리는 이 팥의 붉은 색도 사랑과 낭만을 연상시켰다. 이곳 빵은 간이 세서 짠맛이 강했다. 여행 가이드님 설명에 의하면 다른 것을 딱히 먹을 것이 없어서 빵만으로 식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빵이 짜다고 했다. 우리도 가난했던 시절 밥을 주로 많이 먹던 시절 김치와 짠지가 짰던 것과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조지아 식당에서 먹은 음식은 대체로 비슷했다. 샐러드 재료는 올리브 외에 토마토와 오이 딱 두 가지였고, 빵, 감자, 고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양하지 못한 음식에서 가난함이 느껴지는데 맛있는 포도주가 단조로운 음식에 향기를 더해 주고 있었다.     


  물질적 가난과 낭만은 정비례하고, 풍요와 합리성도 정비례하는 것 같다. 가난은 불확실함을 감수하는 힘이 있고 풍요는 불확실한 것을 참지 못한다. 사랑을 어떻게 표로 만들고 통계를 내서 확실함을 더할 수 있겠는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학습 내용보다, 배우고 알고 싶은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 선생님의 책임이라고 나는 많이 느낀다. 그런데 조지아에 와보니 아이들에게 불확실하지만, 사랑을 해보라는 사랑 전도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존 키딩 선생님 생각이 났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삶을 살라고 가르쳐 주었던 멋진 선생님의 말을 적어본다.     


‘시가 아름다워서 읽고 쓰는 것이 아니야. 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쓰고 읽고 쓰는 거야. 의학, 법률, 경제, 엔지니어링은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해. 하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과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삶의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돈이다. 돈을 종으로 부려야 하는데 상전으로 모시고 사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랑이 재정적 안정, 신분 상승 같은 수단이 되어 버린 지금. 21세기에 연애를 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을 목적으로 산 시그라기의 화가와 백만송이 장미는 나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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