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 네? 아직 왕초보인데 연주회가 가능할까요? 선생님 : 독주가 아니라 서너 명이 하는 거라 하실 수 있어요.
나 : 와우! 그럼 해볼게요!
첼로 배운 지 15개월이 되었다. 마치 아이를 낳고 나서 아이 개월 수를 셈하면서 키웠던 것처럼 첼로 시작하고도 그러하다. 아이를 하나 키우는 것 같다. 첼로 시작하면서 동네 첼로인들과 앙상블 연주를 하는 나를 상상해보았는데 그 꿈이 이루어지려나 보다. 지난 10월, 선생님이 내년 3월에 열리는 앙상블 연주회에 나를 끼워 주셨다. 선생님은 8명의 연주자와 카톡방을 만들고 연주곡 10곡을 선정했다. 나는 5곡에 참여하게 되었다.
악보를 프린트하면서 가슴이 뛰고 기분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도 있었다. 물론 짧게 편곡된 곡이긴 하지만 이 곡은 나의 고딩 시절 축제를 생각나게 했다. 잘 생긴 오빠들과 언니들이 무대에 올라와 검은색 바지와 셔츠를 입고 실내악으로 연주하던 그 곡! 남학생 여학생이 모여서 오케스트라를 한다는 것이 마냥 부러웠었다. 왜 나는 피아노를 배워 가지고 저런 무대에 못 서는가 한탄하면서 들었던 바로 그 곡을 다른 베테랑 선배님들과 함께 연주하게 되다니 감격이다. 연주는 동네 작은 예술 공간에서 하는데, 옛날 쌀 창고를 개조한 곳이다. 이 공간은 아담하고 공간 대여료도 거의 무료에 가깝다. 시골 사는 장점이랄까. 나 같은 초보가 이런 공간에서 연주를 할 수 있음에 무한히 감사한 마음이다.
연주회를 하려고 그랬나 지난달에 첼로를 바꿨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그랬는지 줄이 몽땅 풀어져서 혼자 감아보려 했는데 영 되지 않아서 악기사 사장님께 부탁하려고 악기사에 갔다. 사장님은 참 쉽게 줄을 감으시는데 나는 왜 안되는지 첼로라는 악기의 또 하나의 미스테리다. 사장님이 줄을 바꾸는 동안 둘러보니 악기사에는 예전보다 많은 첼로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냥 값이 궁금해서 문의해 보니 150만 원부터 어마무시하게 비싼 녀석들이었다. 한번 연주해 보라고 하시길래 가장 저렴한 것부터 시작해 봤다. 점점 악기 가격이 올라가도 왕초보인 나는 그 차이를 잘 느끼지 못했지만, 처음 연주해 본 150만 원 몸값의 첼로는 현재 내가 가진 가장 저렴한 악기와 많이 차이가 났다. 소리의 울림이 더 부드럽고 지판의 현을 잡는 힘도 덜 들었다. 현이 굵어질수록, 지판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손가락에 힘이 더 들어서 고군분투하던 나에게 갑자기 구매 욕구가 올라왔다.
이건 사야 해! 배로 치자면 뚝배와 꿀배의 차이랄까. 연하고 아삭아삭하고 과즙이 많은 배를 생각하면 군침이 도는 것처럼 나도 이 첼로에 군침을 흘리면서 같이 온 남편 눈치를 쓱 봤다. 물론 사도 괜찮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남들은 비싼 명품가방을 사지만, 나는 악기를 산다! 라고 속으로 합리화를 하고 있는데, 사장님은 내가 잡은 악기보다 더 비싼 악기를 추천했다. 아마 좀 더 연주하면 더 좋은 악기를 원하게 될 거고 그러면 이중 투자가 되니 처음부터 더 비싼 악기를 사라는 조언이었는데, 더 좋은 악기가 필요하게 될지 장담할 수 없으므로 그냥 처음 잡은 악기를 사기로 했다. 내 귀에는 분명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덥석 악기를 교환했다. 갖고 있던 악기를 사장님이 중고로 사 주셔서 125만 원에 악기를 내 손에 넣었다. 내 마음은 벌써 동네 앙상블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고 있었다.
악기를 바꾸고 나니 악기가 내 애완동물은 아니지만, 애완물체가 되었다. 그냥 물건이라면 이토록 애정이 생기지 않겠지만 이 물건에서는 아름다운 소리가 나온다. 악기를 붙잡고 아름답고 영혼을 울리는 소리를 내려고 연주자들이 땀을 흘리는 것이지만 첼로는 더욱 최고의 소리를 내려고 악기와 시간을 보내야 한다. 피아노는 많은 음표를 한꺼번에 읽으면서 건반을 정확히 눌러 화음을 내는 일이 어렵다면, 첼로는 한 음, 한 음의 표현이 관건이다.
6주 정도에 걸쳐 그 유명한 보케리니의 미뉴에트를 배웠다. 그리고 지난주에 드디어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연주해 봤다. 처음 시작하는 4잇단음표 후 5번째 음을 정확히 만드는 데 한 달은 걸렸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한 음을 땅 치고 그 음이 마음에 들 때까지 다음 음으로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의 선생님 마음에 드는 그 다섯 번째 ‘레’ 음을 내기까지 한 달은 연습을 했다. 아직도 100% 잘 내지는 못하지만 나는 그 시간 덕분에 그 ‘레’ 음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늘 배움의 대상을 찾는 인간인 것 같다. 내 인생 문장이라고 하면 알빈 토플러의 문장이다 ‘21세기 문맹인은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배운 것을 잊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는 사람이다.’ 배우고, 배운 것을 잊고, 새롭게 배운다. learn, unlearn, relearn. 이 말이 내 삶의 모토가 되었다. 나는 배움 중독자다. 중독의 종류가 많지만 배움 중독은 그리 나쁜 거 같지는 않다. 배움이 나에게는 일종의 감정과 에너지를 쏟아 넣는 대상인 것 같다.
사람은 늘 대상이 필요하다. 대상관계이론 학자인 로널드 페어베언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리비도가 쾌락을 통해 긴장 완화를 한다고 했지만, 그는 리비도를 대상을 찾는 길잡이라고 했다. 충동의 만족이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가 리비도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대상은 자연, 사람, 초월적 존재 이렇게 3가지로 나눠진다고 하는데,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상은 소리 sound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기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소리가 나에게 활력을 준다. 함께 연주한다면 다른 사람과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게 하고,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게 해주니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대상이다. 나를 성장시키는 좋은 대상이 되는 것은 그것과 맺는 특별한 관계의 방식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첼로를 통해 또 한 번의 육아 경험을 하는 것 같다. 첼로 소리가 어떤 소리가 아니라 나의 아기가 되었다. 이 아기를 위해, 아름다운 소리를 더 듣고 세상의 잡음은 듣지 않으려고 한다. 아기 피부에 내 손톱이 자극될까 싶어 매니큐어를 지우고 손톱을 짧게 잘랐던 것처럼 첼로 시작하고 손톱을 항상 바짝 깎는다. 바리스타나 소믈리에처럼 맛을 감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분들이 술도 담배도 하지 않고 짜고 매운 음식도 안 먹는 것처럼 나도 아름다운 소리를 위해서는 침묵을 즐기게 되고 첼로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소리의 미세한 차이에 대해 더 민감해졌다. 새소리,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가 더 잘 들린다.
소리를 배움과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가을이 깊어가면서 자연이 내어주는 고운 빛깔을, 나뭇잎에 비친 햇살을, 검은 바위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서 말이 아닌 느낌으로 대화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면 말이 필요하지만, 말이 필요 없는 이 소리를 나의 친구로 삼게 돼서 나는 참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