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용서는 내가 구할 때가 아닌, 상대방이 수용할 때 체결된다.
대학생을 지나 서른살을 훌쩍 넘길 때까지
힘들고 답답한 현실에 울화가 솟구치면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점층되었다.
"내가 어머니 입장이었다면, 자식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하는
꼬리가 긴 의문이 나를 따라다녔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이 의문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나였다면, 자식에게 빚을 물려주고 신용불량자를 만드느니
차라리 감옥에 가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나 혼자 잘살려고 그랬냐고.
너희를 키우느라 힘들었기에 빚을 지게 된거라고.
전 직장 회사 사람들의 음모와 계략이라고.
주장하는 자기회피성 이야기는 절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식에겐 선택권이 없다.
온전히 부모의 행동, 사고방식, 업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자식을 세상 풍파에서 지키고, 충분한 사랑과 정서적 지지를 주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도리이자, 의무다.
그것을 마치 시혜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자세는 깊은 오만이다.
저런 말을 듣는 자식은, 부모의 실패와 경제적 어려움이 자신에게서 기인했다는 죄의식을 품게 된다.
"내가 여자 혼자 너희를 키우느라 고생했으니 키운 값을 받아야한다."
이런 말을 내밷는 어머니 앞에서, 진정한 사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저 말을 듣는 순간, '아 일반적인 부모가 아닌데다, 정상적 사고를 갖지 못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슬프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키워준 값..
키워준 값이 얼마일까.
20대였던 내게 1억 원이 넘는 빚을 안겨줬고, 파산과 면책까지 받게했으면
그걸로 나를 키우는 데 들어간 돈은 얼추 다 갚은게 아닌가.
아이를 낳고 기르다보니 키운 값이라는 말은 성립이 안됨을 깨닫는다.
물론, 분명 양육은 때로 힘들고 돈도 많이 들어간다.
그렇다고 보상을 바라는 것은 진정한 부모의 마음가짐이 아니다.
우리가 부모가 되는 선택을 한 이유는,
한 아이를 온전한 성인으로 키워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개척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이런 과정은 무조건적 사랑과 희생을 전제로 한다.
주고 받는 거래가 아닌.
종교는 분명 순기능이 많다.
종교적인 가르침과 교조의 정신을 전파하고자 사회에 도움되는 일을 하는 분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경도된 믿음과 맹종은, 자칫 종교의 가르침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게 하고
모든 것을 합리화 시킨다.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종교에 심취해있다.
원래부터 믿었던 것은 아니고, 경제적으로 쪼들릴 때 종교에 귀의해 목회까지 하셨다.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자신의 과업과 실수를 처절하게 반성하고 성찰해야하는데
어머니는 종교를 면피의 수단으로 삼았다. 지금도 그렇고.
자신이 나를 연대보증 세우고, 인감도장을 유용한 것은 사탄의 꾀임에 넘어간 일이고
내가 신용불량자가 되어 고생한 것은 다 절대자의 숨은 뜻이 있다고 설교했다.
그렇게 믿는 것은 자유지만, 그걸 내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 않는가.
저런 생각을 가졌으니, 어머니와 제대로 된 대화는 불가능했다.
자신의 불리한 과거는 기억이 안난다거나,
그분의 뜻이라고 하거나,
사탄의 유혹이라고 하니 말이다.
관점과 생각이 괴리가 큰 만큼,
어머니를 이해하고 용서하기 점점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