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아픔이 있거나
처지가 같은 사람과 끌리기 마련이다.
내겐 20년 넘게 알고 지낸 절친 A가 있다.
같은 학교는 아니었지만, 대학생 때 우연히 알게 되어
지금까지 연이 이어졌다.
같은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이질감을 느꼈는데
A는 나와 마찬가지로 고학생(苦學生)이었다.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저녁과 주말이면 식당에서 서빙을 했다.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가세가 기울자, 생활비와 등록금을
스스로 벌어야 한다며 힘들지만 괜찮다고 씩씩하게 웃곤 했다.
그런 A의 미소는, 1년 후에 사라졌다.
"솔아, 좀 만나자."
한겨울 추위가 매섭던 1월의 겨울 밤, A에게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만나 술잔을 기울였는데,
아무래도 학교를 휴학해야할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간암 말기라 곧 돌아가실 듯 한데
그렇게 되면 어머니와 동생을 뒷바라지할 사람이 없어
자신이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A는 공부를 잘해 인서울 대학에 붙었으나
장학금을 준다는 말에 경기권 대학을 선택했다.
등록금은 어찌 해결된다고는 해도, 학교에 다니며
자신과 가족의 생활비를 책임지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한달 뒤, A의 아버지께서 소천하셨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A에게 더 큰 시련이 닥쳐올지는 나도, 그 녀석도 전혀 몰랐다.
모든 것의 시작은 '아버지의 사업 빚'에서 출발했다.
생전에 거듭된 사업 실패로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황에서 돌아가시니,
채권자들이 남은 가족들을 닥달했다.
사실 상속포기라는 간편한 방법이 있었으나
당시 어렸던 A와 세상 물정을 모르시던 어머니의 무지로
수천만원의 빚을 떠앉게 되었다.
빚을 갚느라 휴학은 자퇴로 바뀌었고,
A의 원래 꿈인 방송국 PD역시 흐려지고 말았다.
한정식집과 떡집에서 일하며 8년간 고생한 끝에
빚을 털어냈는데, A가 서른살이 될 즈음이었다.
아버지의 빚이 넘어와 어쩔 수 없이 갚아나가며
A는 자신을 위한 작은 소비도 아까워했다.
가끔씩 둘이 술잔을 기울이다 옆 테이블에 앉은 대학생들을 A가 부러운 눈빛으로
흘릿거릴 때마다 내가 애써 화제를 돌리곤 했다.
만취한 날이면 아버지 빚때문에 자기 인생이 망가졌다며 엉엉 우는 A는
생김새와 사주가 다른, 나였다.
그래도 워낙 성실하고 책임감 강해 그때부터 자기 매장을
운영하며 결혼까지 해 안정적으로 사나 싶었는데, 몇년간을 쉼없이 일한 탓인지
급격히 건강이 안좋아졌다.
그렇게 매장을 정리하고 3년간 휴양한 후 동일한 업종의 매장을
다시 시작했으나 경기 불황으로 예전같지 않아 힘들어하고 있다.
얼마 전 안부 전화를 걸었는데
정부 대출로 근근이 버티고는 있으나,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한숨 섞인 말을 하는 A에게 힘내라는 말 외엔 달리 전할 위로가 없었다.
인생에 가정은 없다지만
A가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더라면,
아버지의 빚이 넘어오지 않았더라면,
분명 지금보다는 삶의 주름이 적었을 텐데.
단지 몇줄의 글로 축약했지만, 나 역시 비슷한 고생을 하며 서로의 과정을 지켜보고
응원했기에 A가 더욱 애틋하고 마음이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