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니..?'를 날리고 싶어졌다, 질척대는 전남친처럼.

퇴사, 그 이후.

by jamie



한 시간 동안에도 수십 번을 울려대는 슬랙 메신저, @내 이름으로 핑되는 구글 캘린더와 공유 문서, 컨플루언스와 지라, 트렐로, 피그마의 업무 관련 알람, 수많은 뉴스레터와 주로 실시간 확진자 소식인 공유 오피스의 커뮤니티 뉴스 포함한 새 이메일 노티, ‘당장 확인하라’고 종용하듯 압박적인 빨간 숫자가 떠있는 모바일 앱까지.. 거의 24시간 상주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스타트업 직장인의 삶.



그러다 일신상의 이유로 급히 퇴사를 결정하고 휴가를 보내고 온 첫 워킹데이, 미리 스케쥴 되어있던 미팅의 리마인더 알람이 울린 것을 끝으로 며칠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앱의 빨간 숫자는 커녕 아무런 알람도 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어? 뭐가 잘 못 됐나? 실수로 회사 관련 앱들 알람을 꺼놨던가? 휴대폰을 수면모드로 설정해두었나?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실감했다.


아, 나 일 그만뒀지.






휴대폰을 깨우면 제일 먼저 한 폴더에 모아둔 회사 앱들을 살폈다. 내 개인 컴퓨터에 로그인하면서 회사 컴퓨터 로그인 비밀 번호를 여러 번 쳐서 록아웃, 일명 1분 먹통 상태도 되었다. (정말이지 이 때는 내가 너무 바보처럼 느껴지고 하도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재택 근무할 때처럼 슬랙부터 켜놔야 될 것 같고, 오늘 스케쥴 뭐 있더라? 시간대 별로 구글 캘린더를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 시계가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는 걸 보고 지금쯤 점심 먹고 커피 사다리 탈 시간인데..



세기말적 싸이월드 갬성으로

문득 머릿속 떠오르는 노래와 가사 한 줄..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더군,
아직도 너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지독하게 허전하고 이상했다. 그 정신없이 알람을 울려댔던 기계가 이렇게도 조용할 수가 있다니. 하지만 일주일쯤, 긴 휴가 썼다~ 느낌으로 반드시 야무지게 쉬어야겠다! 굳게 마음을 먹고 스크린을 껐다.



그렇게 알람 없이 조용~한 주말을 거쳐 2주 차에 들어섰다.


여전히 아무 알람이 없다, 조용.. 하네.... 같은 사진 아닙니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연락이 없다.



이쯤 되면 마케팅 쪽, 비용 태워 진행했던 A/B 테스팅한 거 얘기 나와야 되는데? 프리랜서 외주 준 것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야 되는데? 협업해보자고 받았던 제안서에 대한 회신 방향도 의논해야 하고..


뭔가 또 미친 듯이 앱에 불빛이 반짝거려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거다. 정말 아무것도.


그와 동시에 같이 일했던 멤버들의 안부며,

일의 진척 사항이 궁금해져서 안달이 났다.






자정이 가까워오니 센티멘탈한 감성이 올라오며 더더욱 생각이 나는 거다.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자니…?'라는 문자를 날리고 싶어졌다. 질척대는 전남친처럼.



다른 생각, 다른 생각! 애써 일과 관계없는 남의 인스타와 페북을 수없이 들락거리며 새벽을 보내고.. 오전 내내 꼭꼭 참다가,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망설이다 점심시간쯤 동료에게 톡을 보냈다. 잘 지내냐고. (역시 아무래도 참았어야 했다..)




나 많이 보고싶을거라더니..?

그랬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이렇게 답이 왔다.


Jamieee!
Hope you’re doing well,
everything is alllll good hereee. :)


잘 지내고 있어?

여기는 문제없이 다 잘 굴러가고 있어,라고.


아, 그렇구나.

그래, 다행이네. 잘 지내고 있다니..





그런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한 편,

너무하다..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거다......

아니, 내가 그렇-게 애를 쓰고 그렇-게 오만 노력을 들였는데 말이야,

모든 노력의 결과가 나란 사람이 그 자리에 딱히 없어도 잘 돌아가다니.

나 그렇게 존재감 없는 사람이었나…




글쎄, 너 없어서 허전하고 일이 잘 안 돌아가네, 난 자리가 크다, 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 썩 큰 위로는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쿨하디 쿨한 나의 외국인 동료는 내가 듣고 싶었던 그 한 마디를 끝끝내 안 해주더라. 하하..


알람 안 울려서 너무 좋겠어!

최대한 스트레스 받지 말고, 건강 관리 잘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푹 쉬어~ 잘 지내! 라며.



그래... 잘 된 거다.

전 애인이 나랑 헤어진 후에 많이 힘들어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살다가,

또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서 나랑은 못한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너무 축복할 일이고 잘 된 거지. 좋은 거지..



그런데 이 서운하고 섭섭한 감정은 대체 뭐람.


급하게 마무리 지어야 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내가 맡았던 업무들.. 회사 전체 운영에 관한 것부터 개인 업무 매뉴얼,

진척 사항 보고까지 너무 연락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잘하고 나온 탓이다 생각하기로..



괜히 시무룩해지는 밤이다.

그래, 떠나 줄게 잘 살아!





*

수없이 부유하는 감정들로 쉽사리 잠들지 못했던 어느 새벽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