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중앙공기업, 지방공기업을 경험한 13년 차 K-직장인 이야기 3
하반기 전형이 모두 마무리되고 최종합격 1, 예비합격 1이라는 성적표를 받아 든 나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지방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최종합격 하여 입사 예정인 곳은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시장형 공기업이었고, 입사 이후 정년까지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갈 것이 예상되었다.
바다가 보이는 직장, 누군가에겐 낭만이었으나 나에겐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유배지가 될 수도 있었다.
30대 백수 늦깎이 취업준비생 시절
'어디 취업하든지 따라가겠다. 합격하면 당장 결혼준비를 시작하자.'
라고 말 했던 당시의 여자친구는 합격 이후 고민에 빠졌다.
결혼 이후에 내 커리어를 포기하고
남편 근무지에 따라가서 잘 살 수 있을까?
지방은 서울보다 직업 구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현실 앞에 무너진 여자친구의 약속을 탓하기엔, 그녀의 커리어 또한 나의 커리어만큼 소중했다.
에너지공기업은 내가 가장 가고 싶던 분야였고, 하고 싶은 직무였지만 남편으로서 내 커리어를 고집한다면 내 아내가 될 사람의 커리어가 무너지는 상황이 될 수 있었다.
장시간 속 싶은 대화의 끝에 결론에 다다르지 못한 상태로 우리는 결혼준비를 시작했다. 어느 주말 아침, 웨딩박람회에 가기 위해 여자친구의 집 앞에 주차하고 여자친구를 기다렸다.
예상보다 늦게 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여자친구는 차에 타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가 우리 결혼 보류하래.
차 안의 공기가 급격히 냉각됐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8개월의 사투 끝에 얻은 '최종합격'이라는 전리품이 불합격 통지서가 된 순간이었다. 대기업 타이틀을 떼어낸 '30대 백수 남자친구'의 초라함이 중앙공기업 최종합격으로 가려질 거라 믿었던 오만이 산산조각 났다.
여자친구의 부모님에게는
내가 많이 부족해 보이는구나.
서운함이 있었지만, 감정을 드러낼 순 없었다.
옆에 있는 여자친구가 더 많이 슬퍼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일 일정을 취소하고 근처에 있는 갈비탕집에서 식사를 했다. 한동안 뚝배기에서 올라오는 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맛인지도 모를 국물을 들이켰다. 속을 태우는 건 뜨거운 국물인지, 자괴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 결혼준비가 너무 순탄하다 생각했어.
잘 헤쳐나가 보자.
우는 여자친구를 달래기 위해 말했다. 훗날 아내는 그 말이 무척 인상 깊었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사일이 다가왔다. 하필 연수원 입소일이 12월 26일이었다. 여자친구와 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서울에서 그 해의 마지막 데이트를 했고, 크리스마스 날 서울역에서 이별을 해야 했다.
서울역 카페에서 주문한 음식을 픽업해서 자리로 돌아오는데, 여자친구가 테이블 위로 눈물을 툭툭 떨어트리고 있었다. 서울역의 소음 속에서 혼자 울고 있던 그 모습이, 내 커리어의 방향타를 180도 돌려버렸다.
나 꼭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겠다.
다시 한번 다짐했다.
세상 어느 여자가 나를 이만큼이나 사랑해 줄 수 있을까? 가족이 아니고서야 나를 이렇게 생각해 줄 사람이 없을 텐데, 이미 여자친구는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내 커리어의 영광보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이 내 인생의 더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연수원 입소 이후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입사 동기들은 30여 명이었다. 경력직 신입이었기에 나이대도 출신 지역도 다양했지만 대부분 경상도 출신이었다. 2인 1조로 방 배정을 받았고 나는 A중공업에 다니다 온 1살 터울 형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밤 10시면 생활관 1층에 모여 인원점검 했고, 아침에는 인원점검 후 바다가 보이는 길을 따라 아침구보를 뛰었는데 여기가 군대인가 싶었다. 국가 에너지를 관리하는 곳이라 그런지, 내 개인의 에너지(자유)는 철저히 통제당하는 기분이었다.
자유를 찾아 대기업을 탈출했는데, 도착한 곳은 바다가 보이는 병영이었다. 곧 연수원 어딘가에서 '체력은 국력이다.'라는 문구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파란 바다가 이뻐 보이긴 했다.
새해 첫날, 공휴일을 맞아 하루의 휴가가 주어졌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표를 검색하다 이내 창을 닫았다.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 비로소 실감 났다. 남쪽 지방에 사는 동기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지만, 나는 부산 해운대에 사는 대학동기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타지생활의 외로움을 느낀 시간이었다.
내가 계속 이 회사에 다닌다면
기러기 아빠처럼 가족 얼굴도 자주 못 보고
나 홀로 타지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도 있겠지?
빈 방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홀로 편의점 도시락을 먹을 미래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연수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02'로 시작되는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 인생의 두 번째 기회가 도착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예비합격 명단에 있던 수도권 소재의 지방공기업이었다. 추가 합격 소식이었다. 내가 간절히 바라던 '서울 생활'과 '공공기관의 안정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기적이 찾아온 것이다.
반가움과 동시에 고민에 빠졌다. 전화를 준 인사담당자에게 내 사정을 알리고 다음 날까지 고민할 시간을 벌었다. 부모님과 여자친구에게 가장 먼저 소식을 알렸다. 어머니는 반대하셨다.
서울대가 멀다고 안 가는 사람은 없지 않니
재미있는 비유였다. 어머니가 보시기에는 지금의 직장이 더 네임밸류가 좋아 보였던 것 같다. 어머니에게 '네임밸류'는 자식의 안위보다 앞서는 훈장이었을지 모른다. 아들의 행복보다 아들의 명함을 먼저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야속했지만, 그 또한 부모의 사랑임을 부정할 순 없었다.
에너지 분야의 중앙공기업에서 정년퇴직하신 아버지는 잘 고민해 보고 판단하라고 하셨다. 훗날 해주신 얘기는 아버지도 예전 동료들에게 물어보셨는데, 그래도 서울이 좋다며 이직을 권하셨다고 한다. 평생을 에너지 공기업맨으로 사셨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린 처방은 '명예'가 아닌 '행복'이었다.
여자친구는 내 선택을 존중하겠다고 했다. 내심 어느 쪽을 더 원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 표현방식은 훌륭했다.
룸메이트 동기 형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았다.
올라가라. 너 서울사람이 여기서 뭐 할래?
그 말이 마음에 닿았다. 마치 '이곳의 파도 소리는 서울 사람에겐 소음일 뿐이야. 네 자리는 여기가 아니야.'라는 말로 들렸다.
마지막으로 같은 회사에 재직 중인 동생에게 연락했다.
백수 취업준비생 시절 동네에서 취업스터디를 하며 만난 동생이었고, 그 친구는 여전히 이직을 위해 공부 중이었다.
형, 무조건 가요.
저 여기서 여자친구랑도 헤어지고
정신과 상담도 받고 너무 힘들어요.
오늘도 퇴근하고 울면서 공부하고 있어요.
결정타였다. 동생의 눈물 젖은 메시지는 예언처럼 내 미래를 투영하고 있었다. 동생의 불행은 내가 걸어갈 뻔한 길의 예고편이었다. 어쩌면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 두 사람이 해 준 걸지도 모르겠다.
이 기업이 물론 내가 꿈꾸던 에너지공기업 중 하나이고, 꿈꾸던 방향으로 커리어를 펼쳐나갈 수 있겠지만
가족, 친구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활해야 하고, 서울 출신이 지방의 생활과 지역문화에 적응하는 것에 큰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익숙한 지하철 노선도 대신 낯선 버스 번호를 외우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질 것 같았다. 나는 서울의 회색 빌딩 숲이 주는 안도감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악의 경우, 사랑하는 지금의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여자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에너지공기업이라는 내 꿈의 커리어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사실 그 적은 가능성만으로 고민할 여지는 없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긴 밤, 고민의 끝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연수원을 퇴소했다.
연수원 문을 나설 때 코끝을 스치던 겨울바다의 짠내보다, 곧 서울에서 마주할 그녀의 온기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바다가 보이는 절경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면 제게는 유배지일 뿐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직장'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무엇인가요? 연봉인가요, 네임밸류인가요, 아니면 곁에 있는 사람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