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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밀 Apr 02. 2024

임신 16주 차의 일기

아닌 척했지만 아기의 성별은 역시 궁금할 수밖에 없다









12주 차 진료에서 다리 사이에 점이 보인다는 말을 들은 뒤로, 내 마음속에서 차차는 어느새 남자아이로 굳어져버렸나 보다.



꿈에서 침대에 노란 옷을 입고 방긋방긋 웃는 차차와 시선을 맞대고 앉아 있었는데,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나는 이미 맞은편에 앉은 차차가 내 아이고 또 남자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엄청 크고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어떻게 내 뱃속에서 이렇게 예쁜 아기가 나왔을까, 신기해하며 팔을 뻗어 살포시 끌어안았더니 품에 폭 안긴 차차가 작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쥐는 게 느껴져 너무 뭉클한 기분이었다. 


이 기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갑자기 남편이 7시 반이라고 깨우는 게 아닌가.  꿈에서 느낀 몽글몽글한 여운이 아쉬워서 나 지금 진짜 행복한 꿈 꾸고 있었는데! 하니까 차마 자기 혼자서만 행복한 출근 준비를 할 수 없어서 깨웠다고 하길래 결국 웃음이 터졌다. 

















12주가 넘어가니 이제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일 정도로 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단추가 있는 바지를 입는 게 불편해 임부용 바지를 넉넉히 사두고 매일 돌려 입는다. 날이 좀 더 풀리면 원피스를 입고 다녀야지. 이 핑계로 또 야금야금 옷을 사고 있는 나.


요즘은 나도 모르게 손이 자꾸 배에 간다.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나갈 때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배를 보호하듯 감싸게 된다. 이게 모성본능이라는 건가 싶기도 한데, 무의식 중에 배부터 지키려고 하는 내가 스스로도 무척 신기하게 느껴진다.


그래봐야 아직 15주 차 임산부의 배니 얼마나 나왔겠냐만, 어릴 때 별명이 체중 미달이라는 뜻의 '미달이'였을 정도로 늘 마른 체질이었기 때문에 내 몸에 이만한 배가 붙어 있다는 게 낯설지만 기분 좋다. 볼록 나온 배를 보면서 한참 쓰다듬다 남편에게도 이만큼 나왔어, 하고 보여주면 남편도 그새 많이 나왔네, 하며 귀여워한다.







배가 나온다는 것 말고도 또 한 가지 변화가 더 있다. 코피가 잘 난다는 것. 


14주 차, 평소처럼 출근 준비하면서 졸린 눈으로 일어나 양치를 하려는데 갑자기 살면서 한 번도 흘려본 적 없는 코피가 나서 당황스러웠다. 뭔가가 코 밑을 흘러내리는, 이렇게나 낯선 감각이라니. 혹시 나 어디 몸이 안 좋은 거 아니야? 일단 칫솔을 입에 물고 이리저리 서치해 보니 의외로 이 역시 임신으로 인한 증상 중 하나였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임신 후 체내 혈류량이 늘면서, 압력이 커지다 팽창한 모세혈관이 코처럼 연약한 부위에서 터지면 피가 날 수 있다고. 



이 증상은 임산부 다섯 명 중 한 명이 경험하는 정도라는데, 왜 나는 이것마저 당첨인가. 


이후로 안에서 피가 굳어지는 바람에 휴지에 대고 잘못 풀면 자꾸 코피가 터진다. 불편해도 참고 작게 쉬고, 코 세게 풀지 않기.













의사 선생님께서 12주 차 진료 때 다음 진료까지의 텀은 4주지만, 입덧약은 3주 치만 먹고 끊어보자고 하셨다. 복용하고 6시간에서 8시간 후부터 효과가 나타나는 입덧약을 몇 시간 간격으로 언제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확실히 알게 된─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아침 10시에 한 알을 먹고, 밤 12시쯤 두 알을 먹어야 하루 종일 안정적인 상태가 유지됐다─ 참이라 14주 차까지는 참 좋았다. 울렁거림도 거의 없고 토하는 일은 아예 없고. 15주 차에 접어들면서 약이 줄어드는 걸 볼 때마다 조금 두렵고 걱정되긴 했지만 그래도 한두 시간 정도 약 먹는 시간이 달라져도 속이 많이 느글거리지는 않는 걸 보니 입덧이 많이 없어진 것 같기도 했다. 


병원에서 받아온 입덧약을 다 먹고 난 후의 첫날, 월요일. 아침에 먹던 약을 안 먹었더니 긴장이 좀 되긴 했지만 평소보다 특별히 울렁거리는 느낌도 없고 무사히 지나가서, 남편이 친구 부부와의 저녁 약속을 화요일로 당겨도 되겠냐고 하는 말에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화요일 저녁에 모여 부대찌개랑 밥 한 그릇을 싹싹 비우고 과일까지 배불리 먹었는데도 괜찮길래 16주 되어가니 입덧도 다 없어졌나 하는 생각을 감히 했다.


정말, 감히.





수요일 오후부터 낯설지 않은 울렁거림이 시작되었다. 퇴근 후 무리해서 원래 계획한 일정대로 장을 보고 집에 오는데 반쯤 녹초가 되어 조수석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눕다시피 앉아 와야 했다. 저녁 먹을 시간이 한두 시간 지나서 그런가 싶었고 며칠 전 고모가 입덧한다고 보내준 냉면 밀키트(무려 20개나 보내줬다!) 생각만이 간절했는데, 집에 와 보니 냉동실에 다 보관해두고 있어서 해동하려면 몇 시간은 걸리는 상황. 다른 건 딱히 먹고 싶지 않아 고민하다 결국 누룽지를 조금 끓여 먹었지만 내내 찝찝하고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먹고 나니 일시적으로 좀 완화되는 기분이라 역시 공복이라 그랬나 싶었고, 억지로 마음을 내려놓으며 당근 주스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고 결국 양치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자극을 받았는지, 입을 헹구고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안방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걸 다 토해버리고 말았다. 변기 뚜껑을 채 다 열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확 올라오는 바람에 이미 대참사가 벌어지고, 나는 몸에 기운이 쭉 빠져 덜덜 떨고, 허리조차 펴기가 힘들고.


내가 토하러 우다다 달려갈 때부터 등을 두들겨주러 급히 따라 들어온 남편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나를 파우더룸으로 얼른 내보낸 뒤, 곧장 온 화장실 청소를 쓱쓱 해냈다.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 이 지겨운 입덧은 대체 언제 끝나나 싶어 서러운 마음으로 눈물만 줄줄 흘렀다. 이제 진짜 끝나가는 줄 알았는데 그저 입덧약 덕분에 잠시 괜찮은 것일 뿐이었구나. 청소를 끝내고 나온 남편이 물을 한 컵 따라 가져다주면서 그래도 차차가 건강하다는 걸 이렇게 또 확인하지 않았냐며 웃고, 토하니까 속이 좀 나아졌을 거라는 말로 열심히 나를 달래주기까지 하는 걸 보면서 더 미안했다.


그래도 역시 든든한 남편이 최고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참 결혼 잘했다니까. 매일 매 순간 내 옆에 버티고 서서 나와 차차를 지켜주는 남편이 없었으면 이 쉽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었을까 싶었다. 














그리고 대망의 16주 차 진료. 드디어 차차의 성별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시간이 왔다. 몸무게와 혈압을 재고 바로 진료실로 이동해 선생님을 뵌 뒤 배를 드러내고 누웠다. 


선생님이 성별 궁금해하실 것 같다며 곧장 초음파를 보여주기 시작했고, 바로 '공주님이네요' 하셨다. 그런데 나는 이미 꿈에서 차차가 남자아이인 걸 본 걸 실제로도 굳게 믿고 있었는지, 그 말을 듣자마자 속으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선생님이 몇 초만에 말을 바로 정정하셨다. '공주님이 아니라 왕자님이에요!' 처음에는 차차가 다리를 모으고 있어서 잘 안 보였던 것 같았고, 한 번 보고 나니 확실하게 남자아이가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공주님 소리에 때 이른 환호성을 터뜨렸던 남편은 아들도 좋다는 선생님 (모니터에 붙은 사진을 보니 아들만 둘이신 것 같았다) 말을 어색하게 긍정했고, 나는 내 꿈이 맞았다는 게 그저 놀라운 기분이었다. 선생님께 꿈 이야기를 들려드리면서 그 때문인지 괜히 초음파 보기 전부터 아들 같았다고 했더니 선생님도 덩달아 신기해하셨다.











지난번 초음파를 봤을 때는 차차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오늘은 정면을 상태로 찍혔다. 그치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정면을 보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무섭다는 말부터 나와버렸다. 선생님이 웃으면서 아직은 해골 같다고 하셔서 나도 민망함에 덩달아 히히 웃고. 


아주 동그래진 머리. 어느새 다리도 기다랗게 쭉쭉 뻗어 있어 기특해하는데 주수보다 큰 편으로 잘 자라고 있는 중이라고, 이제 손가락과 발가락도 눈에 잘 보이게 나올 거라고 하셨다. 우리를 닮았으면 느릿느릿 자라다 어느 순간 키가 확 클 날이 올 텐데, 그런 시기가 오면 갑자기 자라는 뼈 때문에 아프지 않도록 열심히 주물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심장 소리에도 이상 없음. 늘 그렇듯 규칙적으로 잘 뛰어서 다행이었다.


지난 검사에서 다른 수치는 모두 정상이었는데, 역시나 비타민D가 많이 모자라다는 결과를 받았다. 가뜩이나 입덧으로 힘든 참에 비타민D만 먹으면 울렁거림이 너무 심해서 계속 안 먹고 있었는데, 콕 집어서 보충하라는 주의를 들으니 이제는 꼭 먹어야겠다는 걸 느꼈다. 입덧약을 2주 치 더 받는 김에 비타민D도 다시 시작하고, 철분제도 같이 먹어보기로. 철분제를 먹다 보면 변비가 올 수 있다고 하니 유산균도 더 잘 챙겨 먹어야 해서 큰일 났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입덧약, 엽산, 철분제, 비타민D, 오메가 3, 유산균…… 하루에 먹어야 하는 알약이 대체 몇 알이람. 영양제만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다.




 





2차 기형아 검사를 위한 채혈을 하면서, 1차 A형 간염 주사도 맞고 가라고 하셔서 채혈실에 들렀다가 주사실로 이동. 2차 A형 간염 주사는 6개월 뒤인 9월 30일에 다시 맞기로 했다. 주사를 정말 무서워하는데 채혈 주사는 지난번보다 덜 아팠고, A형 간염 주사는 따끔하다는 간호사 선생님 말마따나 진짜로 아파서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차차를 위해 하루 두 번 주사도 참고 맞는 나 참 기특하다고 셀프 쓰담쓰담.






병원을 나오는 길에 양가 어른들께 차차 성별을 알려드렸다. 남편 집은 딸이 워낙 귀해서 시부모님도 기뻐하시는 한편으로 '할 수 없다', '내 팔자에는 딸이 없나 보다' 하시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셨고, 반대로 아들이 상대적으로 귀한 우리 가족들은 '첫 아이가 아들이면 엄마가 편한데 참 잘됐다'며 기뻐하면서도 '둘째는 딸을 낳아야겠다'는 덕담 아닌 덕담을 건네길래 지금 내가 입덧 때문에 몇 달째 죽을 것처럼 힘들어하는 걸 보고 있으면서도 기어코 둘째 타령을 하다니 정말 못 말린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딸이었으면 가스총이라도 사다 놓고 지켜야 하나 했는데 그럴 걱정은 덜었다고 웃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남편도 내심 딸을 바랐었고 나도 꿈으로 차차가 아들인 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 딸 욕심이 좀 있던 게 사실이다. 우리 둘 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으니 건강하기만 하라고 했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야……. 그래도 둘째까진 진짜 자신이 없네. 혹시나 딸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둘째를 갖게 되고 지금처럼 힘든 입덧을 견뎌내는데 아들이라는 걸 알게 되면 괜히 속상할 것 같다는 게 내 솔직한 생각인데, 막상 그때가 되면 내 아기니 다 괜찮으려나. 아무리 아들은 남편이 케어를 많이 한다지만 아들 둘까지도 가능할까. 이런 걱정을 은근하게 내비쳤는데─ 시어머님께 가서 입덧이 이렇게 힘든 일인 걸 이제 알았으니 우리 집에 둘째는 없을 거라고 당당히 선언했다는 남편은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역시나 은근슬쩍 아들 둘이라도 자기가 열심히 볼 수 있다며 둘째 욕심을 낸다. 어차피 차차도 아직 뱃속에 있는 마당이니 이 문제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논의해 볼 일인 것 같군.














평소의 나는 주말, 특히 일요일에 잘 쉬어야 한 주가 편안하다는 믿음 때문에 주말 중에서도 이 일요일 하루만큼은 절대 집을 벗어나는 일이 없는데─ 날씨가 좋아서 집에만 있기 아까우니 비타민D를 보충하자는 남편 말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 동네 공원을 한 시간 정도 산책했다. 과연 정말로 화창한 날이라 공원 곳곳에 운동하러 나온 가족들이며 피크닉 매트를 펴놓고 소풍을 즐기는 가족들이 많아 보기 좋았다. 우리도 나중에 차차 나오면 과일 싸들고 피크닉 매트 가져다가 저 자리에 누워서 쉬자고 약속. 차차도 차차지만 오래 키운 강아지 깜지가 보고 싶어져서 (지금은 본가에 있다) 다음 주 주말에는 꼭 데려오기로 했다.








좀 걷다 정자가 나와서 앉으러 올라갔는데 남편이 사진을 찍어주려고 하기에 배를 보이게 해서 차차와 같이 찍었다. 그러고 보니 주수별 사진 기록도 있었지, 나도 주수별로 배가 얼마나 나오는지 남겨둘까.





주수별 사진도 좋고 다 좋지만, 가장 찍고 싶은 건 차차와 남편과 셋이서 도란도란 남기는 가족사진이다. 스튜디오는 이미 웨딩 사진 찍었던 곳으로 마음을 정해둔 상태. 얼른 그날이 왔으며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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