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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콩 May 16. 2024

밤을 공유하는 사람

함께 잠드는 밤들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차분한 베이지 컬러와 우드 톤으로 꾸민 침실은 내가 집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 물론 원래 용도에 걸맞게 자는 시간이 가장 길긴 한데, 사실 나는 그 외에도 책을 읽고 뜨개질을 하고 과일을 집어먹고 영화를 보는 등의 소소하고 많은 활동을 하는 데에 이 방을 쓴다. 누군가가 (보통 남편이 밥 먹으러 나오라고 하거나 밖에 바람 쐬러 가자고 불러서) 꺼내주지 않으면 주말에는 거의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 애착 쿠션을 껴안고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정도랄까. 남편은 혼자 이 방에 있는 일이 잘 없지만.





남편은 늘 씩씩하고 쾌활하며 겁이 별로 없는 편이지만 유독 거울이 있는 방에서 자는 것만큼은 꽤 무서워한다. 그래서 처음 신혼집을 꾸밀 때 모든 부분에 내 의견이 강하게 들어갔으나, 부부 침실에 옷장이 있으니 전신 거울도 함께 두자는 의견만은 반려당하고 말았다. 침실에 딸린 파우더룸에 커다란 화장대 거울이 있어 선선히 물러나긴 했는데, 이 거울이 하필 침대의 발 아래쪽에 자리한 위치라 누우면 눈에 담길 수밖에 없다. 남편을 위해 거울을 가려줄 요량으로 파우더룸 입구에 기다란 간이 커튼을 설치해 달았더니 무척 마음에 들어 한 기억이 난다.





그의 아내인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원래도 겁을 잘 먹고 잘 놀라는 편이라 무서워하는 게 훨씬 더 많다. 그중 하나를 꼽아보자면 밤에 혼자 자는 것.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혼자 자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지만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가기 전까지는 동생과 한 방에서 자다가 고등학교 때는 4인 1실의 기숙학교에 살았고, 대학 역시 개인 방이 각각 있긴 해도 4명씩 구성되어 늘 복작복작한 기숙사에서 지냈다. 졸업하고 한국으로 들어온 뒤에도 다시 동생과 한 방을 쓰는 생활을 시작해 결혼하기 전까지 거의 10년 동안 지속했으니 혼자 잘 때의 어둠에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운 건 그리 유난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사는 집은 방도 거실도 널찍널찍해서, 낮에는 탁 트여 좋긴 해도 밤에는 혼자 있으면 좀 휑하기까지 한 느낌이 든다. 더구나 침대도 굴러다닐 것을 감안해 큰 사이즈로 샀기 때문에 혼자 자면 옆의 빈 공간이 실제보다 더 크게 다가온다. 그런 집에서 숨 쉬는 나 이외의 유일한 타인인 남편. 남편이 잘 때 코를 골아도 (연애하며 여행 다녔을 때는 늘 죽은 듯 조용히 잤었는데 아무래도 속은 것 같다) 내가 귀마개를 끼면 꼈지, 다른 방에 가서 자라고 보내거나 내가 나갈 생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이가 들면 많은 부부가 각방을 쓴다지만 나에게는 정말 그러고 싶은 날이 올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먼 이야기로만 느껴진다. 



심지어 그는 내가 딱 좋아하는 온도를 지닌 사람이기까지 하다. 결국 신혼 생활을 하는 동안 함께 잘 때는 꼭 손을 잡고 자거나 어깨 또는 엉덩이를 슬며시 붙이고, 그게 아니면 은근슬쩍 발바닥이라도 종아리쯤에 찰싹 댄 채로 눈을 감아야 잠이 오는 것은 확고한 내 잠자리 루틴이 되어버렸다.





가끔 깊은 잠에 빠진 남편이 옆으로 돌아눕다 멀찍이 떨어지면 자느라 듣지 못할 걸 알면서도,


"이불 좀 잘 덮고 자."


라거나, 


"이쪽 보고 자." 


하고 다시 내 쪽으로 가까이 오게 돌려놓는다. 남편은 자면서도 성실하게 응, 응, 하고 대답하며 나를 보고 돌아누워준다. 그럼 그제야 흐뭇한 기분으로 나 역시 재차 잠에 든다. 다음날 잠결에 들은 말이 뭐였는지 물어보는 남편에게 사실대로 간밤의 이야기를 해주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듯 웃고 만다. 나도 자는 사람한테 하는 말 중에 특별한 건 없다니까, 하며 웃는다.








남편과 자면 늘 든든하고 따뜻해서 더없이 좋은데, 악몽을 꾸는 건 옆에 아무리 든든한 사람이 함께 누워 있어도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조금만 무서운 괴담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면 악몽을 꾼다. 악령이 나오는 드라마를 몸서리치며 보고 잠들었던 며칠 전의 밤처럼. 꿈속에서 남편과 어떤 도시로 여행을 갔고, 도시의 경계에 발을 들이자마자 휴대폰에 재난문자가 무서운 속도로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악명 높은 범죄자 누구누구가 탈옥했다느니 어디 어디로 이동 중이니 근처에 있으면 조심하라느니, 이 도시로 도주해 왔다는 살인자 아무개도 아직 잡히지 않았다느니 하는 알림이 계속 떠서, 잔뜩 겁을 집어먹고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올리며 읽어 내려갔다. '살인자, 탈옥, 조심, 아아, 우리는 어쩌다 이런 곳으로 휴가를 왔지! 범죄자, 범죄자, 이것도 범죄자..' 꿈에서 말한다는 게 실제로도 소리가 나왔는지 "살인자, 살인자, 또 범죄자, 그리고……." 하며 잠꼬대를 했는데 남편이 들은 모양이었다. 꿈도 많이 꾸고 잠꼬대도 많이 하는 내가 악몽을 꾸며 두려워할 때면 그렇게 잠귀 밝은 남편이 나를 흔들어 깨워준다. 그럼 나는 자못 안심하며 다시 눈을 감고 보다 편안한 잠으로 스르르 빠져든다. 몸은 옆으로 돌리고, 팔로 다시 남편의 어깨를 휘감아 안은 채로.


자고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고, 회사에 가는 동안 꿈 이야기를 해줬더니 남편은 무서워하거나 놀란 기색도 없이 어쩐지 그런 꿈을 꾸는 것 같았다고 한다. 말해주기도 전에 짐작만으로 이미 내가 혼자 꾼 꿈의 내용도 알고 있었다니, 역시 남편은 나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고 다시 한번 감탄한다.






멀게는 몇 년 전부터 가깝게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이 꿈에 가장 자주 나오는데, 그러다 보니 내 꿈에는 거의 항상 남편이 나온다. 꼭 주인공만큼의 비중이 아니더라도 얼굴은 잠깐씩이나마 비추고 간다. 우리는 사내 부부라 출근도 같이 하고 한 건물에서 같이 일하고 퇴근도 같이 하기 때문에 매일 꾸는 꿈에서까지 보는 걸 합하면 정말 24시간 가까이 붙어 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어떻게 그렇게 매일 꿈을 꾸지." 남편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꿈을 꾸고 기억해내기까지 하는 나를 신기해하고, 나는 매일 꿈 없이 자는 남편을 신기해한다. "어떻게 꿈을 꾸고 있지." 서로를 신기해하는 우리. 








가끔은 정말 재미있는 꿈을 꿀 때도 있다.




한 번은 꿈에서 남편이 사실 사람인 척하는 시바견이었는데, 나한테 들키기 싫다며 밀양에 가서 다시 사람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고 버티려고 하길래 (꿈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운전면허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차 타고) 데리러 갔다. 어찌 된 영문인지 강아지 모습이어도 작년에 샀던 새 아이폰은 그대로 갖고 있어서, 캥캥 울면서 전화를 받는 게 너무 찡했다. 만나러 갔더니 잿빛 털의 고양이들이 남편을 숨겨주고 있었다. 내가 바닥에 드러누워 캐앵캥, 하고 우는 남편의 뒤로 가서 한순간에 낚아채려고 골목을 빙 돌아가다 그 고양이들 중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쳐서 황급히 입에 손을 대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고양이는 작게 끄덕거렸다.


잠에서 깨자마자 잔뜩 흥분해서 말해주자 남편이 그 정도 크기라면 강아지가 아니라 개로 불러야 한다고 정정해 주더니, 곧이어 개꿈이라는 결론을 내려줬다.









잘 때는 서로의 손을 잡고 잔다. 자다가 뒤척이거나 돌아누우면서 놓칠 때도 물론 있지만, 일단 잠들기 전에는 무조건 손을 잡는다. 나는 자기 직전까지 이북리더기로 책을 보거나 스마트폰으로 SNS를 보는 편이라 남편이 먼저 잠들기 위해 한쪽 손을 끌어가려 할 때 괜히 저항해보기도 하지만, 어차피 나도 반대의 경우일 때는 똑같이 하기 때문에 결국은 못 이기는 척 순순히 힘을 빼고 손을 맡긴다. 그렇게 손을 한번 잡히고 나면 어쩐지 책도 SNS도 순식간에 다 시시해져 버려서, 나도 내 옆의 전등을 끄고 잠자리에 든다. 막 잠든 남편의 낮은 숨소리와 이미 잔뜩 익숙해진 향기, 그리고 함께 나눠 덮은 이불의 무게에 더해 꼭 잡은 손과 맞닿은 무릎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어느새 하나의 나른한 자장가가 되고, 나는 또 그렇게 안온한 잠의 세계로 까무룩 빠져든다. 




이러니 혼자 자는 게 낯설어질 수밖에. 남편과 함께 잠드는 모든 밤들은 더 바랄 것 없이 편안하고 아늑해서 언제까지라도 계속 반복 또 반복하고 싶다고,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가만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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