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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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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덴의아래 Sep 26. 2022

두타산의 밤

삼화사 - 두타산성 - 정상. 1996년 7월.



멀기도 멀었다. 새벽부터 서둘렀지만 산 입구에서 버스를 내리니 이미 산이 시커먼 얼굴을 하고 찌푸리고 있었다. 산에선 지붕 밑에서 자는 것을 편집증적으로 싫어하는 나, 그리고 산에 다니는 이유의 반이 일출을 보기 위해서일 정도로 해돋이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는 녀석, 그렇게 둘이니 해떨어진다고 민박집으로 들어갈 리는 없었다. 어차피 굳을 돈, 닭 한마리를 시켜 먹고 어두컴컴해진 산으로 향했다.


그 친구와 함께 가는 산은 어느 산엘 가건 관계없이 언제나 똑같은 계획의 반복이다. 오밤중에 산정에 올라 아침 일출을 보고 하산. 물론 한번도 실현된 적은 없는 계획이지만. 하긴 그래서 맨날 똑같은 일출 타령인지도 모른다.


해뜨면 내려올 산, 먹을 것도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았다. 해먹기도 귀찮고. 초코파이 한박스, 스카치 버터 캔디 한봉지, 그리고 수통에 물 가득, 그렇게 배낭에 쑤셔 넣었다. 비박에 필요한 잡동사니들 틈으로.


산사람은 산에 들어가면 안락과 평안을 느낀다는 건 말짱 거짓말이다. 우리가 느낀 산 분위기는 침울, 음울, 음침, 그런 단어들이 아주 꼭 어울리는, 괜시리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휭휭 기분나쁘게 산자락을 훑는 바람, 절간의 사천왕처럼 입구를 지키고 선 검은 바위벽들, 으스스 떨고 있는 검은 숲.... 저녁 어스름 속에 폐허처럼 서 있는 작은 정자를 지나고, 인기척 없이 조용하기만한 절을 지나며 우리는 분위기에 걸맞는, 두런두런 웅얼웅얼하는 대화를 나누면서 걸어갔다. 바람에도 손이 있는 것일까, 어디선가 형체없는 검은 손이 머리카락을 휙휙 건드리면서 지나갔다.


두타산성 가는 길. 이곳에 어둠이 드리웠다. 계곡을 내려다보는 바위벽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대는 밤이었다.


두타산성 올라가는 급경사면에 접어들었을 때, 주위는 암흑 그 자체였다. 별빛도 들지 않는 깊은 계곡, 두 개의 작은 랜턴 불빛만이 어지러이 춤추며 가쁜 숨을 이끌었다.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랜턴을 끄자 누가 옆에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너, 드라큐라가 왜 무서운 지 알아?" 밑도 끝도 없는 질문.

"글쎄...?"

"그건... 멀쩡하던 옆사람이 언제 드라큐라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이지."


하하하... 난 웃었다. 좋다, 오늘밤은 귀신 얘기나 해 볼까....


그때였다. 어둠 속 저 위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이.


"야, 너도 들었지?"

"고양이 울음 소리 같은데..."

"아냐, 여자 목소리였던 거 같아."

(두리번 두리번) "랜턴 불빛 같은 거도 없는데...?"


그냥 동물 울음소리였나 보다, 하며 짐을 챙기고 일어서는데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렸다. 분명한 여자 목소리였다. 빨리 올라오세요 하는.


우리는 눈이 둥그래져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물론 산 속에 사람이 있을 수는 있었다. 하산을 서두르는 등산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빨리 올라오세요라니? 갸우뚱거리며 다시 오르막을 올랐다. 몇분쯤 지났을까... 어둠 속 가까운 곳에서 다시한번 여자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오세요. 목소리는 가까운데 랜턴불빛은 여전히 없었다. 나는 검은 허공에 대고 물었다.


"아니 깜깜한 데서 뭐하세요, 내려가시는 길인가요?"


다시 한번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말했다. "아니요, 전 여기 그냥 있을께요 빨리 올라오세요~~"


잠시 후, 랜턴 불빛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가 나타났다. 표정도 멀쩡한 걸 보니 길을 잃고 헤매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저... 물 좀 있으면 주실래요?" 그 옆 어딘가 암흑 속에서 이번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불을 비춰보니 퀭한 눈의 남자 하나가 바닥에 쭈그리고 있다. 반팔 반바지에 난닝구 비슷한 이상한 꼭 끼는옷을 위에 입고 있다. 물을 건네줬더니 벌컥벌컥 마시고는 이번엔 어떻게 알았는지 초코파이 있으면 달란다. 순식간에 네개를 먹어치우고선, 또 어떻게 알았는지 묻는다.


"사탕 같은 거도 좀 있으면....."


스카치 버터 사탕 반 봉지를 순식간에 우걱우걱 씹어먹더니 그제서야 한숨을 돌리는 남자.


그날 오전에 청옥산에 올라 두타를 거쳐 내려오는데 비가 흩뿌렸단다. 반팔 반바지 차림의 남자는 덜덜 떨면서 저체온증에 점점 굼벵이가 되어갔고, 그나마 하나 있는 여자 '나시'옷을 위에다 아쉬우나마 껴입고 내려오던 중 해가 져 버린 거다. 랜턴도 없는 두 사람은 밤길을 더듬더듬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주저앉아 있었던 것이고....


그러고보니 배낭은 여자가 메고 있고, 여태껏 비실비실 가물가물하는 남자를 이 여자가 끌고 왔다고 한다.


우리가 산에 올라간다고 했더니 그런다. "이 시간에요? 위에 가면 물도 없는데 어떻게 자요?"


무겁게 들고온 물 마셔버린 사람이 누군데.....


조금 지나 남자가 기운을 차린 것 같기에, 그럼 조심해서 내려가시라고 작별의 인사를 하고 돌아섰더니 랜턴불 사라진 하산길은 완전히 암흑천지 그 자체였다. 별수없이 두 사람을 가운데 넣고 앞뒤로 불을 비추면서 다시 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처음엔 오르막길 시작되는 곳까지만 바래다주려고 했는데, 이왕 거기까지 간 김에 매표소까지 동행해서 내려와 버렸다.


시간을 보니 이미 밤 열 시. 밤 열시의 산은 저녁 일곱시의 산보다는 들어서기가 훨씬 어려웠다. 발길이 되돌려지지 않아 머뭇거리는데 그가 우리를 부득불 잡았다. 신세를 갚아야 한다면서.... 방값 낼 테니 자고 가라고. 아니면 내일 기다릴테니 오후에 자기차로 같이 서울에 올라가자고, 그것도 싫으면 맥주 한잔만 먹고 산에 올라가라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엉거주춤 자리에 앉고 보니 바람은 여전히 떼지어 산을 훑고 있었다. 음울, 침울, 음침.... 자연히 음, 침, 울 이 세 글자 들어간 이야기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결혼한지 6개월 된 신혼부부였다. 같이 산 건 그보다는 조금 오래되었다고 했고, 아끼는 티코 승용차를 타고 주말에 전국을 누비는 게 그들의 취미생활이었다.


지난 겨울 어느 주말 느즈막한 오후, 그들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차를 내렸다. 깊지는 않았지만 길은 눈으로 덮여 있었고, 산은 오후가 깊어가면서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산을 오르기엔 너무나 늦은 시간, 하지만 거기까지 간 김에 적멸보궁 진신사리탑이나 한번 보고 가자는 여자의 말에 그들은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앞서 가고 있던 아주머니들 한 무리를 지나쳐가게 되었다. 나이든 비구니승 하나가 그들을 이끌고 있었고, 저마다 등에 손에 뭔가를 잔뜩 들고 눈길을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곧 밤이 올 시간이니 적멸보궁에서 밤을 지낼 모양이었다.


길이 힘들기 때문이었을까, 중년의 아주머니들치고는 이상하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슥삭슥삭 옷깃 스치는 소리, 눈 밟는 소리만이 바람도 없는 조용한 산중에 속삭임처럼 퍼져나갔다.


그들 부부는 등산화를 신고서도 이리저리 미끄러지느라 온몸에 잔뜩 힘을 주며 걷는데, 그 아주머니들은 운동화 비슷한 얇은 신만 신고서도 사뿐사뿐, 가볍게 눈길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절에 다니다 보면 이런 길에도 이력이 붙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젊은 사람들의 속도를 따라가지는 못하는 법. 비구니 스님과 아주머니들은 어느새 등 뒤로 처졌다. 한번쯤 있을 법한 인사 한마디 나누지 못할만큼 모두들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겨울산, 오로지 가벼운 발자국 소리, 옷깃 소치는 소리 뿐. 슥삭슥삭, 슥삭슥삭.....


그들을 지나쳐가며 뭔가 뒤통수가 켕키는 느낌에 잠깐 뒤를 돌아본 여자는, 그런데 기겁을 하고 말았다. 등뒤에 오는 늙은 비구니승과 아주머니들 모두가 두 눈 주위가 거무스름했고, 더 이상한 것은 눈썹이 전부 하얀 색이었던 것이다! 한명도 빼지 않고.


오싹한 기분에 얼른 남자의 팔을 끌어당기며, 저 사람들 좀 이상해, 하고 나지막하게 얘기를 했다. 하지만 남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틈에 아주머니들과 거리가 꽤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여자가 뭔가 석연치 않아하자 남자는 나름대로 과학적인 설명을 시도했다. 눈 주변이 꺼먼 건 아마 잠을 잘 못 잤거나 산길 오르느라 힘들어서였을 테고, 눈썹이 하얀 건 날이 추우니까 습기가 얼어서 그럴 것이다, 게다가 날도 어둑어둑하니 잘못 봤을 수도 있고 주변이 흰 눈이라 다른데서 보는 것과 좀 다르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고.


이윽고 진신사리탑에 도착한 그들. 잠깐 절을 둘러보고 다시 내려가려 몇 걸음을 떼어놓았을 때, 앞의 아주머니들이 그제서 절에 올라왔다. 그들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모두들 땅만 보고 묵묵히 걷고 있었다. 슥삭슥삭, 슥삭슥삭..... 아까는 지나쳐가는 길이었지만 이번엔 정면으로 만났기 때문에, 그리고 두번째 대면이라 남자가 반가운 척을 했다.


"안녕하세요? 절에 가시는 길인가 보죠?"


그런데.....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처박고 묵묵히 땅만 보고 걷는 사람들. 슥삭슥삭. 제일 앞에서 걸어오고 있던 승복을 입은 할머니 비구니 한 사람만이, 눈꼬리만 들어서 그들 부부를 싹 쳐다봤다. 고개는 들지도 않은 채. 그리고는 다시 발끝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기분 나쁘다는 듯이. 슥삭슥삭, 슥삭슥삭....


그런데 이럴 수가! 여자의 말이 정말이었던 것이다. 모두들 하나같이 눈썹이 허옇고 눈자위가 시커멓고..... 잠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사이 쾅 하고 절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적막. 바람도 불지 않는 정적 속..... 나지막한 담 너머 신발 벗는 소리, 말소리, 짐 내려놓는 소리, 그런 것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문 닫히는 소리만. 쾅.


갑자기 썰렁해지는 기분에 허겁지겁 내려와 도망치듯 산을 빠져나온 그 부부. 원래는 상원사 입구쯤 해서 민박이라도 할 예정이었지만 산 주변에 머무른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차를 타고 멀리 강릉 시내까지 빠져나가서야 숙소를 잡았다.

 



두 사람이 한 대목씩 번갈아가며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시계는 밤 열한시. 오밤중에 산에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할 소리가 있고 못할 얘기가 있지..... 잘 먹었다고, 이제는 진짜 올라가야겠다고,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입꼬리만 억지 웃음을 짓고 있다. 더욱 기분나쁘게 부는 바람. 하지만, 명색이 남자들인데 그런 얘기 하나 들었다고 갈 산에 못가는 일이야 있어서는 안 되지, 이렇게 마음을 먹고 발걸음은 다시 매표소를 지나 산으로 향하지만.....


흐엑! 어둠 속에 뭔가 귀신집 같은 게 서 있었다. 누가 먼저 그러자고 한 것도 아닌데 동시에 돌아서서 매표소로 되돌아 나왔다. 생각해 보니 아까도 지나쳐갔던 간이 정자였다. 쓴 웃음을 지으며 다시 발걸음을 산으로 되돌렸다. 어쩐지 음침해 보이는 정자도 용감히 지나치고, 조금 지나자 삼화사의 백열등 불빛이 저 앞에 보였다.


절! 절이었다. 하필 저기에 절이 있을 게 뭐람. 그래도 저것만 통과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시선을 다른데 두려고 주위를 둘러보자 무서운 바위벽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생전 남자끼리 그렇게 손을 꼭 잡고 걸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한 발 한 발 절을 향해서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녀석이 나를 붙잡는다.


"야! 조금 전에 있던 불빛 어디갔지?"

"흐엑..."


불빛이 없어졌다. 우리는 또다시 뒤돌아서서 매표소까지 달음질쳤다.


잠시 절이 보이는 각도가 변해서 불빛이 나무에 가린 것 뿐이었다. 물론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서워할 게 하나도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서운 것을 어쩌랴. 입은 웃고 있지만 발걸음은 자꾸 뒤로만 향하는 것을. 조금 전에 들은 그 얘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두타산은 그날 너무나 무서웠던 것이다.


버너를 꺼내 커피를 한잔 끓여먹고는 결국 주차장에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버리고 말았다. 하늘의 별들이 우리를 비웃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틈에 잠이 들었을까, 녀석이 흔들어 깨우는 통에 눈을 떴다. 아직도 깜깜한 오밤중. 일출 편집증 재발이다. 새벽 세시 반. 겁쟁이 산꾼 두명은 다시 짐을 주섬주섬 챙겨서 산을 향했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어둠 속을 노려보면서.


산에서 간혹 느끼는 공포가 두려운 이유는, 스스로 점점 그 속에 몰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늪에 빠진 것과도 같다. 허우적거리면 거릴수록, 아니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속엔 온갖 기괴한 영상이 스르르 스르르 나타났다가는 사라져간다.


계곡가에 텐트를 치고 잠을 청하다보면 흐르는 물소리가 어쩐지 사람 목소리처럼 들리는 때가 있다. 남녀가 두런두런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싸우는 듯이 들리기도 한다. 웅얼웅얼 낮은 남자 목소리, 카랑카랑 높은 여자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부스스 일어났다가 사라져간다. 혹은, 텐트에서 맞는 겨울 밤, 바람에 스치는 플라이 소리가 마치 누군가 밖에서 눈을 밟고 걸어다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각사각 서걱서걱, 텐트 주변을 맴돌며, 내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달이라도 환하게 뜬 밤이면 어른거리는 나무 그림자, 정체불명의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가끔은 짐승 울음소리.....

 

내 딴에는 이제 그런 건 신경쓰지 않을만큼은 이력이 붙었다고 생각했지만, 흰 눈썹 이야기 하나에 간단하게 허물어지고 마는 나.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무서움을 떨치지 못하는 나.


아니다. 그날 두타산은 유난히 무서웠다. 두타산성쯤에 오르자 하늘을 막고 우리를 내려다보는 검은 바위벽들. 하늘은 조금 밝아졌지만 그래서 더욱 어두운 산자락. 검은 능선들 위로 무엇인가 쓱 나타나 내려다 볼 것도 같고, 축축한 바람은 여전히 음산하게 내 몸을 더듬고....


다시 시작되는 조그만 계곡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결국은 다시 매트리스를 꺼내들고 말았다. 밝아지면 경치나 보고 가자는 핑계였지만...... 녀석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갔고, 누워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유난히 낮아보였다. 가슴을 짓누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길고 긴 두타산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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