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산 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덴의아래 Oct 03. 2022

산의 반대편

울산바위 서봉 -2022년 10월


"설악산에 그렇게 많이 갔으면서 울산바위는 지금까지 왜 올라가본 적이 없어?"


울산바위 서봉 올라가는 길, 오늘의 동행 미선이의 예리한 질문이다.


으흠. 그러게.... 늘 멀찌기서 울산바위를 보며 우와 멋지다, 이런 거만 했지 막상 그 위에 올라갈 생각을 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왜 그랬지?


"글쎄... 음... 그게... 울산바위는 다른 봉우리나 큰 능선하고 이어지는 거도 아니고 그냥 울산바위만 달랑 있고..."


"아, 그러면 시시해서 안 갔다는 거네?"


아니아니. 그런 뜻은 아니다.


사실 내 대답도 틀렸다. 이어지는 높은 봉우리가 왜 없는가. 황철봉이랑 이어지는데.


초등학교 때 가족여행으로 설악산에 갔을 땐 흔들바위까지만 갔던 것 같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에도 설악산에 갔었는데 당시 어디를 올라갔었는지도 모르겠다. 산에 관심이 없을 때라 무지막지한 계단과 강제 산행에 대한 투덜거림만이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대학 때 산에 다니게 된 이후론 높은 곳 험한 곳만을 찾아다녔지 모처럼 온 설악산인데 관광객들과 어울려 울산바위 철계단 길을 왕복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울산바위 릿지 종주가 박배낭을 메고 암벽등반을 해야하는 극강의 코스라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종주 암벽팀에 낄 만큼 바위를 열심히 했던 것도 아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울산바위에 다녀온 후 너무 좋더라는 후기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탓이었을 것이다. 울산바위 다녀온 이야기는 거의 예외없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계단 때문에 지루하고 다리 아프고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다"로 끝났고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엔 부족했다.  


그러다 작년, 말굽폭포 쪽에서 울산바위 서봉에 올라 능선을 타면 황철봉에 접근할 수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러니까 신흥사가 아니라 반대쪽에서 울산바위 서쪽에 올라가는 길이 있음을 처음 알았던 거다.  황철봉?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다면 가 봐야지. 그리고 그동안 기회를 보다가 드디어 오늘 가벼운 산행 날, 산길 공부도 할 겸 울산바위 서봉으로 코스를 잡았다.






주차 자리가 있는지 잘 몰랐기에 택시를 타고, 미리 알아본 바에 따라 '울산바위 촬영 휴게소'에서 내렸다. 미시령 터널 톨게이트 입구다. 휴게소에서 커피도 한 잔 마시고 먹을 것도 좀 사는 게 원래 계획이었으나.... 휴게소는 휴업중이고 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다. 아침도 안 먹었는데 배낭에 편의점 삼립빵 하나와 에너지바 1인당 한 개씩 밖에 없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 일부러 어디까지 가서 먹을 것을 조달해오기는 귀찮고... 그냥 가 보기로 한다. 반나절 굶는다고 어찌 되기야 할까 싶다. 쉽고 편한 산행을 계획해도 꼭 뭔가 극복해야 할 난관이 생긴다.


울산바위 촬영휴게소의 텅 빈 주차장에서 보는 울산바위. 아침 점심 굶고 저 오른쪽 끝 봉우리에 다녀오는 게 오늘의 목표다.


미시령 계곡


폭포민박 진입로 입구쪽에서 계곡을 건넜다. 혹시라도 폭포민박에서 사유지 통행을 하네 못하네 할까봐 그냥 미리 계곡을 건넜는데 입구 길 찾기가 애매하다.


오늘의 코스는 정식 등산로가 아니다. 고성군청에서는 정식 탐방로를 개설하고자 하고 지역 주민들의 숙원사업이기도 한데 땅 주인인 신흥사에서 절대 반대한다고 한다. "탐방로 통제가 어렵고 매표 문제가 발생해서" 동의가 어렵단다. 즉 외설악에선 신흥사 앞 소공원으로만 사람들을 통행시켜야 문화재 관람료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을 수 있으니 다른 길은 열어줄 수 없다는 뜻이다.  


대청봉에 올라 바라보는 외설악 지역은 거의 전부 신흥사 소유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신흥사는 그 넓은 외설악에 절이 위치한 소공원 앞만 뚫어놓고 4,500원씩 '문화재 관람료'를 받는다. 케이블카만 타러 온 사람에게도, 깜깜한 새벽 3시에 바삐 스쳐지나가는 등산객에게도 어김없이 돈을 받는데 매표소 사람들은 국립공원과는 상관 없는 사찰 직원들이고 그 돈도 설악산 관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쓰인다.


거기서 시키는대로 돈을 내고 한 시간 이상 걸어가면 울산바위 동봉에 올라갈 수 있다. 동봉 올라가기 직전 울산바위 아래를 우회해서 서봉으로 가는 산길이 있는데 지금은 감시 센서와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전에는 절 직원인 듯한 사람이 금지구역이라며 못 가게 막곤 했다 한다. 4,500원 아끼려고 서봉 쪽 입구, 그러니까 속초 델피노 앞에서 소공원까지 세 시간 걸려 산을 넘어 다닐 사람이 몇 명이나 있다고.


아무튼 계곡을 건너고 나니 그런 이유로 입구 길 찾기가 어렵다. 비탐길은 입구 흔적은 희미하지만 막상 안쪽에 들어가면 뚜렷하게 길이 나 있는 경우가 많다. 이곳 역시 마찬가지다.


산길이란 일종의 집단 지성이다. 한두명 지나간 흔적은 곧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백년 몇천년, 시간을 달리하는 여러명의 생각과 발걸음이 하나로 모여들면 길이 만들어진다. 이미 지나간 사람들이 나를 인도하고 나는 내 뒤에 올 사람을 이끌어주는, 말 없이 이루어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대화다.


이쪽 저쪽에서 흩어져 들어온 사람들의 흐름이 하나로 모여들어 안쪽에 뚜렷한 길이 되어 있다


이런 돌탑도 마찬가지 이유로 반갑다


그래서 산길에서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아닐까? 아무도 없는 작은 산길을 혼자 걷는다 해도 나보다 앞서 그 길을 지나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돕고 있는 셈이니까. 그래서 나같이 소심한 사람도 감히 깊은 산중을 혼자 돌아다닐 용기를 낼 수 있다. 생각보다는 덜 외로운 일이다.


그래도, 길이란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오늘의 나도 동행자가 있어 다행이다.    






초반 한 시간 정도 계속되던 순한 계곡길은 이윽고 지능선으로 이어지고, 능선에 닿기 직전 다시 계곡 상단을 만났다가 석문으로 이어진다.


산행 후기만 보았을 때엔 어느 정도 암릉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바위를 넘어가는 구간은 그리 어렵지 않은 한 군데 뿐, 더 큰 문제는 줄줄 미끄러지는 모래 흙이었다.


마지막 만나는 계곡 상단 인근의 전망바위. 드디어 시야가 트인다.


석문. 저 틈으로 가면 설악동, 우회전하면 황철봉, 좌회전하면 울산바위 서봉이다. 오늘은 아직 지나간 사람이 없는지 파도가 막 쓸고 간 해변처럼 석문 아래는 발자국도 없이 깨끗하다



공격을 준비하는 뱀인 줄 알고 잠깐 놀랐다. 모래사막에 방울뱀 지나가는 미국 영상을 너무 많이 봤나보다. 최근 종영된 <Better Call Saul>의 영향일지도.


정상 직전에서 보는 울산바위의 위용


썩어가는 허술한 줄이 매여 있다. 남의 줄과 남의 매듭은 절대 믿지 말라고 선배들에게 배웠다. 바위보다 저 줄이 더 무섭다.


천천히 걸어 세 시간 남짓하여 서봉 정상에 올랐다. 굶고 올라가는 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물론 배는 무척 고팠다.


바위 끝을 향해 걸어가는데 나도 모르게 절로 팔이 벌어진다


끝에 서 있으니 살짝 무섭다


돌아가며 한 컷씩. 여기가 사진 포인트임에 틀림이 없는데


1934년에도 마찬가지였나보다. 허복남, 최순성, 김상운(?) 씨의 낙서. 후손에게 민폐긴 한데 내가 걷는 오늘의 길이 역사를 잇는구나 생각이 살며시 들기도 한다.


일주일 전, 역시 날씨가 무척 좋던 날, 그때 나는 설악산의 반대편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7시반에 벌써 목표 지점에 올라버려 시간이 남아돌아 삼각대를 세워놓고 혼자 셀카놀이를 했었다. 불과 일주일 후 여기로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일주일 전 숙자바위에서. 화살표가 오늘 온 울산바위 서봉.


일주일 후의 설악산에서 일주일 전의 그 곳(화살표)을 본다. 맨 위 뾰족한 봉우리는 화채봉.


울산바위 서봉 정상의 모습. 저 뒤 대청, 중청, 그리고 공룡능선을 거쳐 우측 끝 마등봉.


동봉으로 길게 이어지는 울산바위의 단면. 멀리 뒷능선은 화채봉과 화채능선. 왼쪽 암봉은 달마봉.


늘 가고 싶은 황철봉. 이렇게 보면 그래도 나름 부드러워 보이는데...



되짚어 내려가는 길. 따가운 햇살을 나무 숲이 부드럽게 막아주었다.


왕복 5시간. 너무 배가 고파 말굽폭포는 가지 않았다. 다음에 올 때를 위하여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음? 다음에?


물론이다. 이번에 알았으니 겨울에 다시 올 것이다. 그 때의 행선지는 저기 저 사진 속의.... 앗, 아니다. 볼드모트는 아니지만 그곳의 이름은 소리내어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이다. 비탐 지역이니까.



2022. 10. 3.



오늘 산행의 gpx 파일은 여기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910118/4646640/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 가는 설악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