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7월 경남 고성군 거류산
산에 혼자 갈 때의 패턴이 있다. 계획을 세우고 배낭을 꾸릴 땐 엄청 설렌다. 내 페이스대로 산행도 하고 중간에 셀카놀이도 마음껏 해야지. 그러다 막상 차를 타고 산이 가까워지면 점점 부담이 되며 걱정스러워진다. 혼자 멧돼지라도 만나면 어떡하나, 텐트 칠 자리를 다른 사람이 선점하고 있으면 어떡하나, 밤에 안 그래도 무서운데 혼자 있다가 귀신이라도 나오면 어떡하나...
온갖 쓸데없는 생각들이 떠오르는 걸 보면 나는 혼자 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게 확실하다. 그런데 왜 굳이 이 인적 드문 산을 골라서 하루밤을 지내겠다고 온 것인지.
차에서 내려 20kg 넘는 짐을 메고 휘청이는 다리로 등산로 입구에 서서 가야할 비탈을 올려다볼 땐 살짝 후회도 든다. 이 덥고 습한 날 뭐하러 이짓을.
하지만 그 모든 걸 이겨내고 초반 급경사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면, 그러면 마침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지금까지의 설렘과 긴장이 다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리고 그 조용해진 마음에 혼자 있다는 외로움이 그제야 스며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꾸 이런 별 특징 없는 사진을 찍게 된다.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이 아니라 뒤돌아서면 보이는 장면들이다. 내가 잊어 버린다면 누구도 기억해줄 수 없는 지금의 이 시간들. 아무에게도 기억을 의지할 수 없는 흘러가는 순간들. 나에게만 의미가 있는 장면들.
이곳은 경남 고성 바닷가의 거류산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회사 놀금, 멀고 이름도 생소한 이곳에 오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한국의 마터호른"이라는 과도한 홍보성 별명에 속아서는 아니다. 그 별명에 반신반의하며 찾아본 카카오맵 화면 때문이다.
카카오맵 등산로에서 '조망' 표시는 처음 본 것 같다. 왜 유독 저 산에만 '조망'이 표시된 건지, 지자체의 노력 덕분인지 카카오맵 담당 직원의 고향이어서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지난 2주 연속 비오는 산을 돌아다니며 허연 구름만 보았던 나의 눈은 줄지어 늘어선 조망 조망 조망 글자만으로도 벌써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쪽 엄홍길 전시관에서 시작하여 문암산이라는 봉우리에 이르면 거류산 정상까지 반쯤 온 셈이다. 문암산 직전에 이르니 과연, 카카오맵의 예언대로 조망이 트이기 시작했다. 몇 주만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시원한 장면이다.
대략 이런 광경이다. 삼각대 놓고 제대로 사진도 찍고 저 벤치에 앉아 셀카놀이도 하고 싶었으나 견딜 수 없는 땡볕에 내일 되돌아오기로 하고 포기했다.
물론 그 내일은 없었다. 2023년 7월인데 이틀 연속 맑을 리가....
이곳의 장점은 능선 양쪽이 다 바다라는 점이다. 왼쪽으로는 고성읍 쪽, 오른쪽으로는 당동리 앞 바다가 보인다.
산객 두어명과 마주쳐 지나갔고, 지도에 나와있는 '장군샘'을 찾는다고 중간에 삼사십분 산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렇게 정상에 이르렀다.
정상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인터넷에서 백패킹 명당이라고들 하는 거북바위까지 내려갔는데, 내가 보기엔 거류산 정상이 더 시야가 넓고 땅이 평평해서 마음에 들었다. 특히 휴대폰 앱으로 확인하는 일몰 일출 각도상 정상에서 찍는 사진이 더 잘 나올 것 같아 다시 짐을 메고 꼭대기로 되돌아왔다.
네 시간쯤 걸었나보다. 땀이 아주 많이 났고, 산이 아주 조용했고, 어깨가 조금 아팠고, 혼자라서 무척 심심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손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해질녘이 되자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제야말로 올라오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아 텐트를 치고 일몰 사진을 찍으려 준비했다.
인터벌 촬영을 켜놓고 텐트 안에 들어가서 짐을 정리했다.
그런데,
부시럭 부시럭... 텐트 밖에서 무언가 돌아다니고 있다!
처음엔 큰 새 종류인가 했다. 그런데 땅에서만 부시럭거리는 걸 보면 새는 아닌 것 같고, 저쪽에 물웅덩이가 있고 개구리가 많던데 자이언트 개구리나 두꺼비?
아니 그 정도 덩치로는 저런 소리는 안 난다. 훨씬 큰 동물 같은데 멧돼지? 설마 곰? 남해안에 곰은 없을텐데.... 순간적으로 긴장이 등줄기를 타고 쫙 올라왔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일단 느린 동작으로 조심조심 텐트 안에 벗어놓았던 신발을 신고 끈을 꽉 묶었다. 그리고 텐트 문 지퍼를 살살 열었다. 뭔진 몰라도 괜히 자극하면 안 되니까 조금씩 조금씩,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는데.....
누군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크고 시커먼 게 나를 쳐다보는데 간이 떨어질 뻔했다.
멧돼지나 고라니나 삵이면 몰라도 산꼭대기에서 야생 염소를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다.
내가 흑염소를 먹어는 봤어도 다룰 줄 알아야 말이지. 염소는 가축이라 온순하겠지만 야생으로 살면 성질이 어떨지도 모르겠고, 신경 거슬리게 했다가 저 뾰족한 뿔로 나를 찌르면 어떡하나 불안하고, 먹을 거 내놓으라고 텐트를 짓밟으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고, 게다가 저기 세워놓은 카메라 삼각대라도 건드리면 엄청난 돈이....
살살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덤벼들려 하거나 과격해 보이진 않았다. 일단 얼른 카메라부터 치우고 눈치싸움을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오픈된 산꼭대기에서 일대일로 야생 염소를 만나다니.
잔뜩 마음이 오그라든 나는 일단 염소의 환심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아지를 간식으로 꼬시듯이, 염소도 먹을 걸로 꾀면 되지 않을까?
하필 이번 산행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먹을 것을 전부 동결건조 식품으로만 가져왔다. 과일 고기 야채, 그 무엇도 없다. 아, 생각해보니 아침에 편의점에서 충동적으로 샀던 프링글스 감자칩이 있다. 산에 가면서 감자칩을 산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무의식이 예견한 것이었을까? 배낭에서 얼른 감자칩을 꺼냈다. 그리고 (친근한 인상을 주려고) 염소에게 말을 걸었다.
"염소야, 감자칩 줄테니까 나한테 덤벼들면 안돼, 알았지?"
계속해서 주절주절 대화를 시도하며, 감자칩을 던졌다. 얼른 뛰어가서 낼름 먹어치운 염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며 혀를 낼름낼름 입맛을 다신다. 염소 눈이 원래 동그란 건가? 아무튼 감자칩의 짭짤한 그 맛에 매혹된 것 같았다.
몇번 더 주니까 걸신 들린 듯 받아먹고 엄청 빠른 속도로 혀를 연신 낼름낼름 한다. 이러다가는 내가 먹을 게 없을 것 같아 나도 더 늦기 전에 몇 개 입에 넣었다.
"너 이거만 먹고 집에 가야돼, 알았지?"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 맛을 경험하고 집에 가다니, 염소의 세계에서 있을법한 일 같지가 않다.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하며 경계하던 이 녀석이 어느새 가까이 와서는 내 손에 들린 감자칩을 뺏어먹고 손에 묻은 소금기까지 한번 쓱 핥아먹고 저쪽으로 도망간다. 어쩐지 좀 강아지 같다. 다행히 호전적인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저 뿔은 여전히 무섭다.
이젠 텐트 밖에서 무엇을 먹을 수도 없고 한가로이 앉아서 경치를 즐길 수도 없다. 결국 해도 다 떨어지기 전부터 텐트 안에 틀어박힐 수밖에. 천만다행으로 염소가 텐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거나 하지는 않았다.
얼른 인터넷을 검색했다. 염소가 주행성인지 야행성인지조차 나는 모른다. 설마 밤새도록 내 주변에서 돌아다니는 건 아니겠지? 찾아보니 밤에 잠을 자긴 자는데 신경이 예민해서 너댓시간 밖에 안 잔단다. 으 이런.
자려고 누워있는데 염소가 텐트 왼쪽 오른쪽을 계속 돌아다닌다. 뭘 하나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풀을 뜯어먹고 있다. 와그작 와그작 풀 뜯어먹는 소리가 얇은 텐트 벽 바깥 이쪽 저쪽에서 계속 들려온다. 풀 먹는 중간중간에 무슨 의미인지 자꾸 매해해해 매해해해 하면서.
음. 아까 짭짤한 감자칩을 먹고 식욕이 돋은 게로구나. 그래 잘 먹으면 좋은 거지. 내가 좋은 일을 한 거야.
그런데 너무 계속 내 주변을 돌며 티나게 먹으니까 생각이 거꾸로 든다. 저것이 지금 먹을 거 달라고 시위하는 중인가? 불쌍하게 풀만 뜯어먹고 있다고 설마 일부러 요란하게 소리를 내면서 먹는 건가?
화장실 가려고 두어 번 텐트 밖으로 나갔는데, 이놈이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서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닌다. 이제 아까처럼 염소가 무섭거나 덤벼들까봐 불안하지는 않다. 다만 밤중인데 뿔 달린 시커먼 게 돌아다니니까 시각적으로 편안하진 않다.
한동안 조용하길래 이제 갔나 싶어서 문을 열어보았더니, 이러고 있다.
딱히 뭐 달라고 보채는 건 없다. 그냥 떠나가지 않고 주변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아까 먹은 감자칩을 못 잊어서 이렇게 붙어 있는 것만은 아닐거야, 자기도 외로운거야. 친구가 생기니까 좋은거지.
내멋대로 그렇게 생각했다. 점점 정이 가기 시작하니 매해해해 매해해해 소리도 음악처럼 들리고 음색도 듣기 좋다. 그러고보니 로빈슨 크루소도 염소랑 친해져서 친구처럼 지냈던가? 아닌가, 염소를 포획해서 잡아먹었던가? <로빈슨 크루소>에 나오는 염소와 <캐스트 어웨이>에 나오는 윌슨이 짬뽕이 되어 뒤죽박죽이다.
좀 있다가 또 문을 열어보니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앉아 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날도 맑으니 밤에 별 사진이나 찍어볼까 했었다. 저놈의 염소 때문에 카메라 차려놓고 몇시간씩 조용히 사진 찍는 게 불가능해져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이 지역 사정에 무지한 나의 턱도 없는 생각이었다. 산 동쪽은 조선소, 서쪽은 산업 공단으로 대도시처럼 불빛이 휘황찬란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하늘에 서치라이트까지 왔다갔다했다. 무슨 용도인진 몰라도 저기 앉아있는 염소 위로 배트맨 같은 서치라이트가 휘휘 하늘을 저어댔다. 그러니 염소라도 없었으면 밤새 얼마나 심심했을까.
일출 시간이나 맞춰서 일어나야지. 알람을 켜놓고 잠을 청했다.
꿈결에 매해해해 매해해해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알람을 4시 반에 맞춰놨는데 거의 5시가 다 되어 일어났다. 황급히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텐트 문을 열었는데, 일출은 고사하고 사방이 짙은 구름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염소도 자다 일어나서 나를 본다.
잠은 다 깼는데 일출은 물건너 갔고, 염소가 같이 먹자고 덤벼들까봐 밖에서 아침을 먹을 수도 없다. 텐트 안에서 물을 끓이고 동결건조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밖에 나가 염소랑 놀기 시작했다. 그래도 하루밤 사이에 꽤 친해진 것 같다. 먹을 것에 대한 기대 때문이겠지만 내가 가는 곳마다 졸졸 쫓아다닌다.
아직 이른 새벽이지만 딱히 할 게 없어 짐을 챙겼다. 저쪽에 가면 전망대 데크가 있다는데, 구름 때문에 보이는 건 없어도 나중에 다시 올 수도 있으니 답사 겸해서 그 쪽으로 크게 한 바퀴 돌아서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배낭을 다 꾸렸다. 이제 가야지, 등에 메려는데 아까부터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염소가 애틋하다. 먹을 게 하나도 없어서 미안할 따름이다. 아무리 그래도 초코바를 줄 수는 없으니까.
이름이라도 지어주면 좋겠으나 염소에 무지한 나는 이게 암놈인지 숫놈인지도 알 수가 없다. 다시 짐을 풀고 카메라를 꺼내어 기념 촬영을 했다.
이제 떠나간다는 걸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내가 배낭을 메고 일어서니 슬슬 저쪽으로 간다. 정말 신기하게도 딱 배낭을 메는 순간 나에게 관심을 끊는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거북바위 쪽으로 내려가다 산 사면길로 정상부를 크게 한 바퀴 돌아 데크에 도착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제 비 맞는 건 너무 익숙하다. 4주 연속 맞는 셈이다. 날씨 좋으면 어제의 능선길을 되돌아가려 했으나 내리는 비에 가까운 당동리 내려가는 길로 탈출했다.
내려가는 내내, 숲속 어딘가에서 매해해해 매해해해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또 비에 쫄딱 젖어서 마을로 내려왔다.
택시를 타고 통영으로 되돌아가는 길, 택시 기사가 그런다. 아는 동생이 엄홍길 전시관 주변에서 염소를 방목해서 키우는데 거기서 탈출한 놈들이 야생으로 사는 거라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남해안 쪽은 염소가 사는 산이 많은지 염소를 만난 등산객들도 꽤 있고 때로는 개체수가 너무 많아져 지자체에서 염소 소탕작전을 벌이곤 한단다.
누구는 염소가 나무 뿌리까지 다 먹어치워서 환경을 망친다던데, 자세히는 안 썼지만 거류산에서 발을 휘감는 덩굴과 웃자란 수풀로 흔적 없는 등산로에 고생한 생각을 하면 글쎄, 염소들이 좀 더 분발해서 뜯어먹어도 나쁠 건 없어 보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염소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주변에서 그런다.
"야 그 염소가 꾼이구나. 등산객들한테 먹을 거 받아 먹으려고 상습적인가봐."
"감자칩이 얼마나 맛있었으면 아침까지 옆에 붙어 있었을까."
솔직히 말하면, 내가 하산하려고 하면 염소가 내 뒤를 쫓아서 따라오는 말도 안 되는 로맨틱한 상상을 잠깐 해 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배낭을 메자마자 사라지는 녀석을 보며, 나도 결국 하룻밤 지나가는 상대였나, 괜히 섭섭하기도 했다. 그래 당연히 먹을 것 때문에 내 옆에 붙어 있었겠지.
하지만 단체 생활을 좋아한다는 염소가 혼자서, 굳이 그 바람부는 꼭대기에, 밤새도록, 앉아 있었던 데엔 어쩌면, 아주 조금은, 누군가 친구가 필요하다는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왜인지는 몰라도 집에 오니 염소가 자꾸 눈에 아른거린다. 그 녀석은 나를 잊었을까? 적어도 감자칩 맛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겠지?
체코 말로 코젤이 염소라고 한다.
나는 지금 코젤 맥주를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다.
2023. 7. 15.
이 산행의 GPX는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910118/5815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