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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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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덴의아래 May 07. 2024

싸라락 싸라락 눈

2024년 2월 포천 각흘산-명성산



밤새도록 싸락눈이 내린다.


바람도 없는 고요한 밤, 텐트 벽에 단단한 눈 알갱이가 싸락 싸락..... 음 그런데 눈 내리는 소리가 싸락싸락해서 싸락눈이라고 하나?  갑자기 궁금해져서 검색을 했다. 싸라기눈의 준말이라고도 하고, 싸라락 싸라락 내려서 싸락눈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래, 싸라락이겠지. 싸락 싸락이란 말이 어디 있냐....


다시 처음부터. 

바람도 없는 고요한 밤, 올 겨울 마지막일 수도 있는 눈이 싸라락 싸라락 텐트 벽을 매만지며 떨어진다. 지붕에 쌓이는 눈은 이따금 쉬익 소리와 함께 텐트를 타고 흘러내린다.


구멍난 에어 매트리스 때문에 얼어죽지 않으려고 배낭 위에 오그리고 누워있는데, 싸라락 싸라락 눈 내리는 달콤한 소리에 허리 아픈 줄도 모르겠다.  


이곳은 명성산 삼각봉으로 향하는 능선 헬기장. 아침에 자등현에서 출발, 각흘산과 약수령을 거쳐 명성산까지 왔다.  


봄을 기다리는 2월의 마지막 주, 지난 주의 실패를 https://brunch.co.kr/@560d8fe33aad457/37 교훈삼아 기상청 사이트를 면밀 분석, 적설이 조금이라도 있을 법한 곳을 엄선했다. 그래서 선정된 곳이 포천. 이왕이면 (처음 이름 들어보는) 각흘산에서 시작해서 명성산까지 가 보기로 했다.


산에 아직 눈이 쌓여 있는 것은 물론이고 산길에 발자국도 없어 얕은 러셀(?)하며 온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인데, 선물 같은 눈까지 내리다니.




저녁엔 이랬는데...





새벽, 신설이 덮였다.








나는 매년 2월만 되면 등산을 맹렬하게 다니는 경향이 있다. 12월은 아직 눈이 덜 쌓였다는 이유로, 1월은 아직 겨울이 많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빈둥거리다가 2월이 되어서야 계절이 거의 끝나감을 깨닫고 조급해지기 때문이다.


겨울산이 왜 그토록 좋은지는 나도 잘 모른다. 행복하고 애석했던 많은 기억들이 겨울의 사진틀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일까? 혹은 겨울 산행은 그 추억도 냉동되어 오래 보존되기 때문일까?


아니면, 온통 얼어붙은 세상 속에 있어야 그나마 스스로의 온기가 느껴질만큼 덜 따뜻한 사람이어서일까?


겨울이면 온 몸을 바쳐 산에 다녔다. 러셀한다고 눈더미에서 뒹굴고 호된 겨울 강풍을 맞아 비틀거려도, 추위에 덜덜 떨던 고통의 순간만 선택적으로 머리에서 지워진다. 하얗고 깨끗하고 예쁜 기억만 남는다. 신기한 일이다.




이런 사진처럼.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 어제 거쳐온 각흘산이 저 뒤에 뾰족하게 서 있다.




물러가는 눈구름 위로 태양이 떠오른다.





다시 짐을 꾸려 명성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길.

일주일 지나 3월이 되면 이런 겨울 풍경은 보기 힘들 것이다. 눈에 많이 담아 두어야 한다.




당연하지만 아직 산에는 아무도 없다. 등산객이 있을 법하지도 않고, 있다 해도 여기까지 오려면 아직 멀었다. 폭신한 하얀 카펫 길, 양쪽으로 도열한 나무들이 팔 벌려 환영해 준다.


능선을 걷는데 자꾸 머릿속에 이 그림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이른 시간에 나보다 먼저 길을 간 선답자가 있다. 노루님인가?





그리고 명성산 정상.


어제까지만 해도 겨울이 이미 다 가버렸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던 것이 무색하게, 엄한 흑백의 겨울산이 서 있다.


지금의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시린 발끝과 얼음장 같은 뺨의 느낌은 사라지고, 바람도 새소리도 없는 적막한 이 아침의 깨끗함과 외로움만이 보존되어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왜 그런지 산에서의 기억은 잘 잊혀지지 않는다.


올 겨울 마지막 산정이다.








이왕이면 새로운 길, 사람 발길이 비교적 적게 닿은 길로 가 보고 싶었다. 명성산 정상에서 용화 저수지 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길 흔적이 희미할까 처음에 잠시 긴장하였으나 예상보다 꽤 길이 넓다.


그리고 하산길의 또 다른 선물. 하늘이 파래졌다.

눈 덮인 산도 그 하늘을 반사하여 조금 파래졌다.




멀리 구름 속 어제 지나온 각흘산.




내려가기 싫어 한참 셀카놀이를 했다. 아래는 철원평야, 그 너머 북한 땅이다.




산비탈을 거의 내려와 계곡이 가까워지자 악보대 같이 생긴 것이 눈에 덮여 있다. 안 그래도 조금 전의 햇살과 조망으로 가슴이 벅찬 느낌인데, 저 앞에 서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해야 할 것 같다.   


눈 아래엔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까? 설마 악보는 아닐테고, 등산 지도?  명성산 역사 안내?
혹시 멋대가리 없게 취사 금지 경고문?  


궁금해서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 딱딱해진 눈을 공들여 치웠다.




시가 쓰여 있다.


봄날에 새는 무리지어 나무에서 날아오르고
산승(山僧)은 손님 보내고 꽃을 들고 돌아가네.
돌아보니 남쪽 봉우리의 폭포 아득히 멀리 보이는데
아직도 잔물결 내 옷 털어낼 것 같네.

春鳥聯羣出樹飛。山僧送客拈花歸。
南峰瀑布歸迢遞。猶恐餘波拂我衣。

김창흡(金昌翕), 석천곡기(石泉谷記)


잘 몰랐는데 석천계곡(용화동계곡)이 멋진가보다. 다음에 명성산 오면 계곡길로 억새밭까지 올라가 보자.




웅장한 산세 아래 위치한 마을, 입구엔 현수막이 늘어서 있다.



우리나라의 산은 전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다. 내가 모르는 많은 이야기와 역사와 갈등이 박혀 있다. 그 위를 나는 부표처럼 흔적 없이 스르르 지나갈 뿐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계절 위를, 부표처럼 흔적 없이 지나간다.


겨울이 갔다.






이 산행의 GPX는

http://rblr.co/opo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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