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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사람 Aug 07. 2023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죄인가

아이들은 아픈게 일상


   고등학생 아들이 지난주에 학교 체육방과후를 열심히 하더니 어제부터 허리가 아프다고 낑낑댔다. 학원에 있던 아이를 태워 차의자에 눕힌 다음 서브웨이에 데려가 맛있는 점심을 사주었다. 고생하는 것도 안스러운데, 수요일 체육관에서 뒤로 넘어진 후 허리까지 다쳤다니 참 마음이 아팠다. 일요일은 파스를 붙이고 버티다 오늘 월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병원에 가서 제일 먼저 검사를 받았다. 의사선생님은 뼈이상은 아니고 근육이 뭔가 접질른것 같다면서 며칠 운동도 하지말고 물리치료를 다니라고 했다.


   그제서야 겨우 회사에 달려오니 약간 늦었다. 겨우 일정마친후 점심시간이 되니 이번엔 아이가 전화해 치아 교정한 줄이 또 풀렸다고 한다. 지난번엔 오른쪽 어금니 쪽 끈이였는데 이번엔 왼쪽 어금니였다. 허리 아파 치료 받고 이제 막 학원에 갔는데 치과로 혼자 가라고했다. 의사선생님과 나중에 통화를 하니 어머니가 너무 걱정하는거라며 교정과정에서 이가 움직여 풀릴수도 있고 전혀 큰문제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한다. 마음이 좀 심란했지만 멀리 떨어진 내가 뭐 할수 있는게 없어 그냥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아니, 애가 왜 그렇게 부실해요?“


   그런데 이 얘기를 듣고있던 동료가 무슨일이냐고 묻길래 오늘 아침 아이가 갑자기 허리가 아프게돼 허겁지겁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래서 아침 일정에 좀 늦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이분은 대뜸 아니, 애가 왜그렇게 부실해요? 라고 묻는다. 그 질문이 너무 황당하여 나는 바로 대답 못하다가.. 운동하다 다쳐서 그렇지요, 하는 대답으로 끝냈다. 마음이 상해 더는 말을 잇지 못할것 같았다.


   그러네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더 기분나쁜 말이었다. 해서도 안될 말이었다. 진짜로 누구든 장애가 있어서 아이가 아플수도 있고 부실할 수도 있는것 아닌가 말이다. 부실한 것도 마음이 아픈데, 게다가 거기에 누구의 원인이나 잘못이 있는것도 아닐텐데 그러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 남의 아픈아이를 두고 부실하다고 말하면 더더욱 안되는 것이었다.  


남의 마음 다치게 말하는 사람은 멀리해야


  그러고 보니 이런 사람이 인생에 종종 있었다. 본심은 모르겠지만 저렇게 가시돚힌 말을 해서 내 살을 할퀴는 사람이 있었다.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닌데, 혹은 걱정이랍시고 한말인데 위로는 커녕 상처를 더 아프게했다. 그들의 본심을 나는 모른다. 다만 지나고보니 그런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는게 제일 좋았다. 여리고 무른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소심한 방어기제였다. 피하는 동안 나를 스스로 더 단단하게 양육할 수 있었고, 그런 사람인지 빨리 파악하고 일찍 피하면 더 좋았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라는 사람은 아무도 미워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언제 무슨일이 생길지,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다. 무릎꿇어야 할 일도 생기고, 아이 손을 놓쳐 미친년처럼 동네를 뛰어다니는 일도 생긴다. 아이 학예회에 못가게 돼 대신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도 해야하고, 언제든 죄인처럼 머리 숙일 일이 생긴다. 그러니 엄마라는 사람은 아무도 미워할 수 없다. 속상하고 섭섭하더라도 개인적 감정으로 담아두기에 엄마라는 자리는 너무 약자이다.


  그렇다해도 아이를 키우는 것이 죄도 아닌데 아이의 모든것으로 인해 나는 왜 비난 받고 혼나고 늦어져야 하는가? 아이가 문제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걸 문제라고 보는 사람들이 문제인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온마을이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선 온 마을은 커녕, 혼자 온전히 키우기도 어렵게 하면서, 심지어 일하는 엄마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한국사회에선 일하는 엄마가 애를 낳은 것이 죄인지, 엄마가 되고서도 일을 하는게 죄인지... 하루에도 몇번을 이런 시험에 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아이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하다.


  그나마 이런 와중에 위로가 되는 것은 올한해 내가 그다지 바쁘지 않아 아이가 아프거나 일이 있으면 내가 할수 있는 최대한 같이 해줄수 있어 참 좋았다.


 "그동안은 내가 늘 빠듯한 일과 시간에 쫓겨 매 순간순간마다 아이에게 일어났을 무수한 사고와 사건과 어려움과 불편함과 도움이 필요한 순간들에 같이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는 다소 경미한 일이라도 끼어들고, 고개 돌려 정성껏 아이의 말에 귀기울여주고, 이제는 너무 커버린 아이의 등짝도 혼내는 척하며 살짝 때릴 수 있어서 좋았다."

  

  얼마전 아이는 예전 미국에 살때 갔던 큰 슈퍼 타겟과 그 옆에 있던 판다 익스프레스에서 싸구려 볶음밥과 치킨을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 다시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 싸구려 기억에 누가 가치를 매기고 우열을 논할수 있겠나? 그러하듯이 오늘, 요즘의 이 사소한 기억들도 먼훗날 아이에게 단단한 땅이 되어 아이가 우뚝 설수있게 하면 좋겠다. 아팠던 기억, 별거 아닌데도 엄마가 호들갑 떨며 같이 병원에 데려다준 일, 아침 못먹은 너를 위해 김밥집 문열기를 기다렸다가 처음 싼 김밥 한줄을 사들고는 병원에서 대기하는 너에게 가져다 준 일, 저녁 늦게 졸다가 아이가 현관문 여는 소리를 듣고는 헐레벌떡 일어나 왔어? 라는 한마디라도 하는 엄마 아빠.

  

  아들아. 네가 문제여서 걱정하는게 아니라 너의 모든 발걸음을 염려하고 보살피고자 그런 것이라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다 늙어 사라진 다음에도, 이 기억들을 밟고 너는 더 따뜻하고 단단한 어른으로 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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