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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사람 Apr 28. 2024

긴스버그, 판결로 쌓아온 미국의 역사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R.B.G(1933-2020)

성장배경과 경력

 “남자들의 자리를 빼앗아가면서 법대에 진학한 이유가 뭔지 한 사람씩 말해보라"

Ruth Bader Ginsburg: 1933년~ 2020년(87세로 사망) 유대인 배경으로 뉴욕 브루클린에서 유대인 집에서 성장했다.

성장환경 - 1956년 하버드 로스쿨 입학축하 디너에서 법과대학원 학장은 500명 중 9명에 불과한 여학생들과 가족을 초청한 저녁식사에서 “남자들의 자리를 빼앗아가면서 법대에 진학한 이유가 뭔지 한 사람씩 말해보라”는 질문을 했다고한다. 이에 긴즈버그는 “(한 해 먼저 진학한) 남편이 어떤 일을 하는지 좀 더 잘 이해하고,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따라서 긴즈버그는 어느 정도 남자를 위해서 공부하고 남자가 우선이라는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각성 - 그러다 29세가 되던 1962년 스웨덴에 연수 갔다가 그 나라 여성들의 지위를 직접 목격한 후 여성에 대한 인식이 변한다. 당시 여성은 집에서 가정주부로 사는 게 당연시되었던 미국과 달리, 스웨덴에서는 아내와 남편이 모두 직업을 갖고 부부가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는 것을 접했다. 긴즈버그 자신도 스스로 스웨덴의 사회문화, 여성의 역할, 남녀 평등 생활을 목격하고 나서 스스로 여성의 역할과 직업에 대해 각성했다고 고백했다.

1972년 콜롬비아 로스쿨 최초로 여성 종신교수로 임명됨. 이후 법대 교수이자 변호사로서 여러 소송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본인의 커리어를 쌓음.


1993년 대법관 지명


1993년 60세가 되었을 때, 긴즈버그는 클린턴 행정부에서 대법관으로 지명된다. 1993년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대법관 인선과정이 시작되자, 루스 긴즈버그 본인은 스스로 홍보하거나 뛰지 못했는데, 당시 남편이 아내를 위해 전방위로 로비. 남편의 막강한 인맥을 활용하여 로펌, 법률가들, 학교, 정치가들, 언론인들에게 아내 홍보. 나중에 루스가 선발되자 루스 왈 "남편은  ㅡmy best friend and biggest booster"

60세에 대법관으로 지명선서 할때, 뒤에는 클린턴 대통령, 옆에는 남편 마티.



법대 교수이자 판사, 그리고 대법관으로서 시대의 판결을 끌어내다.  


 1971년 Weingberger v. Wiesenfeld 케이스 - 대학교수였던 긴즈버그가 직접 원고인 남자의 변호사로 소 제기, 최종 승소. 출산 중에 아내를 잃은 남성이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서 사회보장연금을 신청했으나, 당시 법은 남편을 잃은 아내에게만 인정하고, 홀아비에겐 거부. 긴즈버그는 남녀가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하고, 이전 연금 거부 건은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다르다”는 전통적인 성역할 분리에 기반한 제도였음. 그러나 이 판결에서 긴즈버그는 이 법이 남성에게 불공평한 법이며 홀아비인 남성도 싱글맘인 여성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 결국 긴즈버그가 이기면서 사회보장 연금의 대상으로 홀아비인 남성도 편입되게 됨.


(1977년 소송 준비중 사진. AP)

1973년 낙태권 판결 Roe v. Wade 케이스 - 여성 민권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대법원의 낙태권 판결. 이 판결은 긴즈버그가 참여한 것은 아니나 Roe v. Wade (1973)에 대해 긴즈버그가 의견 제시 - Roe v. Wade 사건은 텍사스 주의 낙태 금지가 위헌이라는 원고의 주장을 판단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73년 당시 대법원은 특정주 특정 사안의 위헌 여부를 결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50개 주에 존재하는 모든 낙태 금지가 위헌이라고 결정해버렸다. 이에 대해 긴즈버그는 대법관으로 임명되기 한 해 전, 뉴욕대학 강의에서 1973 대법원의 낙태권 판결은 옳지만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적용된 판결이라고 지적.    


1996년 United States v. Virginia 케이스로 긴즈버그가 대법관이 된 후 내린 기념비적인 판결. 유명한 버지니아 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 VMI)가 남학생들만 사관생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위헌이라고 결정. 이전까지 버지니아 사관학교는 여학생을 생도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국방 분야에서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해왔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국가에 역할을 하고자 하는 여학생이 증가하면서 결국 소송을 하게 되었고, 긴즈버그는 여학생 입학을 허용하도록 판결내림. 만약 이 시기에 긴즈버그가 대법관으로 앉아있지 않았다면 과연 이런 역사적 판결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판결임.


2007년 Ledbetter v. Goodyear Tire 케이스. 굿이어타이어 회사에서 일하다 퇴직한 여성 레드베터가 수십년 일한 후에야 자신이 비슷한 일을 한 남성들에 비해서 상당히 적은 임금을 받았음을 알고 차별금지법 위반으로  소제기. 그러나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은 소제기 기간 경과를 이유로 원고가 패소. 긴즈버그는 소수의견에서 “직장에서는 노동자가 다른 사람의 연봉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공소시효는 원고가 다른 사람의 연봉을 알게 된 후부터 계산해야 한다”면서 이례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직접 읽으며 대법원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특히 긴즈버그는 “공은 이제 의회로 넘어갔다(The ball is in Congress’s court)”라는 말로 의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판결로는 못바꿨으나 의회가 필요한 법을 만들어라고 강변한 셈. 이후 2008년 대선 당시 대통령에 당선된 버락 오바마는 헌법을 가르치던 교수로 긴즈버그에 동의했고, 당선 후 첫 번째로  ‘레드베터 공정 임금법(Lilly Ledbetter Fair Pay Act)’을 통과시킴. [박상현 글] => 개인, 회사, 법, 판결, 행정부의 이해관계와 역할이 균형 있게 조화된 사례  


긴즈버그의 Long Game, 독자적 커리어를 향한 긴 여정


교훈1. Long game  

 사실 긴즈버그는 여성이긴 하지만 미국의 여성운동가들에게는 페미니스트라기 보다 중도파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여성의 민권을 강하게 주장하기보다 신중하게 접근. 실제로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대법관 후보로 지명했을 때 긴즈버그는 중도(moderate) 성향으로 분류되었던 판사였고, 당시 여성계는 탐탁지 않게 반응했다고 한다.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지명한 첫 번째 여성 대법관인 샌드라 데이 오코너가  강한 ‘보수 판사’였으므로, 여성계에서는 진보 성향의 판사를 기대했다. 이를 두고 박상현은 긴즈버그가 신중하게 잘 계획해 나중에 단단한 판결로 여성정책을 만들었다는 의미로 "긴즈버그의 long game" 이라고 평가.  

그러나 나는 long game 의 의미를 달리 본다. 긴즈버그는 1960년대 변호사가 된 이래 최근인 2020년까지 60여년 이상을 법조계에 계속 남아 있었다. 적절한 교수직도 못받고, 남성보다 현저한 차별을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왔다. 결국 60세가 되던 해, 1993년 대법관 후보가 되기까지 30년이 걸렸고, 다른 남자들에 비해 현저히 늦은 것이 사실이지만 일단 대법관이 된 다음에는 27년 동안 중도, 진보적 판결을 내렸다. 일단 자기의 전문분야에 오래 있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남들이 퇴직할 무렵 비로소 대법관으로 임명된 후에도 30년을 더 했다. 일단 자기 분야에서 오래 버텨야한다.


교훈2. 긴즈버그에게 남편과 가족 - Unless her partner is Marty.. 남편이 마티가 아니었다면  

긴즈버그 대법관의 경우, 확실히 도와주는 남편이 엄청난 역할을 했다. 남편이 비밀병기 였을 뿐 아니라, 남편이 본인의 인맥을 동원하여 아내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끌어올려주는데 전적으로 지원. 특히 남편이 최고의 학벌에 같은 분야인 법조계의 거물로 일찌감치 자리잡아 아내가 좁은문을 뚫고 나갈수있게 전적으로 돕고 지원함. 가장 이상적인 경우임. 루스는 어느 모임에서 "남편을 만난 것이 최고의 행운이었다"고 고백. 1950년대 코넬 대학에서 둘은 만나 결혼, 하버드로스쿨 같이 간 다음 남편이 암에 걸리자, 남편 수업에 가 노트필기하고 자기 수업도 받음. 남편이 뉴욕 로펌으로 가자 루스도 하버드대학에서 콜롬비아 법대로 옮겨 학위 이수. 여기까지 보면 루스가 남편을 위해 다 희생 한 거 같지만, 나중엔 남편 마티도 아내를 위해 희생. 아내가 공부하고 교수 준비할 때, 남편이 집안일, 요리 도모.

1993년 대법관이 되는 과정에서 마티는 아내가 최고 정상의 자리에 올라도 전혀 꿀리지 않는 스스로의 에고와 자신감이 있었음. 남편은 루스에 대해 왈 "She works like fury all the time."

남편 마티는 2010년 죽기 직전, 병원 병상 머리맡에 부인 루스에게 이런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루스, 당신이 법조계의 최정상까지 오르고 성장하는걸 보는게 나로서는 얼마나 기쁜 일이었는지 몰라요.

1993년 대법원에서 Doug Mills/Associated Press.


ㅇ자료   

    책 The Notorious R.B.G 악명높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표지사진 - 2020.9.18, BREAKING NEWS: Justice Ruth Bader Ginsburg is dead - Dallas Voice.

1993. Ginsburg's dedication undimmed after 20 years on court (usatoday.com)

    Alessandra Codinha, September 19, 2020, "A Tribute to Ruth Bader Ginsburg, Five Feet Tall but Towering Over All of Us | Vogue", https://www.vogue.com/article/ruth-bader-ginsburg-tribute#intcid=recommendations_similar2-3-experiment-vogue_f31a4269-4e21-4958-beaa-21f13f43fabd_hal-entity-hal-topic-similarity-v4.

Ginsburg's dedication undimmed after 20 years on court (usatoday.com)

[박상현의 ‘리더의 말과 글’] 긴즈버그의 잘 계산된 ‘long game’…여성 민권의 오랜 장벽을 깼다 < 세계와 경제 < 기사본문 - 피렌체의 식탁 (firenzed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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