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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사람 Oct 13. 2024

잘 못해도 예쁜 옷 입는게 뭐가 어때서?

라이프 인 테니스

스텔라 매카트니와 아디다스의 콜라보


동대문에 있는  테니스 가게는 내가 자주가는 단골 tennis 가게다. 가게가 크지도 않은데 테니스 옷, 신발, 라켓, 가방 등 각종 장비를 다 팔 뿐만 아니라 라켓 줄도 갈아준다. 물론 가게 사장님은 내가 단골인줄 모를것이다^^ 여하튼 그 가게 한쪽 모서리에서 가끔 시즌이 지난 옷을 모아다 세일한다. 한 번은 너무나 멋지고 예쁜 스텔라 매카트니와 아디다가 콜라보한 테니스복을 보았다.  거의 반 나시 니트 원피스였는데 오렌지 빛깔이 눈에 확 띄었다. 이런 옷은 어떤 사람이 입겠지? 디자인이 단순한 데도 색감 하나로 이렇게 도드라질 수 있으니 단연 선수 중에서도 실력 하나로 도드라진 사람들이 입겠지... 이런 생각이 드니 나의 초라한 실력이 더 도드라지는 것 같아보여 조용히 가게를 나왔다.  


내가 오랫 동안 다소 보수적인 데서 회사생활을 해서 그런지 격식을 갖추는 것 이상으로 기왕이면 좀 더 보수적으로 입는 편이다. 그러면서 좀 튀고 멋진 옷은 일도 엄청 잘하는 사람이 입어야 한다는... 얼핏 공정해 보이는 기준을 세우게 되었다. 일도 잘 못하면서 튀는 옷을 입는건 왠지 공정해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뭔가를 잘 하지 못 하는 사람은 옷도 튀지않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나름 공정해 보이는 산식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내가 뭔가를 잘 못했거나, 일에  자신이 없을 때, 절대 튀면 안될 때는 늘 까만색 위주로 옷을 입었다. 그러면 안보일 줄 알고^^


테니스는 까망색 츄리닝 단벌로


내가 익숙한 회사에서도 이럴 정도이니, 하물며 내가 잘 하지도 못하는 분야에서 옷을 고를때는 더더욱 한번 기를 죽이고 들어갔다. 테니스할 때도 내가 아직 잘하지 못하니 한동안 옷도 당연히 까만색 츄리닝만 입었더랬다. 생각해보면 그날 선 스포츠에서 오렌지 빛깔의 테니스복을 보고있던 나도 까망색 츄리닝 차림이었던 것 같다. 없어져도 모르고 들어와도 모르는, 그래서 잘 못하더라도 표도 안나는 복장으로.    

테니스를 계속 하면서, 실력을 조금씩 늘려가면서 어느날은 작은 목표를 세워더랬다. 게임에서 이기면 예쁜 테니스복을 나에게 사주기로 말이다.


한동안 그런 보상을 목표로 세우니 정말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런데 열심히 운동을 하면서부터 오히려 다른것이 보이기 시작해졌다. 많이 뛰다보면 땀이 많이 나기 때문에 통기성이 중요하고, 여름엔 시원하며 짧아야하고, 겨울엔 보온성이 중 요해 졌다. 움직임이 많은 운동인 관계로 최대한 신축성 있는 옷이 필요해졌다. 팔랑바지 같은 츄리닝을 입고 있으면 자유롭게 뛸 수 없다는 걸 나 스스로도 느끼게 되었다. 츄리닝복을 반드시 입어야할 이유가 없다면 색깔도 굳이 까망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졌다.     


순전히 운동을 잘하는 것만 목표로 했더니 그에 걸맞는 옷을 찾게 된것이다. 신축성 있고, 팔다리, 어깨 움직임에 걸림이 없도록 스포츠 속옷과 짧고 신축성 있는 테니스복을 찾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훨씬 움직임도 자유로워졌고, 운동하는데 지장도 없었다.  편하고 좋은 옷은 운동을 한 결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테니스 라는 운동을 하는 과정이다.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으면 그만인 것이다. 잘하고 못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제 비로소 프로무대에서 다소 튀는 옷을 입었던 프로선수들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으면 그만인 것이다.
잘하고 못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오사카 나오미


얼마전 한때 세계 여자테니스 랭킹 1위였던 오사카 나오미가 긴 슬럼프와 결혼, 출산의 시간을 지나 2024 미국 오픈에 복귀했다. 결과적으로 우승까지는 못갔지만, 오랜 공백기가 무색할 정도로 예전의 경기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오사카는 경기력 만큼이나 모자부터 신발까지 모두 라임그린 색상으로 튀는 옷을 입고나왔다. 점퍼 뒤에 세일러 문 처럼 커다란 리본을 매단 것도 유쾌했고, 자세히 보면 나이키 로고가 새겨진 테니스화 뒤축에도 작은 리본이 달려 있다.


의상에 대한 질문이 있자 오사카는 미소를 지으며 “테니스 옷을 디자인하는 일에 참여한다는 건 많은 강점이 있다. 오늘 옷을 입으면서 “발레복과 같은 초록색 투투와 녹색 리본 재킷을 입었는데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라고 했다. 오사카의 파격적인 복장은 이게 끝이 아니다. 그는 또 “나는 ‘이 경기를 이겨야 해. 그래야 다른 색상의 옷을 입을 수 있어’라는 생각을 했다”라며 “나의 다음 경기에서 다른 색상의 옷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오사카 나오미 - 뉴욕 AP 연합뉴스 [서울신문]
2024.8.28, US오픈 여자단식 1회전에서 오사카 나오미. 뉴욕 AP 연합뉴스 [서울신문]


사실 오사카에게 테니스옷은 경기 운영과는 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이미 세계 랭킹 1위를 해본 프로선수라 경기운영을 방해할 정도의 옷은 입지 않을것이다. 그 다음에는 부가적으로 본인의 정체성이나 메세지, 혹은 패션에 대한 관심을 부가하여 옷을 입으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오사카의 테니스복은 오사카 본인에게 충만한 역할을 한것 같아 보였다. 그녀 스스로 고통스런 출산과 육아의 공백기를 지나왔고, 다시 테니스를 칠 수 있을까 의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코치도 그녀가 예전만큼 하긴 어려울 거라고 했다. 출산을 해본 여성은 다 느낀다. 특히 신체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살아온 프로 테니스 선수야말로 그 공백과 고통이 더 컸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입을 테니스복을 디자인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의 옷을 입음으로써 오사카 스스로 충만한 만족감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아직 예전의 기량까지 올라오진 못했지만, 아직 우리는 그녀가 앞으로 더 올라갈 날들은 보지도 못한 것이다.   


마리아 샤라포바

2007.7.1, 뉴시스, 마리아 샤라포바, 윔블던 16강 합류


이제는 은퇴한 러시아의 테니스 선수 마리아 샤라포바도 대단한 실력 외에도 멋진 의상으로 늘 관심을 받아왔다. 간혹 그녀의 옷의 선정성을 지적한다거나, 그런 장면만 캡쳐하여 사진으로 올리는 언론이 많았었다. 어쨌거나 운동선수가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는 것, 혹은 멋진 옷을 입는 것은 운동을 잘한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운동을 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에게 즐거움과 용기를 주는 색깔이나 스타일의 옷이 있으면 옷이든, 마스코트든 얼마든지 활용하면 좋다.


잘하지 못해도 예쁜 옷 입는 게 뭐가 어때서?


회사 생활을 하든, 취미생활을 하든, 무슨 노동을 하든 의복은 그 상황에 맞는 것이 제일이다. 흔히 이를 패션의 T.P.O. 라고 한다. Time 시간, Place 장소, Occasion 상황, 즉 경우에 맞는 옷을 입는것이 제일 잘 입는 것이다. 장례식장에는 어둡고 검소한 옷을 입고 가고, 결혼식장이나 축하하는 자리에선 나도 적절하게 밝고 화려한 옷을 입고 가줘야한다. 나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축하하고 상대방의 좋은 일을 그만큼 우대한다는 의미에서 격식을 갖춰주는 것이 좋다. 그래서 좋은 곳에 갈때는 나도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주는 것이 좋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T.P.O.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좋은옷,입고싶은옷을 입는건 좋은일이다. 운동 뿐만 아니라 일에서도, 생활에서도, 대단하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멋진 옷을 입어도 좋다.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만이 대단하고 튀는 옷을 입을 수 있는건 아니지 않은가. 남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선에서 우리는 입는 것에서도 자유롭고 용감해져야 한다. 무엇보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 더 용기를 내야한다. 일 못하는 사람은 옷도 무난한 거 입어야한다는 나의 개똥철학은 역시 개똥이었어..

면접에서 떨어진 날, 잘하려고 했는데 또 망친 날, 수십번 연습했는데 사랑합니다 라는 그 한마디 말을 못한 날, 아무도 나를 위로해주지 않는 날,
그런 날에도 나를 위해 좋은 옷을 입어주자.  




자료

- 서울신문, 2024.8.28, "4년 만에 ‘톱10’ 제압한 오사카, US오픈 2회전서 한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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