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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넝쿨 Sep 09. 2023

혼자서도 잘해요

실용주의자의 공간

지연은 충실한 사람입니다. 공상하지 않고 하루하루 주어진 것을 열심히, 꾸준히 해나가지요. 사실 그녀는 그러려는 생각이나 다짐조차 없이 그냥 그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만히 두어도 자꾸 과거로, 또 미래로 날아가는 저와는 다르게, 현재에 충실히 머무는 그녀가 궁금했습니다.


지연은 격자무늬 원목 중문을 등지고 에어컨 바람을 쐬며 먹고, 보고, 쓰고, 끄적거리고, 또 이것저것을 만들어냅니다. 현실에 발 붙이고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의 공간, 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해서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잡생각 없이 잘 사느냐고. 오히려 지연이 저에게 되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지고 사느냐고. 2023년 무더운 8월, 격자무늬 중문 뒤로 있는 아늑한 침실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을 쐬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기록을 나눕니다.





자신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줄 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저는 만 30살 1인가구 박지연입니다. 가족과 함께 살다가 1인 가구로 독립한 지는 약 4년 정도 되었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것은 혼자 집에 있기입니다.



집에 혼자 있는 것을 왜 좋아해요? 물론 저도 집에 혼자 있는 것을 많이 좋아하는데요. 각자가 좋아하는 이유는 조금 다를 수도 있을까 궁금해요.


저는 혼자서 시간을 보낼 때 가장 큰 편안함을 느껴요. 정말 100% 제 의지대로만 움직일 수 있잖아요. 혼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많은 장소들이 있지만 저는 그중 '혼자 사는 집' 만한 게 없더라고요. 이 세상에서 오로지 저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잖아요. 언제든 저를 환영해 줄 곳이 있는데 왜 굳이 밖에 있겠어요.



하루 중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몇 시간 정도예요?


평일에는 오후 5시에 퇴근하기 때문에 보통 오후 6시부터 잠들기 전인 밤 12시까지 집에서 집안일을 하고 휴식을 취해요. 주말에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집에서만 24시간 있는데, 부모님께 전화 와서 대체 집에서 하루 종일 뭐 하고 있냐고 애정 어린 잔소리도 들어요.



집에서 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어무니 아부지.


그러니까 말이에요.



집을 꾸밀 때 중요하게 고려한 요소가 있나요?


이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실용성이에요. 저도 처음부터 안 건 아니었는데 이 집에서 실용성이 없는 아이템들은 결국 가차 없이 방출되더라고요. 물론 방출시키는 사람은 저이지만… 진짜 쓸 것만 쓰고, 쓸 것만 놔두는 거. 그게 저에겐 가장 중요한 요소예요.



정말 엄격한 실용주의자시네요. 그렇다면 오직 귀여움을 위한 아이템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건가요?


한두 자리는 있죠. 근데 생명이 그렇게 길지 못할 거예요.(웃음) 실용적인데 귀엽기까지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일상생활에서도 실용제일주의자이신가요?


맞아요. 저는 일상에서도 극강의 효율충이에요. 충실하다의 충이요. 허튼짓을 제일 싫어하거든요. 최근에 본 글 중에 '낭만이 있으려면 귀찮음을 감수해야 한다'라는 가수 우즈 씨의 말이 있었어요. 맞는 말인데 저는 절대 안 하죠.



어디에서 자랐나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쭉 자라다가, 5살 때부터 약 2년간 아빠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지냈어요. 그러고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이 나이 이때까지 살고 있고요.



자란 환경이 현재 지연 씨의 모습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사실 장소 같은 물리적인 것들이 지금의 저에게 미친 영향은 전혀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보다 주변 환경 변화에 둔감한 편이더라고요. 이래도 흥 저래도 흥. 그것보단 부모님과 친구처럼 지내며 커온 게 가장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어요. 괜히 자신감 있게 컸거든요.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친구 같은 자식이라… 부모님 입장에서는 좀 피곤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어떤 일을 하고 있어요?


저는 홍보/마케팅 일을 하고 있어요. 광고 회사, 연예 기획사를 거쳐 현재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마케터들에게 내려오는 괴담 중 '회사에서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일들은 모두 마케팅팀의 일이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현재 그 괴담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하하. 괴담이 사실이었다! 그 일을 하게 된 이유가 있어요?


시작은 화장품이었어요. 지금은 화장을 안 하지만 첫 취업 준비를 할 때쯤엔 엄청난 화장품 덕후였거든요. 좋다는 거 다 사고, 다 발라보고 하니까 지나가는 화장품 광고만 봐도 '엥? 저건 저렇게 광고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그럼 어떡해요? 제가 직접 해야죠.(웃음) 그래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너무 힘든 거예요. 제가 하고 싶은 광고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근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줄 아는 게 이거니까 어쩌겠어요… 계속해야죠 뭐.



하고 싶은 광고만 할 수 있다면 어떤 광고를 하고 싶어요?


이 질문을 3년 전쯤에 받았더라면 뭐가 하고 싶다고 아주 장황하게 말했을 텐데… 그때까지만 해도 하고 싶은 게 많았거든요. 근데 평생 이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지겨움과 체념이 저를 평범한 직장인 1의 마인드로 바꾸어 놓았어요. 그냥 할 만큼만 하고 돈이나 벌자! 너무 찌들었나요.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을 받으려고 회사라는 곳을 다니는 게 저의 현실입니다.



취미 활동으로 하고 있는 게 있어요?


취미라고 하기엔 너무나 간헐적이지만 블로그와 유튜브를 하고 있어요. 블로그는 달에 한 번 정도 쓰는데, 주로 한 달 동안 뭘 먹고 다녔냐에 대한 걸로 가득 채워요. 저는 핸드폰 앨범에 있는 사진들을 두 번은 잘 안 보거든요? 그냥 찍으면 그때만 ‘음~좋아’하고는 몇 년 동안 쳐다도 안 봐요. 핸드폰 바꿀 때만 잠깐 보는 정도? 근데 나이가 한 살, 두 살 들어가면서 기록을 좀 남겨보고 싶더라고요. 제가 세상에 살다 간 흔적을 남기고 싶나 봐요. 블로그에 한 달 정도의 일상을 쭉 기록하면서 '이번 달에는 잘 먹고 다녔군. 이번 달에는 이런 걸 많이 먹었군' 하며 혼자 셀프 피드백도 주고 건강한 음식을 더 먹어야겠다고 세뇌도 해요. 지금도 앨범은 두 번 다시 안보지만 블로그는 계속 봐요. 제가 써놓고 제가 제일 많이 볼걸요?(웃음) 이렇게라도 기록을 남기니까 뿌듯하고 재밌긴 하더라고요. 유튜브도 이런 기록의 일환이에요. 근데 이제 촬영과 편집이 너무 귀찮아서 꾸준하게 기록하지 못할 뿐이죠. 저는 유튜버들 정말 존경해요.



지연 씨 블로그 글은 항상 피식피식 웃게 만들어서 좋아해요. 맛난 먹거리 사진도 많고요. 보면서 맨날 다음엔 나도 이걸 먹어야지 다짐해요. 근데 본인이 블로그에 쓴 글을 한 번 이상 보나요? 의왼데요. 지난날 쓴 일기장을 뒤적거리는 느낌인 건가요?


충격적이시겠지만 저는 초등학교 이후로 진득하게 일기를 써본 적이 없어요. 전에 무슨 글을 봤는데 아마 '코로나 확진자의 동선 같은 일기'였을 거예요. 아침에는 뭘 했고 뭘 먹었고 어딜 갔고, 점심에는 뭐 했고, 저녁에는 뭐 했고 이런 식으로 쓴 일기인데 저는 이게 왜 이슈인지 전혀 몰랐거든요? 왜냐하면 제가 항상 그런 식으로 무언갈 쓰거든요. 근데 사람들이 일기를 왜 저런 식으로 쓰냐는 거예요. 하루의 느낀 점이라든지, 깨달은 점이라든지, 다짐이라든지 그런 걸 안 쓰고! 다른 사람들은 매일매일 뭔가를 다짐하고 깨닫고 그러나요…? 저는 그런 게 1년에도 손에 꼽을 정도인데… 아무튼 그래서 일기 쓰는 게 정말 재미없더라고요. 저는 매일매일이 똑같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일기를 다시 돌려보는 게 어떤 느낌인지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블로그를 다시 보는 게 어느 정도는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쨌든 저의 지난날들을 계속 들춰보는 거니까요. 다만 제 블로그는 한 달에 한 번만 쓴다는 것과 일기와 다르게 먹는 사진 위주이고 거기에 덧붙이는 짧은 헛소리들로만 가득하다는 게 차이점일 것 같아요. 사진으로 저의 일상을 기록하다 보니까 글로만 쓴 기록보단 뭔가 더 자주 들춰보게 되는 것 같아요. 특히나 엄마와 함께 상해, 부산을 여행한 것도 기록했었는데 사진을 보니 제 머릿속에서 미화된 순간들이 새록새록 더 잘 떠오르더라고요.



집에서는 무엇을 하는 것을 가장 좋아해요?


저는 저녁 먹고 거실 겸 주방의 식탁의자에 앉아 가만히 TV로 넷플릭스를 시청하는 시간과, 잠들기 전 침대 조명등만 켜고 가만히 누워있는 시간을 제일 좋아해요. 이쯤 되면 가만히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자기 전 조명을 켜고 침대에 누워 어떤 생각을 해요?


놀랍겠지만 저는 눈앞에 무언가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안 하기를 제일 잘해요. 침대에 누워서도 그냥 누워있는 그 상태를 느끼는 것뿐이에요. 정말 단순하죠?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정말로 아무 생각도 안 하나요? 전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아무 생각 안 하기인데요.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이런저런 잡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잖아요.


어떻게 의식하지 않는데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죠?! 어떻게 하루 종일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죠?! 너무 골치 아픈 것 아닌가요?! 저는 진짜 눈앞에 뭔가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 생각도 안 해요. 아마 멍 때리기를 제일 잘할걸요.



그렇다면 평상시에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요?


음, 오늘 저녁 뭐 해 먹지? 이 생각이 90% 일 거예요. 1인 가구는 끼니 챙기는 게 생존 그 자체거든요. 그러다 생각이 길어지면 그냥 시켜 먹습니다.



요즘 관심 가지고 있는 게 있어요?


요구르트 유청 분리기요. 제가 집에서 그릭요거트를 만들어 먹는데, 항상 면 보를 이용해서 만들었거든요. 근데 이제 날도 더워지니까 이 면 보를 세척하고 삶아서 쓰는 게 정말 피곤한 일이더라고요. 깨끗한 지도 잘 모르겠고요. 그래서 고심 끝에 유청 분리기를 구매했어요. 시중에 파는 유청 분리기들이 너무 비싸서 면 보로 연명했던 건데... 제가 지고 말았습니다. 아직 배송 중이라, 얼른 새 유청분리기로 꾸덕꾸덕한 그릭요거트 만들고 싶어요.



효율충이면서도 그릭요거트를 직접 해 먹다니!


효율충이기 때문에 해 먹는 거죠! '매일 6천 원씩 하는 그릭요거트 사 먹고 파산하기 vs. 8천 원으로 그릭요거트 7일분 만들고 행복하게 퍼먹기’. 전 당연히 후자요. 파산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게 없으니까.



이 집에서 없으면 안 되는 물건 3가지를 뽑으라면 무엇이 있나요?


TV, 식탁, 에어컨. 아, 근데 에어컨은 여름 시즌 한정. 제가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구역이 바로 거실 겸 주방의 식탁인데요. 공간이 협소하다  보니 식사 공간 따로, TV 및 거실 공간을 따로 나눌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선택한 게 TV 앞에 4-5인용의 넓은 흰색 식탁을 두는 거였는데 너무 좋은 선택이었던 거죠. 식사도, 할 일도, TV 보기도 다 거기에서 이루어지거든요. 사실 처음에는 TV 볼 일이 자주 없을 줄 알았는데 제가 생각보다 미디어 중독이더군요. 여름에 에어컨을 틀고 식탁에 앉아 TV를 보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에어컨을 틀어 놓고 식탁에 앉아 TV를 보는 지연 씨의 모습이 상상되네요. 주로 어떤 콘텐츠를 봐요?


주로 살인, 추리, 미스터리 이런 장르의 드라마요.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저는 이 장르에만 엄청난 흥미를 느껴요. 이제는 하도 많이 봐서 대강 보면 쟤가 범인이네, 이런 방법으로 죽였네, 저렇게 은폐했네 등의 각이 나와요. 그러다 보니 보는 눈이 높아져서 이제는 제 마음에 꼭 드는 드라마를 만나기가 조금 어려워진 것 같아요. 제 뒤통수를 탁 치고 반전의 반전의 결말을 내는 그런 드라마, 이제 없을까요?



뒤통수를 탁 치는 반전의 반전이라… 본인을 만족시킬 콘텐츠가 더 이상 없다면 직접 뛰어드는 것은 어때요?


제가 오빠가 하나 있는데, 몇 년 전에 저에게 똑같은 말을 하더군요. 이 정도 봤으면 네가 직접 할 때가 됐다. 근데 저는 그때도 똑같이 말했어요. 그럼 난 표절 시비 붙어서 사회에서 매장된다. 워낙에 본 게 많아서 여기저기 짬뽕된 콘텐츠를 만들다가 망할 거예요. 저는 평생 보는 입장으로만 즐길래요.



지금 이 집에 만족해요?


독립 첫 집으로는 아주 만족해요. 방도 두 개라 공간을 구분할 수 있고 베란다도 있어서 빨래 건조도 아주 좋거든요. 그리고 제일 좋은 점은 교통이 편리한 거예요. 버스정거장과 지하철역 모두 1분이면 가는 초역세권이거든요. 다만 살다 보니 다음 집은 이랬으면 좋겠다 라는건 있어요. 바로 채광입니다. 지금 집은 해가 잘 드는 편이 아니라 낮에도 형광등을 켜야 되거든요. 낮에 불을 켜지 않고도 환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집! 그게 제 다음 소망입니다.



낮에 불을 켜지 않고도 환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집이라면 지금보다 독서량이 많아질까요?


확답은 드릴 수 없지만 아마도요?(웃음) 해가 잘 들면 TV를 잘 안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부모님 집에서 느낀 건데 저희 부모님 집은 해가 너무 잘 들어서 집에서도 피부가 타는 곳이거든요. 저는 처음에 왜 형광등을 이렇게 환하게 켜놨지 했는데 그냥 사방으로 해가 잘 드는 거였어요. 근데 이런 집에 있다  보니까 가만히 앉아서 TV 보는 게 시간이 너무 안 가고 뭔가 막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게 만드는 거예요. 제가 사는 곳도 해가 잘 든다면 TV는 덜 보게 될 것 같은데, 그게 부디 독서량이 느는 결말로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이러다가 책은 안 읽고 요거트만 대량생산하는 건 아닐지...



책 읽는 것을 좋아해요?


좋아하려고 노력해요. 노력형 독자랍니다. 어렸을 때는 애거서크리스티 전집 읽는다고 맨날 도서관 가서 책 빌렸는데, 회사 생활하니까 책 보는 게 너무 에너지 소모가 큰 거예요. 그래서 멀리하다 보니 어느새 예전보다 글을 빠르게 못 읽고 긴 글 요약하는 걸 어려워하는 저만 남더라고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회사 복지포인트로 책을 조금씩 사기 시작했어요. 읽다 보니까 책이 또 술술 빠르게 읽히는 게 재밌어서 더 신나게 읽게 되더라고요. 진짜 살면서 책은 절대 멀리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책을 멀리하면 왜 안될까요?


위 질문의 답변처럼 '글을 빠르게 못 읽고 긴 글을 요약하는 걸 어려워하는 저'만 남았기 때문이죠. 저는 그래도 맨날 서류도 읽고 글도 작성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책을 안 읽으니 이게 점점 능력치가 훅훅 떨어지더라고요. 특히나 조금만 복잡한 글이 나오면 그걸 몇 번이고 계속 다시 읽게 돼요. 머릿속에 빠르게 안 들어와서요. 이런 걸 느끼고 나니 진짜 책이 괜히 중요한 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재미도 있으면서 글 읽는 실력도 늘고, 얼마나 좋은 친구예요!



집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부분이 있나요? 실내 인테리어, 주변 인프라 등등의 요소들 중에서요.


사실 다 중요하지만 제일 우선순위를 뽑자면 저는 주변 환경이요. 어렸을 땐 당연한 건 줄 알고 소중함을 잘 몰랐는데 독립하고 나니 주변 인프라가 좋다는 게 제일 큰 장점이더라고요. 교통, 공원, 마트, 병원, 백화점 등 다양한 시설에 접근성이 좋은 게 혼자 살아가는 데에는 여러모로 많은 힘이 돼요.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가고, 운동하고 싶을 땐 공원에 가고, 음식을 만들다가 모자란 식재료가 있다면 곧장 마트에 가고. 주변에 바로바로 그런 시설들이 있다는 건 혼자 사는 삶을 조금 더 잘 흘러가게 해주는 원동력 같은 거예요.



인프라가 좋은 곳에 살고 있다니 부러워요. 혹시 동네에 나만이 알고 있는 좋은 상점이나 카페가 있어요?


혼자 살고 나서 제일 안 가는 곳이 카페라 제가 알고 있는 게 잘 없어요... 근데 추천하고 싶은 상점은 하나 있어요. 바로 야채 상점입니다! 분위기 있는 집은 잘 모르지만 이런 필수 상점은 자신 있게 소개해 드릴 수 있어요. 이 상점은 저만 알고 있는 곳은 아니고, 이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곳이지만 저에게는 정말 없어선 안 될 소중한 곳이에요. 특히나 1인 가구는 마트에서 야채 사면 정말 비싸잖아요? 그래서 저는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풍족한 야채 라이프를 즐길 수 없었어요. 평소에 야채를 좋아해서 엄청 많이 먹었는데 갑자기 야채가 돈이랑 직결되니까 쉽게 사 먹을 수 없더라고요. 근데 이 야채 상점이 생기고 나서는 다시 풍족한 야채 라이프를 즐기게 되었어요. 직판장이라 가격이 정말 저렴하고 물건들도 엄청 신선하거든요!



야채 직판장이라니! 부럽다! 집이 있는 이 동네는 어때요?


이 동네는 제가 가족들과 함께 살 때부터 가장 오랜 시간을 거주한 동네예요. 그래서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 처음 마주해 보는 일들에 불안하기도 했지만 익숙한 주변 환경이 주는 편안함에 조금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었어요. 제가 이 동네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 송파 둘레길이거든요. 몇 년 전에 처음 생겼는데, 탄천을 보며 자연이 우거진 곳을 걷는 게 너무 좋아요. 도심에서 만나는 작은 시골 느낌? 제가 유일하게 하는 운동이 걷기 운동인데 탄천을 따라 쭉 걷다 보면 맑은 공기도 마시고, 푸릇한 풀내음도 맡고, 또 초여름에는 아카시아꽃 냄새를 실컷 맡을 수도 있어서 좋아요.



계절 별로 자연이 바뀌는 걸 바라보면 참 좋겠어요. 주로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나가는 편인가요? 아니면 운동이 부족하다 싶을 때마다 나가나요?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나가요. 퇴근하고 저녁을 먹은 후 저녁 8시쯤부터요. 보통 나가면 7킬로 정도를 걷는데 대략 1시간 20~30분 정도가 소요되거든요. 그럼 집에 와서 씻고 누우면 딱 좋은 시간이에요. 아, 근데 한여름은 예외입니다.



걸으면서 물론 별생각 안 하겠죠? 음악을 들으며 걷나요?


이제 저를 너무 잘 파악하고 계시네요. 네, 저는 노래를 들으면서 아무 생각 안 하고 걷기만 해요. 가끔 노래가 신나면 입으로 뻐끔뻐끔 소리 없이 불러보기도 하고요. 특히나 운동을 하면 더더욱이 아무 생각도 안 하게 되거든요. 정말 몸만 움직이는 상태가 돼요. 근데 그게 참 좋더라고요.



지금 이 집과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 한 곡을 선곡한다면요?


죠지의 Boat요.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죠지의 목소리나 곡의 멜로디가 너무 평화롭게 들렸어요. 집은 이 세상에서 저에게 가장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는 곳이에요. 침대에 누워 이 노래를 들으면서 천장을 바라보면 아무 생각 없이 평화로운 기분만 느낄 수 있어요.



이 집이 지연 씨를 잘 표현해 준다고 생각하나요?


시각적으로만 봤을 땐 그냥 정말 평범한 집 그 자체예요. 전세이기 때문에 벽에 못도 못 박는 처지거든요.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한 집이라 제 취향과 의도가 들어간 인테리어라는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저는 이 집에 애착이 있어요. 난생처음 전등도 갈아보고, 수도관도 고쳐보고, 전동 드릴로 가구들도 조립해 보고. 이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다 제 손을 거쳤거든요. 오롯이 저 혼자만 관리해 나가는 공간이기 때문에 의미만 본다면 저를 잘 표현하는 걸 넘어서 그냥 제 자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집안에 있는 물건 중 가장 애착이 강한 것이 있나요?


이런 것도 되나요? 애플워치요.



와, 역시 매우 실용주의자 같은 대답이네요.


애플워치는 저와 함께 한지는 곧 1년이 되어가는데 이제 저에게는 없어선 안될 필수품이 되었어요. 특히 워치를 차고 자면 아침 알람 시간에 손목 진동으로 일어나라고 쉴 새 없이 알려주거든요. 혼자 살 때 가끔 안 좋은 점이 실수로 늦잠 잤을 때 아무도 깨워줄 사람이 없다는 건데 애플 워치를 사용한 이후에는 한 번도 늦잠 잔 적이 없어서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애플워치가 매우 작은 룸메이트 인 셈이네요. 저는 평상시에도 방해금지 모드를 애용하는 사람으로서 애플워치의 알람이 매우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나요?


우와, 저 지금 엄청 충격받았어요. 저는 방해 금지 모드를 절대 쓰지 않아요! 이렇게 다를 수가… 방해금지 모드는 대체 왜! 쓰는 건가요? 제가 더 궁금해요. 제가 인터뷰하고 싶어요!



하하하. 특별히 연락이 올 곳이 없고, 무언가를 집중해서 하는 중이라면 방해금지 모드를 켜놔요… 그렇다고 핸드폰으로 딴짓을 안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집중력이 쉽게 흐트러지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잘 알아서 미리 방지하려는 것도 있고요. 지연 씨는 방해를 받아도 금방 하던 일로 돌아갈 수 있나요?


저는 평일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기 때문에 연락이 잘 닿아야 한다는 점도 있지만, 지루한 업무 시간 속에 좀 방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친구들이요. 회사 사람 제외. 그리고 바쁠 때에는 연락이 온 걸 알아도 그냥 안 봐요. ‘나중에 몰아서 해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고이 접어두죠. 또 주말에는 제가 핸드폰을 보고 싶을 때만 보니까 딱히 방해랄 게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정말 방해금지 모드를 피해 가는 사람인가 봐요.



지연 씨에게 집이 가지는 의미는 뭐예요?


가족과 함께 살 때는 집이라는 게 단순히 거주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독립하고 난 후 저에게 집이란 그냥 제 자체가 되었어요. 혼자 산다는 건 결국 집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 제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공간 자체가 본인이 되었다는 표현이 참 맞는 것 같아요. 이 공간이 지연 씨에게 끼치는 긍정적 영향력이 있나요?


심신의 안정이요. 부모님과 살 때도 몸과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혼자 사는 곳에서 느끼는 편안함은 정말 결이 다르더라고요. 타고난 기질 자체도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은데, 혼자 살고부터는 이 부분이 더욱 단단해진 것 같아요. 몸과 마음이 안정적이라고 느끼니까 하나의 일에 일희일비할 이유가 전혀 없더라고요.



매우 단단한 사람 같아요.


제가 아직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못 봐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요.



큰 우여곡절 없이 자랐나요?


우여곡절이라... 생각해 보니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생각하는 인생의 우여곡절은 사기, 사고, 입원, 수술, 이혼, 장례처럼 제가 감당하기 큰일이라던지 아니면 사무치게 한이 남는 일 등으로 여겨지거든요. 미래에는 언제가 겪을 일들도 있지만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없어요. 근데 평생 아무 일도 안 겪었으면 좋겠네요.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게 있나요?


왜 그런 편견들 있잖아요. 혼자 살면 대충 살 것 같고. 끼니도 대충 때울 것 같고, 스스로를 잘 케어하지도 않을 것 같은. 부모에게서 떨어져 나온 불완전한 존재처럼 여기는 거요. 저는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이런 시선들이 제일 불편했어요. 저를 지켜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저, 정말 잘 살고 있지 않나요?



네, 정말 정말 혼자서 잘 살고 계시죠.


저는 저에게만 온전하게 시간을 쏟을 수 있는 이 시간들이 너무 좋아서 더욱더 잘 살고 싶어요. 그럴 자신도 있고요. 그래서 자취라는 말보다 독립이라는 단어를 더 강조해서 써요. 우리나라에서 자취는 부모님의 지원 아래 잠깐 따로 살지만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일시적인 현상처럼 말하잖아요. 근데 전 1부터 100까지 오롯이 혼자서 모든 걸 이뤄나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거든요! 완전한 독립인으로서 평탄하게 잘 살아가는 거 그게 제 평생 목표예요.



항상 응원합니다. 완전한 독립인으로 우뚝 서서 평탄히 잘 살아가길 기원해요. 그래도 독립의 과정에서 가족이나 타인의 도움이나 협동이 필요한 적은 없었나요?


시작할 때는 필요한 적이 정말 정말 많았죠. 근데 정작 도움을 받지는 못했어요. 저는 특히나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부모님이 저로부터 독립하셔서(웃음) 얼결에 따로 살게 된 거라 그때 당시의 저는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양이었거든요. 저 진짜 갑자기 길거리에 나앉은 느낌이었어요. 심지어 공과금을 어떻게 내는지도 모르고, 전기밥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잘 몰랐어요. 부모님과 살 때는 진짜 몸만 살았다는 게 인증된 셈이었죠. 더군다나 부모님은 지방으로 내려가셨기 때문에 제가 당장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도 저를 보살펴 주기가 어려웠고요. 그러다 보니 하나하나 직접 해보면서 체득했어요. 밥도 몇 십 번 망해 보고, 공과금도 까먹고 못 내다가 나중에 겨우 자동이체 걸고, 해먹을 줄 아는 음식도 없어서 유튜브로 김치찌개부터 배우고, 이때 처음 김치도 사봤어요. 야채관리법도 하나하나 찾아보면서 익히고. 아, 지금 사는 집은 처음에 부모님이 부동산에서 구해다 주셨는데, 정말 딱 거기까지였어요.(웃음) 전세 대출도 제가 서류 바리바리 준비해서 며칠 동안 은행을 집처럼 들락거리며 겨우 받고, 부동산에서 계약서 작성도, 집주인과의 손  떨리는 잔금도, 동사무소 확정일자랑 전입신고도 그냥 제가 혼자 가서 다 했어요. 근데 제가 뭘 알아가지고 척척한 게 아니라 그냥 해야 되니까 얼레벌레한 거죠. 결론은 부모님이 나를 어이없을 정도로 강하게 키웠다! 강한 독립심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의도치 않게 탄생했다!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갑작스레 완전 독립의 상황에 내던져졌네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데, 어쩔 수 없이 독립인으로 성장해 버린... 근데 아주 잘.


하하하. 맞아요.



마지막으로 집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내 첫 독립 집. 널 만나고 혼자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나 스스로를 관찰하고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어. 가족과 함께 살 때는 부모님의 생활 패턴이 내 생활 패턴이고, 부모님의 취향이 내 취향인 줄 알았는데 스스로 살아나가는 과정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걸 좋아하는지 그제야 찾아가기 시작했거든. 내가 청소도 대충 해주는데도 나랑 잘 살아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이대로만 날 지켜줘!


2023년 7월의 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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