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찾아온 작은 흔들림…2
물론, 전 암스테르담이 보고 싶었죠. 레스토랑도 암스테르담에 더 맛집이 많았고, 저희 회사는 화학회사였기 때문에 공장이 있는 도시들은 대부분 작고 구경거리가 별로 없었거든요. 그래서 엉겁결에 프렌치 보스와 단둘이 암스테르담을 구경하게 되었네요. 저희는 회사에서 매일 보는 사이고 출장도 여러 번 같이 다녀봤는데, 단 둘이 일이 아니고 놀러 다니는 건 처음이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혼자 돌아다니는 게 낫겠다 싶기도 했지만, 렌터카로 같이 이동해야 해서 따로 다니는 게 그리 간단한 일만은 아니었죠.
이제와 돌이켜 보면, 우린 기억도 나지 않는 작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시간이 남아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습니다. 유럽인이라 그러신 지 자유분방하셔서 카페 안에 들어가 ‘마리화나’도 구매하시더라고요(암스테르담은 개인 판매는 불법, 구매는 합법입니다). 그러더니 같이 발마사지를 받으러 가자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암스테르담에서 발마사지?? 아는 곳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시간이 남아서 가긴 했는데, 그곳이 1층은 그냥 마사지샵인데 지하 1층에선 다른 추가서비스를 하시는지 좀 이상한(?) 소리가 나서 맘 편히 마사지를 받을 수가 없었네요. 이렇게 제겐 하나도 평범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며 우린 숙소인 호텔에 도착했고, 한잔 하겠냐는 질문에 부담 없이 ‘Pourquoi pas?(한잔 못 할 이유가 없죠?)’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번 출장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상한데, 프렌치 보스는 말에 느끼함이 없어서인지 담담하게 ‘이거 할래? 저거 할까?’라며 묻는 말들이 하나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가 술 한잔하고 각자 방으로 돌아가는데, ‘내일 아침에 니 방에 8시까지 데리러 올게…’라고 하는 거예요. ‘방으로 데리러 온다고??’…. 전 방 문을 닫으며 이건 진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출장 가서 아침엔 각자 알아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로비에서 만나는 게 보통이었거든요. 어쨌든, 전 ‘착각은 금물’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냥 프렌치 치고는 좀 지나치게 친절한(?) 보스라고 생각하기로 했답니다. 그렇게 저희의 일탈스러운 출장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는데, 회사 안에 무슨 소문이 도는 것 같았어요. 단 둘이 다녀온 출장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어느 주말에 애 아빠랑 살짝 언쟁하는 중에 뜬금없이 그러더라고요. ‘출장 가서 그놈 하고 재미가 꽤 좋았나 보네?’라고…. 아시다시피 저와 애 아빠는 소속은 다르지만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어서 저희 보스랑도 다 잘 아는 사이였죠. 전 처음엔 무슨 소린지 모르다가 그 말이 ‘암스테르담 출장’ 얘기였다는 걸 알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전 그냥 무슨 헛소리냐며 무시해 버렸답니다.
소문이야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제 회사생활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고, 프렌치 보스는 평소와 다름없이 절 대했기 때문에 저도 ’ 내 착각이 좀 지나쳤었나 보다 ‘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무렵쯤 저의 송별회 날이 다가왔습니다. 몇몇 동료들과 식사를 하고, 샹젤리제에 있는 게이 나이트클럽을 갔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거기서 술을 좀 마셨고, 시간이 늦어져서 어떻게 집에 갈까 걱정하며 클럽에서 나오는데 프렌치 보스가 따라 나오며 택시 타는 곳을 알려주겠다고 했어요. 전 진짜 감사했죠. 파리 특히 샹젤리제 근처는 밤에 택시 잡기가 진짜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택시 있는 쪽으로 걸어가다가 그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오늘 받은 선물이 맘에 드냐고 묻더군요. 전 동료들에게 귀걸이를 선물 받아서 착용하고 있었거든요. 전 ‘예뻐요’ ‘감사해요’라고 말하며 그를 쳐다봤는데,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제 오른쪽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이건가요? 예쁘네요’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렇죠. 아무리 둔해 빠진 저라고 해도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듯했어요. 동시에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죠. 술 탓인지, 아님 장소나 분위기 탓인지… 순간 ‘이 사람 내게 키스하려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냥 우린 서로를 마주 보다 마치 꿈에서 깬 듯 어색하게 다시 걷기 시작했죠… 그가 택시를 잡아주었고 전 ‘Merci. Bonne
nuit! (감사해요. 안녕히 가세요!)‘라며 그의 뺨을 스치는 가벼운 인사를 하고 돌아섰습니다. 그 밤은 실제론 꽤나 더럽고, 밤엔 위험한 파리가 마치 영화 속의 도시처럼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전 사실 살짝 들떴었고 또 설레었죠. 하지만, 그건 정말 ‘한 여름밤의 꿈’ 일뿐이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글이 19금이 될만한 야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네요. 아마도 아무 일도 없었기에 오히려 제 기억 속에 더 영화처럼 양각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네요. 몇 년의 시간이 지나 들은 이야기인데 저의 야심 넘치던 프렌치 보스는 곧 승진했지만 여직원과의 루머로 회사 내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단 둘이 출장 가고 했던 건 제게만 일어난 일은 아닌 듯싶네요. 그리고 제 기억 속에 그렇게 프레쉬한 이미지로 남아있던 보스도 지금 다시 사진을 보니… 살짝 실망스러움이…ㅎㅎ 그 영화 같던 이미지들은 참고 버티던 결혼생활의 스트레스 때문에 제 기억 속에 잔뜩 미화된 파리에서의 추억 속의 한 페이지 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