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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수영 Apr 13. 2023

97. 잘 부탁드린다는 말은 사절입니다.

임신과 출산에 관한 이야기(9)


그녀는 외래에서도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했고 오늘 아침 회진 때도 그 이야기를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수술장에서 마취가 된 후에 또 나에게 잘 부탁한다 라는 말을 세번째로 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떠한 말이건 3번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여러 번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덜 신경 쓸거라고 생각하는 신뢰의 문제일 수도 있고 본인의 강박적 증세일 수도 있다.


수술을 많이 할수록 어려운 수술을 만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수 년전 10개 이상의 근종을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았었기에 복강내 유착이 충분히 예견되었다. 피부와 피하지방층을 지나 근막과 근육층을 만나면서 나는 점점 복강내 유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관할 수 있었다. 마치 텐트처럼 쉽게 들려야 하는 복막은 박스에 들러붙은 넓은 테이프 같이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기에 이제 유착과의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복막은 자궁벽과 단단하게 붙어 옴짝달싹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가급적 메스 등의 기구를 적게 사용하고 손을 많이 써서 조직들을 박리를 하는 것이 유착된 주변 장기 (방광 또는 장) 의 손상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이미 나의 손가락 근육 들은 힘에 부쳐했다.  


그런데, 그 힘든 박리의 과정을 거쳐 겨우 자궁의 겉면을 보게 된 순간, 설상가상으로 태아의 위치마저 도와주지 않음이 확인되었다. 분명히 3일 전까지 머리가 아래로 있었는데 절개해야 할 부분에 아기의 머리가 있지 않고 태아의 손으로 생각되는 것이 만져졌다. '우이씨, 이 와중에 transverse lie ?' (횡아, 아기가 자궁에 옆으로 누워있는 경우로 약 300명 중의 1 명을 차지한다.) 유착으로 배속이 소위 말해서 떡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아기가 횡아로 있다는 것을 그야말로 엎친대 덮친 격이다. 여기에 심지어 아기는 컸고, 산모의 복벽은 두꺼운 편이었다.


자궁 절개를 하자 아기의 팔이 나왔다. 아기는 원래 팔이 먼저 나와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이 산과의 족보다. 팔을 다시 자궁으로 집어넣으려고 했지만 들어가지 않았고 무엇보다 횡아 중에서도 등이 아래로 있기에 발을 만질 수 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횡아 중 아기의 등이 아래로 있는 경우는 아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은 경우로 악명이 높다.) 아기의 머리를 찾자. 머리의 축을 따라서 돌리려면 적어도 아기의 팔이 자궁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아기의 통통한 팔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런 수술에서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태아 뼈의 골절과 목의 과신전으로 인한 손상이다. 그 중대한 합병증을 피하기 위해서는 수술 시야를 더 확보해야 한다. 나는 이를 위해 자궁을 세로로 더 절개하고 심지어 근육층의 일부를 절개하였는데 그래도 아기는 나오지 않았다. 등과 양쪽 손이 나왔고 머리는 숙이고 있는 상태였다. 수술장은 외로운 전장과 같다. 어떻게든 아기를 꺼내야 할 사람도 나고 책임질 사람도 나다. 유착만 심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힘든 수술은 아니었을텐데... 자궁의 절개 후 아기의 만출까지 몇 분의 시간은 수술장에 있는 모든 의료진들에게는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기가 나오는 마지막 단계에서 (원래 가로인) 피부의 절개 부위를 세로로 연장하는 초유의 수술을 집도하였다. 결국 아기는 나왔고 다행히 너무나 다행히 아기는 손상없이 신생아실로 갈 수 있었다.


오늘의 수술은 나의 영혼과 신체를 모두 갈아 넣은 수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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