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4시간의 긴 인터뷰를 마치고 아니 화장 (분장)까지 포함하면 총 5시간이었다.
이후 줌으로 학위 심사에 참석하고, 저녁 7시부터 2시간의 학회 회의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뻗었기에 신체는 어떠한 감정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3주간의 촬영이 마무리된 오늘, 힘든 오후 외래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니 진이 빠질대로 빠져 머리를 쓰는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었지만 타버린 촛불이 촛농을 남기듯 기록이라도 남겨야 나중에 후회를 덜할 것 같아 몇자 끄적여 본다.
약 한 달 전 병원의 커뮤니케이션실을 통해서 명의 촬영 요청이 왔다. 나는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이전에 [명의]에 나가본 적이 있는 친구 (흉부외과 양지혁 교수)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래도 산부인과 의사로서 너의 인생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촬영해보라는 친구의 말에 나의 팔랑귀는 응답했으며 결국 찍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3주간의 촬영 시간은 물리적으로 힘들었고 나의 선택에 대해 후회되는 순간도 있었다.
[고위험산모]에 대해서 알린다는 취지는 매우 좋았다. 불필요한 자궁경부봉합수술 또는 근종 수술에 대한 이야기도 전하며 '근거중심' 의료에 대해 강조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최은경, 박주형 교수와 같이 쓴 책 [아름, 다운증후군]이 출간을 앞두고 있어서 덩달아 홍보도 되면 좋겠다는 흑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힘든 점은 [고위험 산모]에 해당되는 산모들의 구체적 사례 중 어떤 경우로 할 지를 내가 선정하고 해당 산모에게 인터뷰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물론 실제 대부분의 인터뷰 부탁은 감사하게도 외래 이새미 간호사와 병동의 전공의 선생이 주로 했지만) 산모들 중 누가 인터뷰의 조건에 적절할지 숙고하여 정하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다행히 감사하게도 내가 찜한 대부분의 산모가 촬영에 응해주었다. 물론 거부한 경우도 있었지만.
A 산모는 아예 출산 과정 (질식분만)을 찍는 것을 흥쾌히 동의해주었기에 아기 탄생의 순간이 생생하게 담길 수 있었다. B 산모는 쌍둥이 임신에 임신중독증, 그리고 자궁내태아발육지연으로 입원하여 한 달 정도를 끈 경우로 수술 과정을 포함하여 모든 촬영에 대해 동의해 주었기에 결국 수술장의 팽팽한 긴장감과 현장감이 살아있는 영상이 촬영될 수 있었다.
한편, 밤에 콜을 받고 병원으로 나오는 상황을 찍기는 어려웠다. 새벽 3시에 촬영팀에 연락할 수도 없거니와 응급수술을 요하는 산모와 태아의 긴박한 상황에서 촬영 동의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산과적 응급상황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새벽 3시의 수술을 빼고는 나의 산과의사로서의 삶을 나타내기는 어려웠다. 조화보다 생화인 것처럼.
촬영 2주차가 되면서 김PD는 새벽에 응급수술이 생기는 경우라도 꼭 연락을 달라고 부탁해왔다. 야간에 내가 수술장에서 나오는 장면이라고 생생하게 담고 싶어했던 것이다. 어느 일요일 새벽, 실제로 C산모를 응급수술을 해야 되는 상황이 생겨 나는 전화를 했고 김PD는 일산에서 택시를 타고 와서 계획대로 수술장에서 나오는 모습을 촬영했다.
산과적 고위험의 중요한 부분인 태아의 이상 중 심장기형에 대한 내용이 담기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활로 4징이라는 심장질환으로 수술을 받았던 노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제작진에게 했고 제작진은 제주도까지 가서 산모에 대한 인터뷰 및 다운증후군을 가진 노을이의 모습을 담아오고 싶어했다. 나는 노을이 엄마에게 연락을 했고 그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감사히 인터뷰에 동의를 해주었다. 세 명의 오빠들 사이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할 노을이의 모습이 담기면 선천성 심기형 및 다운증후군에 대한 걱정과 편견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제의 인터뷰는 체력전으로 시작되어 4시간이 좀 넘게 진행 되었다. 집중되는 카메라와 조명속에서 2시간을 떠들고 나니 목이 갈라지고 갈증이 났다. 약 10분의 쉬는 시간 후 다시 시작하는 참에 김PD는 탭을 나에게 건네며 이걸 한 번 보라고 했다. 뭘 보라는 것일까? 어머나! 제작진이 제주도에서 노을이 엄마가 영상 편지를 담아온 것이었다. 영상을 보면서 나의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고 결국 영상이 끝날 무렵 내 눈물 샘은 폭발했고 나는 오열했다. 꺼이 꺼이 울면서 나는 노을이 엄마가 진료실에 처음 온 날, 그리고 노을이의 사진이 [아름, 다운증후군]의 책 표지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했다. 세상에 인터뷰를 하다가 대성통곡을 하다니 지나고 보니 제작진들 앞에서 부끄러운 노릇이었지만 그 순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3주간의 촬영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방영 시간보다 10 배 이상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그래도 임신과 출산, 생명 탄생의 순간의 힘들지만 감동적인 순간을 전달할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는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될 것 같다. 특히 노을이 부모의 영상 편지는 정년퇴임까지 아니 죽을 때까지 간직할 너무 소중한 선물이었다. 감사하다.
2023.12.15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