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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수영 Jun 15. 2024

120. 이 웬수야

30번째 당직, 응급실로 온 21주 양수과소증이 있는 L 산모의 초음파를 보고 있었다.


A 간호사가 초음파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는 나의 뒤통수에 대고 K 전공의 선생이 태동이 줄었다고 응급실로 왔는데 태아 심박동이 분당 90대에서 회복되지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뭐라구요? 그럴 리가 없었다. 산전에 아무런 위험인자가 없었고 초음파에서 이상소견이 없었다고 들었다. 내가 산모인 K 전공의를 진료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갑작스럽게 아기의 태동이 감소하고 심박동이 저하되는 일들과 관계 있는 태반조기박리 등의 증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자궁내태아발육지연, 노산, 혈압 등의 위험인자도 전혀 없던 아기는 왜 심박동이 떨어졌을까?  


보던 초음파를 급하게 마무리하고 portable 초음파를 끌고 K 가 누워있는 진통실로 갔다. 초음파가 켜지지 않는다. 충전이 안된 거라고 한다. 1분이 급한데… 콘센트를 꼽는 순간 초음파 기계는 켜졌지만 부팅이 되는데 1분의 시간이 또 걸렸다. 오늘 오후부터 태동이 거의 안 느껴졌다고 하는데 왜 이 시간 (저녁 9시 9분이었다)에 늦게 온 것일까? 더군다나 저녁을 8시에 먹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화가 머리로 치밀어 올랐다.(수술을 하려면 금식 시간이 중요하다.) 초음파로 확인한 아기의 심장은 힘없이 펄떡거렸다. 마치 떨어져가는 노오란 은행나무의 낙엽같이. 심장은 소나무 같이 굳세게 뛰어야 한다. 초음파를 보는 시간 동안 점점 아기의 심박동이 떨어지는 것으로 느껴졌다. 


초응급수술을 결정했다. 자, 이제 순서대로 해야 한다. 먼저 마취과에 초응급수술을 알리기 위해 전화를 했다. 수술을 혼자 할 수 없기에 어시스트를 해줄 다른 산과 교수를 불러내야 한다. 성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방금 집에 도착한 그녀는 출발하겠다고 짧게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수술을 하려면 이 병원의 전산 지배자인 다윈이라는 커다란 시스템에 '등록'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수술 등록 화면은 칸이 너무 작아서 수술방을 정하고 원하는 수술 시간을 입력하기 위해 드래그를 잘 해야 한다. 마치 긴 엑셀 화일을 드래그 하다 보면 줄이 헷갈리는 것처럼 몇 번의 시행 착오가 끝에 겨우 수술 스케줄을 입력했다. 그 순간 마침 부인과 당직을 서고 있던 김 교수가 분만장에 원더우먼처럼 와주었다. 어떻게 알고 온 것일까? 성 교수가 연락을 한 것이었다. 고마웠다.


이제 신생아중환자실에 연락을 해야 한다. 평상시 보다 핸드폰 전화번호를 입력하는 시간이 느려진다. 나의 긴장 때문이다. 우리 전공의 였다. 비극은 내가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확률적으로 발생한다. 지인의 비극은 객관화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아는 사람의 아기가 잘못되는 것은 더 비극이다. 


내가 수술장 간호팀에 연락을 하는 동안 김교수가 수술 동의서를 받았고, 분만장 간호사들은 전투병처럼 일사불란하게 피검사를 수행하고, 정맥주사를 하고 수액을 연결하였으며, 예방적 항생제를 투여하고 소변줄을 끼는 등 수술 준비를 마쳤다.(늘 고맙다) 아기의 심박동은 이제 70 대가 되었다. (정상은 분당 110-160회이다. 70 대는 심한 서맥이다) 


침대를 직접 끌면서 분만장 문을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호자 (이 친구도 제자이다)에게 “같이 끌어!” 라고 소리를 질렀다. 분만장 간호사 2명와 2명의 산부인과 교수 그리고 보호자가 침대를 끌고 3층 수술장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산모가 병원에 도착한 지 정확히 21분 후였다. 


수술장 입구에서도 아기의 심박동은 여전히 70대, 이 병원에 도착한 이후 한번도 정상 심박동을 보인 적이 없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일까? 이미 나의 심박동이 태아의 심박동 수를 넘긴 지 한참 되었다. 탕탕거리는 나의 심박동을 느끼며 아까 분만장에서 잠시 본 10초의 초음파 영상을 머리속에 되돌려 감기를 했다. 그렇지, 통상적인 서맥은 아니었다. 심장의 심첨부(apex)가 약간 비틀어진 수축을 보인 것 같았다. 부정맥일까? 태아의 부정맥은 드문 일이 아니지만 대개는 간헐적이고 일시적이지 이렇게 갑자기 발생하여 지속되는 경우를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만약에 부정맥이라면 몇 분 사이에 아기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의 심박동은 안정을 되찾았다.

 

수술장 입구에서 환자 확인을 하고 15번방 수술방으로 침대를 밀고 들어갔다. 마취과는 거의 2분 만에 척수마취를 완료해주었다. 감사했다. 평소 같으면 인턴 선생이 할 베타딘 수술 부위소독을 해야 했다. 불룩 나온 산모의 배를 소독 거즈로 마치 샤워 스폰지로 몸을 닦는 것처럼 박박 문지르며 나는 주문을 외웠다. 이후 손 스크럽을 하면서 나는 다시 한번 주문을 외웠다. 우리가 최선을 다했으니 아기가 건강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배를 열고 겹겹이 펼쳐지는 복벽의 구조물들을 가르고 마침내 자궁을 절개하고 마침내 아기가 나온 시간은 9시 50분이었다. 집에서 얼마나 오래 태아서맥 또는 부정맥이 지속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는 41분만에 아기가 나온 것이다. 아기는 탯줄을 2번 목에 감고 있었고 첫울음을 터뜨렸다. 수술장의 모두를 안정시키는 것이 아기의 울음이다. 아기를 소아과에 건내 주고 이제 배를 닫는 동안 나의 교감신경의 과도한 업무가 마무리되었다. 


아기는 출생 후 오히려 분당 250회 정도의 빈맥을 보였고 신생아중환자실에 입원하여 아데노신이라는 항부정맥 약물을 3번이나 투여하고 나서야 정상 심박동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어서 다른 산모의 응급 수술을 하나 더 했어야 했다. 이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 가서 아기를 보니 아기의 심박동은 이제 140대로 안정화되었다고 한다. 꼬물거리는 아기 팔다리의 귀여운 몸짓은 혹사당한 나의 교감신경을 위로했다.

 

나는 아기의 사진을 찍어서 K 에게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현재 아기의 심박동이 정상이 되었다는 멘트와 함께. K는 너무 감사하다고 답장했다. 나도 답장했다. 이 웬수야!

오늘의 수술로 또 평균 수명이 1년 줄어든 느낌이다. 뭐 어차피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 나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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