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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호 Sep 16. 2022

오늘 아빠가 죽어야만 해

22살의 나는 장례식은 무조건 3일장으로 치러지는 줄 알았다. 그랬던 22살의 한 여름날, 나는 ‘오늘 아빠가 죽어야만 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일요일 오전에 토익 시험도 보러 가고, 점심에는 운 좋게 당첨된 파티에도 가고, 저녁에 엄마랑 뮤지컬도 보러 갈 수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한지 두 시간쯤 지나서, 아빠는 정말 죽었다. 슬프지는 않았으나 그저 멍하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일찍 퇴근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같이 일하시는 선생님들께 말하고 도서관을 나왔다. 병원에 가려고 짐을 챙기던 중에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언니는 오늘 올 필요는 없고 내일 발인을 하니까 아침까지 오라고 말했다. 어차피 가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더 이상 생각이란 걸 하기 싫었다. 그래서 짐은 한구석에 놓고, 수면제를 먹고, 알람을 맞추고, 잠에 들었다.

나는 정말이지, 너무 피곤해


  다음날 나는 까만 옷을 입고 요양병원에 딸린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큰아빠들과 사촌오빠들, 그리고 언니와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왔나”하고 맞아주는 대신, “쟤는 머리도 노랗고, 얼굴도 허얘갖고 꼭 외국인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영안실에 들어가서 아빠의 시체를 보았을 때도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할머니는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라고 흐느끼면서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매일 술과 담배를 하며 밖에 나가지도 않는 아빠가 언젠가 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는 걸 할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알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무능하나 자신이 비운의 천재인 줄 알고, 언니를 때리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자상한 척하는, 그런 사람이 아빠였다.

그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다른 사람을 '피래미'라고 불렀다.


  입관이 끝난 뒤 친척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강서구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덥고 습한 8월 초, 땀에 전 슬랙스를 입고 있었지만 집으로 가서 쉬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자신이 망가진 이유를 찾아 떠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하면 누군가 내 인생을 비평해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방학 중의 학교는 열려있었으나 사람은 없어 적막했다. 그렇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몇 층을 올라가 고3 시절 자주 울러 갔던 급식실 계단에 앉았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날 만큼, 한참을 멍하게 앉아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기에 앉아 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강서구에서 내가 다니는 대학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다. 하지만 그건 자취를 결정하는 데 있어 두 번째 이유였다. 첫 번째 이유는 할머니가 나를 숨 막히게 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아빠를 감싸고돌았고 때때로 나에게 소리를 질렀고 내 뺨을 때렸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할머니와 마주치는 게 두려워 거실로 나가는 걸 최대한 자제했다. 도망치듯이 자취를 시작하고도 할머니와 연을 끊지 못한 것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8살 때 이혼을 했다. 그때 할머니가 모든 걸 버리고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우리 자매를 키우셨다. 언니와 나는 할머니의 악착같은 생활력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렇기에 할머니를 증오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상처를 준 사람이 나를 살려줬다고 해서 사랑할 수는 없었다.

애매한 것들은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내가,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


  할머니는 절에서 아빠의 49재를 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친척들과 함께 차를 타고 경북의 한 절로 갔다. 절에 가니 처음 뵙는 친척분들이 많이 오셨다. 할머니와 큰아빠는 우리 자매를 연신 친척분들께 소개하였다. “얘가 첫째, 얘가 둘째.”, “얘가 큰딸, 얘가 작은딸.”, “얘가 지수고, 얘가 지호.” 우리 자매는 쉴 틈 없이 불려 다녔다. 우리는 가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똑같은 생각을 동시에 하는데 그때도 그랬다. 언니와 나는 ‘언제나 자신의 가정사를 말해야 하는 상황’에 지쳤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이혼하셨어요.”, “학비를 낼 돈이 없어요.”, “아빠가 다른 사람이랑 싸워서 어제 경찰이 왔어요.” 그리고 이제는 “아빠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가 어제 돌아가셨어요.” 우리는 살면서 계속 우리의 삶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49재의 초제가 끝나고 다들 이제 서울로 올라가는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친척들과 인사를 하고 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언니가 내게 옆구르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순간 잘못들은 줄 알았는데, 가방을 내게 맡기더니 사람들이 안 보이는 건물 뒤편으로 달려가 옆구르기를 하고 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친척들이 딴 곳을 보고 있을 동안 바로 옆에서 옆구르기를 했다. 정말 이상한 장면이었다. 앞에는 산이 보이고, 바람이 불고, 스피커에서는 스님이 불경 외는 소리가 들리고, 언니는 눈앞에서 옆구르기를 했다. 누가 봤다면 아빠가 죽고 큰딸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나중에 왜 그랬냐고 물으니 언니는 "몸이 너무 찌뿌둥했고 땅이 평평했잖아."라고 말했다.


  그 모든 일이 있고 나서, 언니는 내 자취방으로 놀러 왔다. 언니와 나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저녁을 먹으면서 웃긴 이야기를 하고, 할 일을 위해 노트북을 켜서 작업을 했다. 그러다 내가 야식을 사러 가자고 말했다. 밖으로 나오니 선선한 여름밤의 날씨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또 똑같은 생각을 했다. 우린 이제 잘될 일만 남았다고, 우린 이제 잘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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